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부모님의 사진전

하지만 져도, 난 이번에는 못 견뎌 지고 왔다해도

by 모호씨

어떠한 이미지들은 정서적 기억을 불러 일으킨다. 정서적 기억은 정서와 달라붙어 있는 기억을 말하는데 이 기억이 불러지면 나는 나도 모르게 기억에 속한 감정에 젖어 현실을 잊는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 집에는 나를 흔드는 것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마치 장엄한 분위기의 성당과 같아, 다른 생각들은 할 수가 없고 오직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혹은 공간이 유도하는 강력한 감정에 나를 온통 내어주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나의 집의 이미지는 창살로 대표 되었다. 실제로 내 고향집은 아파트의 1층이라 창마다에는 온통 자잘한 창살이 둘러져 있었다. 사춘기의 나는 온통 폐쇄적인 것들에 눌린다 느꼈었다. 사실 더운 것을 빼면 시각적으로 크게 느끼지는 못했었지만..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는 대구 분지. 그리고 분명 큰 변화는 없을 교사 집안. 따라야 하는 말들만 있는 막내라는 위치. 아파트. 1층. 창살. 나는 탈출을 원했다. 자유롭고 싶었고 끝없이 끝없이 어디론가로 걸어나가고 싶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던 것은, 정해지는 것들에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던 것은 사춘기 시절의 꽤나 치열했던 그 내적 투쟁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는 집을 나왔다. 2번의 짧은 가출이 있었고 1번의 비겁한 속임수가 있었고 마침내는 집에서부터 완전한 탈출을 했다. 부모님을 보는 것이 싫었던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대구의 그 집으로 가는 것만은 왠지 쉽게 마음 먹을 수가 없었다. 가면 처음은 아니겠지만 어디론가 뒷쪽, 내가 몸부림치면 달려 나온 그곳으로 다시 당겨져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랬다.


사진은 강력한 내구성을 지닌 외장하드이다. 사진을 보는 것은 기억을 보는 일이고 기억을 보는 일은 감정을 다시 체험하는 일이다. 집에는 늘 내가 편집하지 못하는 부모님의 구성으로 된 사진전이 전시되어 있다. 그 사진들을 보는 것은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무섭기도 하다. 내가 지운 기억을 내가 지워가는 일들은 자랑이다 전시하고 계신다. 나는 기분이 이상하다.


낡아가는 집은 신파와 같다. 올드하다고 너무 뻔하다고 욕하면서도 엄마와 같이 보게 되는 주말드라마, 고두심 아주머니가 우시면 "뭐야 또!" 하다가도 나도 모르고 음하고 숨을 참아 울음도 참게 되는 신파. 나는 늙기가 싫어 늙지도 않았는데, 나를 뺀 모든 것들이 늙어간다. 엄마와 아빠의 얼굴은 애써 자세히 보려 하지 않았지만.. 내가 앉고 내가 눕고 하는 모든 곳들이 참 많이도 늙어 있다. 멀뚱히 바라보는 거실 천장에도 나이테같은 때가 셀 수 없이 눌러앉아있다. 어쩌면 그래.. 상자 속에든 케익처럼 상자가 낡았는데 케익이 상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 부모님이 기회다 나를 잡아두고 이러쿵 얘기를 하지 않으셔도 나는 나를 자꾸만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 이제는 나도 달라져야 할까? 내가 달라지겠다 하면 참고 있던 부모님은 참았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하겠지. 그냥 가슴이나 치고 잠으로 눌러 놓았던 것들은 드디어 토해내기 시작하시겠지. 나도 안다.


나는 그리 착한 아들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또 그리 못된 아들도 아니다. 몇일 버티지 못하고 일 핑계나 외며 슬그머니 꼬리를 내빼는 것은 착해져 줄 만큼 착하지 못해서 못됐다 있을 만큼 못돼지 못해서 인 거겠지.


세상을 사는 일은 빚을 지고서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만든 것은 하나도 못 가져오고 온통 빌려서 다시 시작을 해야 하지. 그래서 나는 싫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잔뜩 빌려주었는데 빌린 이가 갚을 생각이 없다면.. 그래 화를 내는 마음도 나는 알겠다 한다.


우리 우리로 사는 일이, 네가 너로 내가 나로 살아가는 일이 참 힘들지? 당연하다. 져도 이번에는 나는 지고 왔다 해도.. 괜찮다.


그 싫었던 집을 팔고서 나 좀 더 편하게 해보시겠다 하고 있다 했다. 나는 덜컥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미워해도 아파해도 나는 그 반동으로 버티고 살았는데.. 언제고 상자가 아니라 케익을 내손으로 땅에 묻을 때라도 덜컥 오면.. 글쎄다.. 나는 나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리 착한 아들은 아니라서 이틀만 자고서 바쁜 듯이 또 나왔다. 나는 살고 어미는 죽겠다.


하지만 져도, 난 이번에는 못 견뎌 지고 왔다해도 얘들아 괜찮다. 괜찮다.


W 상석.

P 영화 "동경가족"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