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발광적인 에고이즘에 빠져 자기 일만을 생각했다. 그는 카튜샤에게 한 행위를 세상 사람들이 알면 얼마나 자기를 비난할 것인가 하는 생각만 했지 그녀가 어떤 마음의 고통을 견디고 있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선 전혀 생각지 않았다.’
‘더욱이 크게 놀란 것은 마슬로바가 자기의 처지를 - 여죄수로서가 아닌 매춘부라는 처지를 -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만족하고 이를 자랑스러워 하는듯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인간이란 무슨 행동을 하기 위해선 자신의 행위가 중요하고 바람직하다고 여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신의 행위가 극히 중요하고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갖게 마련이다.’
‘우리 사이에 가장 널리 펴져 있는 미신의 하나는 인간은 각기 다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선인이라든가 악인, 현인, 어리석은 사람, 근면한 사람, 게으른 사람 등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그렇게 구분해 단정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인간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 강물은 어느 강에서든 흐른다는 데는 변함이 없으나 강 하나만 생각해 보더라도 어느 지점은 좁고 물살이 빠른 반면, 넓고 물살이 느린 곳도 있다. 또 여기서는 맑기도 저기는 탁하기도 하고, 차기도 따스하기도 하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누구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성격의 온갖 요소를 조금씩은 갖고 있어 어느 정도 그중의 하나가 돌출하면 똑같은 한 사람이라고 해도 평소의 그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사람에 따라 심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톨스토이가 소설 ‘부활’을 통하여 인간의 유형 아니 인간의 속성을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한 귀족과 한 여인의 정신적인 부활의 과정을 그린 레이 톨스토이의 마지막 작품 ‘부활’은 톨스토이와 친분이 있는 변호사 코어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에 기반을 둔 소설이라고 하지만, 톨스토이 역시 젊은 시절 숙모의 하녀를 비극적으로 만든 적이 있어 자전적 소설이라 하기도 한다.
“톨스토이 작품은 단순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다“ - 영국 비평가 메듀 아놀드
“모든 멜로 드라마는 톨스토이의 ’부활’에 기초를 두고 있다“ - 일본 영화감독 미조구초 겐지
19세기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네흘류도프 공작은 우연히 지방재판소에서 한 재판의 배심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피고는 어느 부유한 상인을 독살하고 동과 반지를 훔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는 한 부유한 상인이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현장에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녀는 상인의 돈을 빼앗기 위해 독살했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끌려온 것이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카튜샤였다. 그토록 아름답고 청순하던 여인...
10년전, 네흘류도프 공작은 고모의 양녀겸 하인인 열여섯 살의 카튜샤를 처음 만났다. 네흘류도프는 소녀 카튜사를 유혹해 동침한 후 그녀가 임신을 하자 몇 푼의 돈을 쥐어 준 채 그녀 곁을 떠났고, 그 후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카튜샤는 임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양모 집에서 쫓겨난다. 어려움 끝에 아이를 낳았으나 그 아이는 곧 죽고, 크게 실망한 그녀는 이후 여러 집을 하녀로 전전하며 방황하다가 마침내 창녀가 되고 만다.
그리고 지금 살인과 절도 혐의로 카튜샤가 피고석에 앉아 재판을 받고 있다. 네흘류도프 공작이 보기에 카튜샤의 무죄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유죄판결을 받게 되고 네흘류도프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 여인의 불행은 결국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에 빠져 괴로워하다가 다음날 감옥으로 그녀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증오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냉담했다.
네흘류도프는 그 날 이후 자신 때문에 비참해진 카튜사의 삶을 지켜보면서 비로소 영혼의 눈을 뜨게 된다. 감옥으로 그녀를 찾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지만 카튜사는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나는 창녀가 된 것이 부끄럽지 않아요. 뭇남성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으니까요. 또 그건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죠..”
그는 감옥에 면회를 다니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교도소란 악한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도 수감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네흘류도프는 그녀의 구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이 일을 위해 거부의 딸 "마리아 코르차기나"와의 약혼도 파한다. 그리고 진실로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그를 감싸고 있는 모든 허위와 위선으로 부터 해방되고 싶어 한다. 그는 양심에 충실하고,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원로원에 상소하고 황제에게 청원서를 내며 끈질긴 노력을 기울이지만 상고는 기각되고 4년 중노동 형이 확정되어 카츄사는 시베리아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3등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까지 그녀를 따라간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추악했던 지난날 자신의 삶을 참회하면서, 잘못된 삶을 모두 청산하고, 부귀와 영화도 포기할 것을 결심한다.
그녀의 시베리아 수형생활 중 그의 노력으로 그녀는 잡범들의 감방에서 정치범들의 감방으로 옮겨지게 되고, 그곳에서 그녀는 혁명가 시몬슨과 장군의 딸 마리아 파블로브나를 만난다. 이들로부터 큰 감화를 받아 카튜샤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되고, 마침내 네흘류도프를 이해하고 용서하기에 이른다.
결국 네흘류도프의 끈질긴 노력으로 황제의 사면장을 받아 그녀를 석방시키고, 진실된 노력에 감동 받은 카튜사는 그를 용서한다. 석방된 날 네흘류도프가 카튜샤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하지만. 뜻밖에도 이를 거절하면서 시몬슨과 결혼하겠다고 한다. 그 이유는 네흘류도프의 열성에 감동하여 그를 사랑하지만, 그에게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안 네흘류도프는 더 이상 강요하지 못한 채, 시몬슨을 따라가는 카츄샤를 바라보면서 한없는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절망감을 안고 돌아온 네흘류도프는 마침 머리맡에 놓인 성경을 집어 든다. "일곱 번씩 일흔 번씩이라도 용서하라"는 구절을 읽고는 큰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악을 이기려면 무한한 사랑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날 밤 계속 성경을 읽어가던 네흘류도프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구절에서 자신의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면서, 세계의 명작 "부활"은 끝이 난다.
19세기 말엽 불의와 위선이 팽배했던 제정 러시아. 귀족계급은 민중을 착취했으나 법은 언제나 강자의 편에 서 있었고 종교는 민중의 고통에 침묵해 있었다. 네흘류도프는 카튜사의 비참해진 삶을 바라보며 비로소 자신이 누리는 삶의 번영 뒤에 감춰진 민중들의 아픔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부정과 불의와 부조리와 거짓이 난무하고 있지는 않은가?
얼마 전 국정원장을 지냈던 한 인사의 정당가입과 국회의원 출마라는 문제를 놓고 설왕설래 되었을 때, 적당히 감추고 얼버무리면서 자기의 의도를 숨기고 말했어야 하는데 자기의 액면을 다 내놓고 솔직하게 말했다하여 바보스럽다고 평하는 어느 논객의 방송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다. 솔직하면 바보스럽고 적당히 감추며 모호한 말을 하면 유능한 정치인 이라는 말인가?
세상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불행히도 교회가 더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다가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을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기독교인을 염려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성희롱, 폭력, 수백억원의 비자금, 계파와 파벌싸움, 종교지도자의 제왕적 행태, 거짓과 모략 금권 선거, 아집과 독선....
이 다음에 예수님을 만나면 뭐라 말할까? 도대체 2000년전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가에 죽음을 선택한 예수님의 고결한 사랑과 정신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톨스토이의 "부활"은 한 여인의 삶과 그녀를 향한 애달픈 사랑, 네흘류도프라는 한 인간을 통해 사람 본래의 모습, 참 사랑을 되찾는 인격적인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
이기주의, 양육강식, 치열한 경쟁과 승자의 독식...
공격적이고 탐욕적인 사회 속에서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톨스토이는 네흘류도프를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