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문학힐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봄여기 Aug 30. 2022

아름답지만 서늘한 꿈에서 깨어난 기분으로...

정보라의 <저주토끼>에 대한 서평

2022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영국의 부커상 최종 후보작이었다는 인터넷 기사를 읽지 않았다면 사실 몰랐을 작가였다. <저주토끼>를 다 읽고 나서야 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소설을 써 온 중견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평소 취미가 데모하는 것이고, 작품료가 높아서 SF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이력이 꽤 마음에 든 데다 <저주토끼>가 무척 재미있어서 정보라 작가의 몇 가지 작품들을 구매리스트에 추가로 올려두고 이 서평을 쓴다.


<저주토끼>는 총 10개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소설집으로 무려 2017년도에 발간된 꽤 연식?이 있는 책이다. 작가의 이름과 내용 때문에 20-30대의 젊은 작가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의 이력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이 책이 더 좋아졌다. 작가의 젠체하지 않는 문장이 좋았고, 간결하고 명료한 묘사가 좋았다. 어떤 단편들( '머리', '덫', '흉터')은 이미지가 강렬해서 꿈으로 표출되곤 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 우리가 아직 무명이었을 때
우리가 살고 싶은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나는 많은 것을 기대했지만
내가 뭘 원하는지 알지 못했어…
(‘재회’ 292쪽)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실려있는 ‘재회’는 온몸이 묶인 상태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폴란드 남자와 폴란드에서 대학원 학위과정을 밟고 있는 여자가 광장을 떠 돌아다니는 한 유령을 동시에 목격하게 되면서 인연이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저 문구가 이야기의 시작을 열고 이야기의 마지막을 닫는다. ‘인간은 왜 태어나고, 왜 살아가는가’에 대한 질문을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오랫동안 소재로 다뤄왔지만 21세기인 현재에도 우리는 왜 태어났고 왜 살아가야 하는지 뚜렷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태어나면서 살아가는 행위는 철저하게 ‘나의 몫’인 이 모순적인 삶의 패턴이란. 때때로 너무 무신경해서 냉혹하리만큼 차갑게 느껴지는 이 세상의 현상들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살을 에이는듯한 고통을 수반한다. 홀로코스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남자의 할아버지, 총살을 당해 다리 한 짝이 없는 절름발이 광장 유령, 어머니의 지속적인 학대로 묶여있는 상태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남자,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 기괴한 사연을 가진 캐릭터들은 단순히 그저 ‘살아간다는 것’의 삶이 아니라 ‘버티고 생존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삶이란 거대한 충격과 명료한 생존본능이 동시에 찬란하게 떠오른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갇힌 채,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그 순간에 했듯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 순간은 짧지만,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생존을 그저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확인하는 동안 죽은 시간도 나쁜 시간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과거에 고정되어 버린 사람들, 그도, 그의 할아버지도, 그의 어머니도, 나도, 살아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사실은 모두 과거의 유령에 불과했다.(‘재회’, 322쪽)


모든 사람들에게 매일의 삶이 ‘생존’이지 않듯이 어떤 이들에겐 매일이 그저 흘러가는 일상의 한 순간이 아닐 수 있다. 매번 삶이 생존의 양태로 흘러가야 한다면 그 삶은 무엇으로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그래서 기억해야만 하는, 기억할 수밖에 없는 역사들이 있다. 역사 속 사람들이 있다. 잔혹하고 야만적인 시대가 준 고통의 순간, 폭력의 피해자들, 붙들린 과거의 시간이 아닌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 전쟁의 시간들이 우리 앞에 계속해서 놓여있다. 청산하지 못한 수십 년 전 과거의 과오들이 현재의 일부로 남아있는데, 과거 속 사건들은 과거의 시간들로 남겨 두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뻔뻔함에 저주를 걸고 싶다.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 산다면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죽어도 죽지 못한 채 달 없는 밤 어느 거실의 어둠 속에서 나를 이승에 붙들어 두는 닻과 물건 옆에 영원히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게 될 예감, 내 이야기를 들어줄 자식도, 손자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방문을 닫고 완전한 어둠 속에 홀로 선다. 이 뒤틀린 세상에서, 그것만이 내게 유일한 위안이다. (‘저주토끼’, 34쪽)


친한 친구를 모함해서 자살로 이르게 만든 한 기업인 가족을 저주하기 위해 만든 토끼 모양의 조명. 저주하는 물건일수록 아름답고 예뻐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대로 토끼 모양의 조명은 아이를 홀리고, 아이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손자와 자식을 모두 잃은 기업인이 결국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대로 저주를 받아 죽음에 이르는 결말은 독자로 하여금 정의 실현의 쾌감을 맛보게 할 테지만 우리는 곧바로 저주 성공 뒤의 도사리고 있을 깊은 심연의 어둠과 마주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안락한 의자와, 자식, 손자도 존재하지 않을 완전한 어둠 속에서 홀로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천지인 세상이므로.


그리고 이제 동굴 안으로 돌아와서, 그는 이성이나 감정으로 어쩔 수 없는 몸의 감각이 익숙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동굴 안은 그의 세계였고, 원하든 원치 않든 그는 돌벽의 주름 한 개, 바닥의 움푹 파이고 솟아오른 부분 하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익숙하다면 그 자신도 이 동굴의 일부가 아니었을까…(흉터, 221쪽)


거리를 배회하다 커다란 새에게 잡혀 동굴에 갇힌 소년은 완벽한 어둠 속에서 주기적으로 커다란 새에게 촉수를 빨아 먹히며 성장한다. 가끔 커다란 새는 소년의 촉수를 빨아먹기 전에 그를 계곡물에 던져 놓곤 했는데 그때가 소년이 빛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소년은 어둠 속에서도 움직임을 익히며 청년이 된다. 촉수가 뽑힐 때마다 점점 더 고통스럽고 회복시간이 더뎌지자 청년이 된 소년은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년이 동굴을 탈출했을 때 긴 어둠 속을 빠져나온 그에게 나는 얼마나 안도의 응원을 보냈던가. 모두가 아는 결말이겠지만 동굴 속 무자비한 폭력과 어둠으로부터 도망친 소년의 앞에는 그만큼 잔인하고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처음 찾아간 마을에서 만난 어떤 남자의 도움으로 음식과 잠잘 곳을 제공받고 싸움판에 나가게 된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면 거대한 날개가 돋고 강철 같은 비늘이 온몸을 뒤덮어 싸움에서 이기고야 마는 그는 신기한 구경거리로써 사람들에게 유명해진다. 싸움이 지속될수록 그의 몸도 점점 쇠약해지고 더 이상 싸움꾼으로서 활약하지 못하자 그는 다시 버려진다. 그렇게 죽음에 이르게 될 줄 알았으나 그는 끈질긴 생의 의지로 다시 일어서 걷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읽는 것이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을 투견으로 만든 남자를 또 만날까 두려워하면서도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나 같으면 마을로는 들어가지 않았을 텐데… 끊임없이 배척당하면서 다른 존재에 대한 갈망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 것일까. 어떤 면에선 프랑켄슈타인을 떠오르게 했다.) 그는 우연히 눈먼 소녀의 집에 들어가게 되고 자신의 오빠로 착각한 소녀 덕에 그는 그 집에서 지내며 자신이 왜 동굴에 감금되었던 것인지를 알게 된다. 눈먼 소녀의 가족을 통해 인간의 패턴과 언어를 배운 그는 소녀를 위해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동굴로 다시 돌아가 새를 기다린다. 동굴의 냄새, 촉감, 어둠까지 자신의 일부 같았던 그 환경을 이용해 새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자신의 촉수를 빨아먹고, 오랜 기간 자신을 감금한 새를 죽였는데 후련하기보다는 서글픈 마음이 된 그는 기뻐할 소녀를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갔지만… 폐허가 된 그곳에는 마을도 소녀도 없었다.

처절하리만큼 슬프고 비극적인 우화인데 이야기의 끝에서 강타하는 이 묵직한 타격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인정하게 만든다. 처음엔 이 이야기를 폭력이나 학대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피해자의 우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나는 이 커다란 새가 ‘자본’으로, 새의 재물이 되어 동굴에 감금되어있던 소년은 ‘자본에 길들여지는 인간’으로 읽혔다. 누구나 공포스러워하고 혐오했던 ‘커다란 새’가 마을을 유지시켜준 존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자본’을 대하는 나의 이중적인 태도와 닮았음을 깨달았다. ‘자본’을 미워하지만 ‘자본’이 만든 사회가 편리하고 문명화된 사회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자본을 혐오하면서도 자본주의 사회를 떠나지 못했다. 공포와 안정, 혐오와 동경을 동시에 갖게 만드는 것이다.


<저주 토끼>에는 10편의 다양한 단편들이 각기 저마다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나에겐 단 하나의 이야기로 읽혔다. 누구나 각기 저마다 숨기고픈 ‘흉터’ 하나씩 지닌 채 저주하고 싶은 대상을 참아가며 생존하다 보면 언젠가는 ‘재회’하고야 마는 대상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과거의 유령이던, 현재의 사랑이던, 나로부터 파생됐고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저주토끼 #정보라작가 #출판사아작 #SF소설 #환상문학







매거진의 이전글 타인을 위해 ‘헌신’했다는 착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