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란 <달 아주머니와 나>로 읽는 작가의 글쓰기에 관하여
작년 여름 작가에게 <달 아주머니와 나>를 선물받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이다. 대학원 다니던 시절 그녀를 처음 만났고, 나는 석사과정을 그녀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당시에도 그녀는 유명한 작가였고 나 포함 많은 후배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강의도 하면서 수업 과제도 늘 충실했고 거기에 작품활동도 끊이지 않는 그녀를 보고 다들 혀를 내둘렀다. 10년 가까이 걸린다는 박사졸업 논문도 3년 안에 쓰고 만 것이다. 몇 번의 술자리에서 나는 선배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쓸 수 있냐고, 가정도 있고 돈벌이로 하는 시간강사 일도 하면서 어떻게 작품활동까지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쓸 수 있냐고 말이다. (나는 석사졸업하는 데도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살짝 취기가 오른 선배는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쓰는 것 외에 달리 할 것이 있니? 쓰는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어.
어떤 순간은 너무 강렬하고 또렷해서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나에게는 그 순간이 그랬다. 두 뺨이 약간 붉어진 그녀는 무심한 말투로 ’제발 좀 써라, 쓰기 좋은 시절이잖니…‘ 라고 덧붙여 말하면서 언니의 어린시절과 언니의 대학시절에 대해서 이야기 해줬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작가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녀처럼 내 모든 인생을 글쓰기에 걸 수 없으므로, 내가 도달하고 싶은 작가의 계급으로는 절대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언니의 단호하고 확고한 문장에서 알 수 있었다. 작가란, 바로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계급이 내 마음속에 생겨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학교를 떠나 전혀 다른 세계속에서 그래도 틈틈이 읽고 쓰면서 살아가고 있고, 언니는 언니 말대로 ‘돈 안되는 글을‘ 쓰고 또 쓰고 계속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
세월호 사건 이후로 8년이 흘렀다. 세월호 진상조사 요구를 위해 열린 시위에서 언니를 두어번 본 적이 있다. 그 이후에도 언니는 세월호의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잊지 않고 놓지 못해 <유채>를 쓰고 오랜 시간을 걸려 <달 아주머니와 나>를 썼다고 했다. 언니는 세월호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들과 피해자들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어떤 봄은 너무 차가워서 꽃을 바라볼 때도 눈이 시리다고 했다. 이제는 8년이나 지났다고, 잊어야 한다고, 잊혀질 권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세상 속에서 , 묵묵히 홀로 죽음과 애도의 시간에 천착해 있는 언니가 어떤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아직도 언니는 세월호에 붙들려 있는가. 왜 그녀는 잊지 못하고 계속 써야만 하는가. 읽기도 어렵고, 재미도 없고 읽으면 날카로운 슬픔이 칼날처럼 마음을 베는데 그녀는 어째서 이 고통을 한아름 짊어지고 계속 써내려가는 것일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된 작가의 숙명에 관한 짧은 고찰이자 자신의 존재를 비워내고 게워내면서 애도의 문장을 짓는 글쓰기에 관한 글이다.
18살의 봄, 공이는 수학여행을 떠난 버스전복 사고로 인해 실종 사망자가 되었다. 공이가 숨어든 달의 집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매일 낮과 밤 먹기만 하는 달 아주머니가 사는 곳이다. 공이는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공이는 때때로 M시에 사는 아버지와 통화를 시도하지만 아버지는 공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오래전 이혼해 떠난 어머니도 만날 수 없다. 가끔 불안과 고통이 공이를 괴롭히는 밤이면 풍만하고 푹신한 달아주머니의 가슴에 안겨 불안과 고통을 잠재운다. 달 아주머니는 “무섭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고 살아 있다고 믿고 싶어서” (p.26) 먹고 또 먹는다. 공이는 그런 달아주머니에게 매일 음식을 제공해주고, 달 아주머니는 그런 공이를 위로해주면서 서로 공생한다. 그러나 이런 일상도 달 아주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끝나고 만다. 공이는 달 아주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린다.
“다시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알고 있는 거라곤 뒤집을 수 없는 무서운 진실뿐이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린다.”(p.158)
"울음을 멈추고 글자를 불러 모은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단어를 찾아 제자리에 놓아주고 서툴게나마 문장을 만든다. 내가 소리를 내 불러보지 못한 이름들이 차례차례 본래의 몸을 찾아가는 모습을 아프게 지켜본다. 이름을 되찾은 주검 위에 화려한 무덤을 만들거나 십자가를 세우지 말아야 한다. 사라진 이름들이 누에고치처럼 작고 소박한 집으로 하나둘 모여든다. 나는 넓고 평평한 벌판이 이름을 되찾은 주검으로 꽉 찰 때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p.231)
공이는 달 아주머니 집에 있던 모나미 볼펜을 주워 어떤 의미가 될지도 모르고, 어떤 글자가 될지도 모르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자신을 애도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던 공이는 이제 펜을 들고 이 세상에 없는 자신의 친구들, 실종된 피해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종이에 써내려 간다. 공이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 마음으로 다른 피해자들의 이름을 문장으로 짓는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채" 죽고 또 죽어야만한 하는 "불안한 영혼"의 공이는 죽음이라는 완벽한 존재의 결여 속에 놓여있다. 자신이 불러줄 수밖에 없는 그 이름들을 위해 글을 쓴다. 잊을 수 없고, 잊히지 않는 죽음과 그 죽음으로 인해 상실된 존재에 대해서 쓸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 사람처럼, 자신이 적는게 글자인지 이름인지 슬픔인지 모른채 그저 써내려간 공이처럼, 어떤 글쓰기는 "넓고 평평한 벌판이 이름을 되찾은 주검으로 꽉 찰 때까지" 멈추지 말고 써야만 하는 필연적인 숙명을 지니기도 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나를 애도해주기를 바란다. 온전히 죽을 수 있기를 소원한다. 살지도 죽지도 않고 언제까지 어둠 속을 떠돌아다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빛도 어둠도 바라지 않는다. 완전히 사라져서 어디에도 깃들지 말아야 한다. 생명을 가진 무엇으로도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p.160)
작가는 “빛도 어둠도 바라지 않는” 공간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서 어디에도 깃들지” 말라고 소망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태워 문장을 지어낸다. 이야기는 끊임없는 생성과 죽음의 과정을 반복하며 탄생한다. 사람의 일생처럼, 탄생과 죽음이 있고 시작과 끝이 있다. 그러나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이야기는 시작하기도 전에 끝이 생겨버리기도 하다. 갑작스럽게 맞딱드리게 된 죽음처럼, 자신의 죽음이 죽음인지 모르고 죽은 존재처럼, 누군가의 죽음이 호명되길 바라는 남겨진 사람처럼 끝맺을 수 없는 이야기를 누군가는 한 자 한 자 써내려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고통의 활자로 지어진 문장이다.
달 아주머니는 오래 전 추돌사고로 죽은 별아저씨를 기다린다. 홀로 남겨진 사람은 매일 먹고 자는 것으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견딘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지 못해 불안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공이의 영혼을 품에 어루만지면서 달 아주머니는 점점 "딱딱하게 굳은 거대한 사물"(p.191)이 되어간다. 공이는 달 아주머니의 품에서 오랫동안 위안을 얻고, 달 아주머니가 생명력을 잃어가는 순간까지 함께한다. 자신은 별 아저씨를 대신할 수 없고, 달 아주머니에게 별 아저씨는 너무 큰 상실이어서 차마 자신이 타고 있던 수학여행 고속버스와 별아저씨의 화물트럭이 추돌해서 같은 날 죽게 되었다는 걸 알릴 수 없다. "떠나는 사람은 용기가 필요하고 남겨진 사람은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힘"(p.189)을 가져야만 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델라 토레와의 인터뷰에서 글쓰기 요법의 효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난 나를 평범하게 만들고 무참히 망가뜨리고 이어서 중요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짐을 내려놓기 위해 글을 써요. 텍스트가 내 자리를 차지해서, 내가 덜 존재하도록. 나는 오직 두 경우에만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자살하거나, 글을 쓰거나."<뒤라스의 말, p.98 중에서>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를 떠올렸다. 내가 아는 그녀는 딱 이 문장과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쓰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 없는 사람, 글 쓸 때 가장 자유로운 사람, 쉬지 않고 쓰는 사람, 명예욕도 물욕도 없는 사람. 이 세상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부유하면서 그저 쓰는 것으로 생존하는 사람. 작가는 자신을 "덜 존재하도록" 만들어서 달 아주머니처럼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영혼을 보듬고, 공이처럼 어디로든 날아가 슬픈 자들의 이름을 호명하기 위해 글을 쓴다. 작가는 자신의 존재를 덜어냄으로써 문장을 짓고, 그 문장은 작가의 존재를 자양분 삼아 이야기가 된다.
<달 아주머니와 나>는 잊힐 수 없는, 잊혀지지 않는 어떤 슬픔으로 시작된 이야기이다. 작가의 고통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탄생했고, 읽는 자들을 고통과 상실 속에 던져놓으면서 존재한다. 읽는 것이 쉽지 않다. 명확한 서사적 내러티브가 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어떤 장면은 넘기는 데 몇 주가 걸린 적도 있었다. 오랜 기간 걸쳐 읽었고, 이제서야 다 읽었다. 책을 받은 이후로 5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이태원 참사가 있었고, 터널 화재사고와 아파트 지하차고 침수사고까지 막을 수 있었지만 막을 수 없었던 나열하기 어려운 허망한 죽음들이 있었다. 그 모든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
"나는 이제 묵묵히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끊임없이 되살아오는 죽음이 아니라 열여덟 봄날에 멈춰버린 내 삶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달 아주머니가 베풀어준 사랑과 위로에 감사를 전하고 돌아가야 한다."(p.249)
이 다음 작가는 어떤 이야기로 돌아올까. 그 이야기는 이것보다 덜 힘들고, 덜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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