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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파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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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오 Sep 07. 2020

파리, 8월의 일기

잘 자요 남은 날들 중에 몇 개는 제대로 쓸 날이 있겠지요

8월이 되자 파리의 낮과 밤은 한껏 달아올랐다. 건조한 공기 덕분에 그늘과 조금의 바람이라도 있다면 그럭저럭 견딜 만은 했지만 시야를 위해 커튼을 걷어 올린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은 무척이나 강렬해서 책상이 모래사장이라도 되는 듯 나는 하루 종일 상의를 다 벗고 지냈다. 그러던 날씨가 한 번의 비로 툭하고 꺾여버렸다. 마치 요리가 끝난 프라이팬을 싱크대에 넣고 물을 뿌린 것처럼 차악 하는 소리와 함께 열기가 다 사라졌다. 창 위에 늘 상연되는 잎들의 무료 영화도 어느새 가을의 씬들을 그리고 있다. 


아 우리가 파리에 처음 왔을 때 보았던 색들이다. 


반가움과 함께 불쾌하지 않는 쓸쓸함도 함께 느낀다. 2주 정도는 평생 안 하던 찬물 샤워도 했었다. 그치만 오늘 20분 정도 거리로 무료 나눔 하는 책상을 받으러 갔을 때 재킷 안으로 스며드는 아침 바람에 잊었던 한기를 다 느꼈다. 4년을 앉아 뭔가 애를 썼을 책상을 우리에게 넘겨주시는 분은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걸까. 검정 책상을 덜어내도 빼내야 하는 짐이 작은 방 안에 가득했다. 웃으며 덕담을 나누고 우린 스스로도 우스운 모양새로 책상을 두 대의 투흐띠네뜨에 나눠 걸친 채 주말의 아침 공기에 덜거덕 조금의 소음을 보탰다. 책상은 뭐라도 만들라는 듯 가을의 창 옆에 자리 잡았다. 여기에서 쓰는 글들, 여기에서 조각내 붙이는 씬들, 나는 잠시 저 내일로 흘러가서 벌써 그리움을 느꼈다. 애써 품에 안고 와서 한 달을 채 못 돌린 선풍기는 다시 비닐과 종이가방으로 싸서 온수통 위 선반에 넣어두었다. 시간이 흘렀다. 감상도 채 못 남긴 시간들이..


시간은 언제나 그렇게 빈자리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반성을 하고도 또 반성을 해야만 하는 것은 다 그런 이유 때문이지. 


https://youtu.be/o_jAT51GWw8


지난 8월에는 엠마의 생일도 있었다. 매년 다른 날에 찾아오는 것이 좋다고 음력을 고집하는 엠마의 생일이라 놓칠까 긴장하며 그 간격을 매일 세어 가고 있었다. 엠마 없이 혼자서 외출을 해본 일이라고는 작년 가을 형의 결혼식을 위해 혼자 한국을 다녀왔을 때와 이동중지 기간 동안 잠깐 장을 보러 다닐 때뿐이고 늘 같이 나가 같이 돌아오는 것도 모자라 늘 같은 순간에 화장실을 가고 다시 붙어 모든 곳에 발자국을 함께 찍는 우리이기에 엠마 몰래 혼자 선물을 사러 나가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온라인으로 뭔가를 주문해보려고도 했지만 나란히 놓인 모니터에 뭔가를 몰래 띄우기가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무엇이 필요한 지 묻고 물으며 며칠을 괴롭혀 보았다. 마지못해 그녀가 고른 것은 이발기였다. 그건 선물이 아니라고 떼를 써 보았지만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는 것이 더 싫다며 책으로 시선을 옮기는 그였다. 결국 엠마는 예전에 비가 내리는 던 겨울, 중고 직거래를 하러 갔다가 바람만 맞고 오게 했던 그 눈물의 이발기를 손에 넣었고 배송이 올 때까지 유튜브로 남자의 머리를 깎는 법을 보고 또 보았다.


생일 전 날 공부를 하는 척하면서 엠마가 집중하는 사이사이 마트에서 매번 가득 넣어주는 색색의 전단지 위로 가위를 몰래 돌려 Bon anniversaire 라는 글자 장식을 만들었다. 바르셀로나가 나폴리와 챔피언리그 16강전을 하던 그날 저녁 축구를 보는 척 한 자씩 방 가운데 벽에다 슬그머니 붙였다. 글자가 완성되기 전에 그녀가 보진 않을까 진땀이 다 났다. 전단지로 만든 허접한 장식 가운데 서툰 프랑스어로 쓴 편지를 함께 붙여두곤 무심히 계속 축구 보는 척을 했다. 그녀가 하던 공부를 마치고 나를 돌아보다가 벽의 장식을 발견했다. 쑥스러움을 넘어 괜히 미안한 마음마저 들게끔 감격스러워해주는 그녀가 그 밤 그 방 가운데에 있었다. 우리는 그 벽을 배경으로 두고 작은 파티를 했다. 마트에서 함께 고른 핑크색 로즈와인을 나눠 마셨다. 


함께 축하를 할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 감사한 일이다. 우리의 방은 별 볼 게 없지만 군데군데 우리의 성격들이 드러나 있어 정겹고 훗하는 웃음을 짓게끔 만든다. 갠 듯 안 갠 듯, 제대로 건 듯 안 건 듯 놓여 있고 걸려 있는 옷들. 신기한 균형과 혼돈이 함께 존재하는 식탁과 책상. 그런 것들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신기한 나를 닮은 그. 


며칠 전, 생일을 기념할 겸 나선 외출에서 못 먹고 다시 가져온 케이크는 모양이 다 일그러져 있었다. 모든 것들이 다 조금씩 어설픈 밤이지만 행복은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 날은 생일을 기념할 겸 생마르탱 운하에 소풍을 나간 날이었다. 사람이 붐비는 주말을 피해 평일, 점심에 조금 못 미치는 시간 꿀벌이 가득 날아다니는 빵집에서 샌드위치와 조각 케이크를 사 들고 운하를 향해 걸었다. 주말이면 운하의 양 옆에 늘어 앉아 맥주를 마시는 이들로 가득한 운하 주변은 평일이라 그런지 비둘기와 햇볕을 찾아온 노숙자들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사람이 오가지 않는 운하는 그 낡음만이 두드러져 보여 잊혀진 도시의 자랑처럼 서글픈 느낌마저 주었다. 운하의 녹색빛 물 안에는 인공인지 자연의 것인지 모를 신기한 수초가 있었다. 그리고 제법 큰 물고기들이 유령처럼 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센강 쪽과 뺑땅 쪽 사이에 고도 차이가 꽤 있기 때문에 운하는 몇백 걸음의 길이마다 갑문으로 쪼개져 있었다. 주말이면 유람선을 더 높이 흘려보내려고 갑문을 닫고 물을 채워 배를 올려 보내는 장면도 볼 수 있다지만 평일의 갑문은 이가 나간 틈으로 녹색 피를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운하를 따라 걸어가다 보니 사진으로 익숙하게 보았던 반원의 독특한 다리들이 연달아 보였다.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다리들은 사람이 그 등에 오르면 흔들어 물에다 빠뜨려야지 웃음 꾹 누르며 살이 다 튼 등을 멀끔히 드러내고 있었다. 건너편에 마트가 있어 우리는 할 수 없이 다리를 넘었다. 등을 흔들지는 않을 거지? 재차 물으며 조심히 다리를 넘어가던 엠마는 정점을 넘어서자 추락하듯 남은 걸음을 후다닥닥 옮겼다. 타이밍은 놓친 다리가 분하다는 듯 부르르 떨렸다. 잎들은 보다 웃다가 그만 계절의 예보가 되었다.


마트에서 음료수를 하나 사서 운하 곁에 앉아 샌드위치를 나눠 먹었다. 건너편 빌르망 정원에는 상의를 탈의하고 잔디에 엎드려 등을 태우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해가 높이 올라가자 운하의 녹색 물이 은은한 빛을 발하였다. 음침해 보이기까지 했던 풍경이 금세 분위기를 바꾸었다. 탁한 녹색과 옅은 하늘색 그리고 갈색이 되어가는 나뭇잎의 짙은 녹색이 좁은 캔버스 위에 겹겹이 뿌려져 있었다. 바람이 불자 그 모든 색들이 한데 뒤섞일 듯 요동을 쳤다. 하지만 색들은 자기의 주장을 쉽게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래 흔들림은 버티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고통스러운 춤이니까. 흔들림이 보잘것없는 잎들의 녹색도 속을 지운 탁한 물빛도 다 빛이 나게 만들었다. 비바람에 찢어지듯 흔들리는 붉은 Lavage 깃발, 가만히 바라보는 나, 가려움, 달리기, 달리는 악몽.


사람들이 땀과 오일을 함께 흘리고 있던 공원의 잔디밭을 가로질러 파리의 동역 앞으로 가보았다. 코로나가 무색하게 역의 안과 밖은 바캉스를 다녀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제는 앨범에서 페이지가 많이 넘겨져 버린 여행의 모습 속의 우리를 잠시 생각했다. 여행 중에는 여행을 생각하지 않으니까 이제 이곳의 날들이 정말 일상이 되었구나. 동역 앞 거리에는 흑인들이 자주 가는 미용실들이 줄지어 있었다. 거리의 풍경은 파리가 아닌 듯 이색적이었고, 거리 위의 사람들 중에는 동양인은커녕, 백인들의 모습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거리 중간중간에 무리 지어 보여 있는 이들이 이 거리의 유일한 이방인들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았다. 응시의 대상이 된 우리는 긴장을 하며 거리를 쉼 없이 가로질렀다. 마침내 익숙한 풍경에 발을 묶고 숨을 돌리자 대답을 못 들은 늦여름의 열기가 우리의 목을 더듬었다. 까르르 웃음이 터지는 곳에서 날아든 높은음을 업은 분수 방울이 내 귓불에 닿았다. 내 귓가에서 상큼하게 터지는 웃음의 주인공들은 잔인한 오후의 더위도 못 멈춰 세운 그 시간 유일한 순수한 움직임들.


https://youtu.be/DtzcbxQy1pc


얼마 전에는 체류증 갱신 신청을 했다. 헝데뷰를 잡는 일조차 쉽지가 않아 체류허가 기간을 넘겨 불법체류자가 되는 일이 흔하게 발생하는 악명 높은 프랑스의 체류증 갱신. 하지만 코로나가 악명 높은 프랑스의 행정에도 강제적으로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내가 거주하는 지역은 온라인으로 서류를 업로드하고 확인이 완료되면 지정해주는 날짜에 방문을 해서 지문을 채취하는 방식으로 예전의 방식에 비하면 감사할 정도로 간편하게 바뀌었다. 체류증 갱신을 하다 보니 지나간 시간들이 실감이 났다. 작가가 쓰려고 했다면 작위적이라며 부담을 느꼈을 만큼 수많은 장애물들이 그 1년 안에 가득히 몰려 있었다. 버틴 것만으로도 지금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예상 밖의 일들을 기꺼이 끌어안으며 성급히 닻을 올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기특해지는 날들이다. 선택은 언제나 잘못이 없다. 일들은 다가오기 마련이고 우리는 그 어떤 곳에서도 그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앎이 무엇인지는 문제가 주어졌을 때만 알 수 있는 것. 문제가 오지 않았을 때, 실은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마흔을 앞두고 찢어진 커리어와 길을 잃은 자아를 내가 문제를 읽고 있는 증거일까. 잘 안다고 떵떵거리던 ‘나는’ 어느새 줄행랑을 쳐 버렸고 친구 따라왔다가 어리둥절해진 ‘주인공’이 우연을 응시하는 순간, 이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걸까.


두 번째 체류를 맞아 집에는 새로운 친구들이 꽤 늘었다. 상자에서 나오자마자 밥을 먹으며 급히 짜낸 힘으로 내 머리카락을 썰어버린 이발기부터, 매일 아침 나의 잠을 깨우며 침대 밑에서 미로 찾기를 하는 로봇 청소기, 그리고 진드기나 해충을 박멸하는 슈퍼 히어로 스팀청소기까지. 일주일에 하루 외출할까 말까 하는 좁은 일상의 진폭이지만 가구의 구조를 바꾸고 창에 방충망을 붙였다가 떼어내고 오래된 나무틀들을 스팀으로 소독하고 머리를 깎고 청소기가 길을 찾게끔 발로 툭툭 쳐주는 일들을 하다 보면 계절은 늘 쇼윈도처럼 내겐 너무 빠른 제안이다. 갈아입지 못한 반팔 속으로 닭살 돋은 팔을 감추고 별로 한 게 없는데 너무도 잘 흘러왔음에 쑥스럽다. 눈을 감고 내딘 발걸음 위에서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며 산다. 


한국에는 무척 심하고 긴 장마가 있었고 늦은 가을 태풍이 자비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안정적으로 관리되던 확진자수가 갑자기 위험할 정도로 증가했다. 그 사이 프랑스도 곳곳으로 바캉스를 다녀온 사람들이 구릿빛 피부만큼 코로나도 카드 명세서처럼 들고들 돌아왔고 근래의 일일 확진자 수는 1만 명을 바로 목전에 둘 만큼 치솓았다. 

하지만 너무 조용하다. 이곳은.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 같은 한국의 뉴스들이 실은 이곳의 이야기는 아닐까 착각을 들게 하게끔 한국과 이곳의 공기는 무척이나 다르다. 


https://youtu.be/SY9wreIGMb8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에 누워 햇볕을 즐기던 날은 아마 이번 여름의 마지막 풍경이 될 테지. 마스크를 쓴 긴 행렬을 따라 궁전의 미로를 돌고 돌아 십자 모양의 인공 연못이 있는 잔디 옆에 돗자리를 펴고 누웠다. 여름의 끝자락에 걸린 해는 아플 만큼 날카롭진 못했고 틈틈이 등장하는 구름이 센서처럼 땅의 온도를 적절히 조절해 주었다. 햇볕에 굳었던 몸을 펴고 있는 엠마의 옆에 앉아 누군가를 위해 애써 잘하는 척 긴장한 턱으로 보트의 노를 젓고 있는 남자들, 소년들, 할아버지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신 잡은 노를 더 잘 돌리는 여자들도 보았다. 바람이 궁전 쪽으로 쉼 없이 불어 네 번을 젖다가 잠시 숨을 돌리면 배는 어김없이 출발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별일 아닌 것들로 반짝이는 시간을 기꺼이 보내주고 있는 사람들. 


후회가 될까. 나아가지 못하던 보트에서 노를 젓던 일이. 무엇도 읽지 않고 무엇도 쓰지 않고 가만히 엎드려 있던 시간들이. 


엄마의 무릎에 달라붙은 금빛 머리의 귀여운 아이. 나란히 잔디에 맨살을 대고 누워 있던 은발의 노부부. 자신의 다리를 베고 누운 여자의 잔머리를 넘겨주던 남자. 거꾸로 바라본 하늘에는 달을 따라 그린 구름이 떠 있었다.


환한 밤, 하얀 달. 너무나 선명히 깨어있는 그래 지금은 꿈속.


8월, 파리는 처음 겪는 여름이었고, 어쩌다 닻을 내린 우리는 기묘한 출렁임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잘 자요 남은 날들 중에 몇 개는 제대로 쓸 날이 있겠지요.


글, 이미지 레오


20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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