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열매] 이지은 글/ 그림
가족들이 모두 잠든 새벽, 커피를 내리며 책을 펼쳐 들었다.
‘아기곰이 혼자 일찍 일어났어요.’
나다.
‘배고파요.’
나다.
떨어지는 빨간 열매의 ‘톡’ 소리
나다.
지이잉- 거리는 커피머신, 위이잉- 거리는 오븐 소리.
이렇게 이지은 작가의 빨간 열매와 처음 만났다.
[빨간 열매]는 꽤나 커 보이는 까만 아기곰이 빨간 열매를 찾으러 나무를 끊임없이 오르는 이야기이다.
곰은 나무를 오르다 빨간 열매의 빨강을 보면 ‘앗!’하고 기대하지만, 애벌레, 다람쥐, 벌집이라 제친다. 결국 나무의 끝에 다다르고, 아무것도 없는 현실을 맞이한다. 그리고 빨간 열매가 아닌 빨강을 쫓으며, 장엄하게 빛나는 빨간 태양에게 몸을 던진다. ‘이거라도!’라는 듯이.
떨어진다. 떨어진다. 인사를 나누었던 애벌레, 다람쥐, 벌집을 속절없이 스친다.
그리고 암흑. 혼돈. 절망..
그러나 다음 페이지에서 그 커다랗던 아기곰이 엄마곰의 품에서 너무도 작은 아기곰이 되어 안겨있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하고, 마치 ‘여러분, 이럴 수가 있네요?!’라는 듯이 독자를 본다.
막연하게 빨간 열매를, 나중에는 그저 빨강을 쫓으며 나무에 오르지만 아기곰은 실패했다. 허공에서 사라져 가는 외마디 비명, ‘아이쿠!'
내가 찾던 열매가 아니라며 인사만 하고 제쳤던 친구들을 뒤로한 채, 아기곰은 속절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따스하게 받아주는 엄마가 있었고, 다시 가족들과 뒹굴며 빨간 열매를 먹는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 아기곰은 노란 달을 보며 또다시 욕심을 낸다. 그리고는 노란 달의 노란 면지로 책이 끝난다. 아마도 아기곰은 노랑을 찾아 또 나무에 오를 것이다.
지난해 연말, 새로운 일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가족은 돌볼 수 없었고, 분 단위로 바삐 움직였다. 아이의 눈보다 핸드폰 화면을 더 많이 보았다.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는 친정엄마의 말에 오히려 발끈했다. 그러다 교통사고가 났다.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한동안 병원에 다녀야 했고 내 몸이 낯설게 느껴졌다. 새롭게 시작하는 일에 또 제동이 걸린 것 같아 씁쓸했다. 절망했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니 인생에 대한 좌절감마저 들었다.
그때 친정엄마가 각종 보양음식들과 사고 후 건강 관련 정보를 보내주었다. 아이를 맡아주고 병원에 가도록 해주었다. 4살의 딸은 잘 때면 꼭 있어야 하는 엄마를 2주간 양보해 주었다. 2주가 지나자 밤에 엄마 침대 곁에 왔지만, 차마 침대 위에 올라오지 못하고 침대 주변을 몇 번이나 어슬렁거리며 들어왔다가 나갔다를 반복했다. 결국 침대 위로 올라오라고 하자, 냉큼 올라와서는 엄마를 등지고 돌아누웠다. 원래 대자로 누워서 자던 아이인데... 왜 그렇게 자냐고 하자, 엄마 아픈데 자기가 건드릴까 봐 그런다고 했다. 남편은 한 달간 바쁜 회사일을 마치고 또 집안일도 돌봐주었다. 그렇게 가족들이 나를 품어주었다.
’ 내가 혼자! 멋지게! 잘할 수 있어!‘ 라며 열심히 나무 위를 올랐는데, 그 아래에서 더 큰 가족이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품어주었다.
병원에 다니던 내게 샤워하던 4살이던 딸이 갑자기 말했다.
“엄마는 참 멋져요. 엄마도 더 멋진 사람이 되고, 나도 더 멋진 사람이 될게요.”
그 말을 처음 들을 때에는, 딸이 멋진 사람이 될 거라는 다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엄마는 이미 멋지니 너무 올라가려 애쓰지 말라는 말 같다.
아이가 방학이었지만, 사고 이후에 치료를 받느라 어디를 갈 수가 없었다. 답답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가족들과 눈 맞춤을 많이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빨간 열매 속 곰 가족처럼 맛난 음식을 나누고, 사소한 일에 깔깔거리고 부둥켜안고 널브러져 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2달 후, 몸이 어느 정도 낫고,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혼자 깬 새벽 4시.
나는 또 노란 달을 본다.
아마도 나는 성취를 해냈을 때 행복을 느끼는 타입이라 늘 새로운 열매를 찾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세상의 다양한 열매를 맛보고 싶다. 새로운 목표에 설레고, 달려가는 과정에서 행복해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열매만 보며 행복해하진 않을 것이다. 열매를 따러 가는 길의 애벌레도, 다람쥐도, 벌들과도 어울리며 즐겁게 오를 것이다. 가족들과의 즐거운 식사가 더욱 소중해졌고, 남편, 아이와 뒹굴거리는 주말 오후가 더욱 행복해졌다. 부모님과 나누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이 즐거워졌다.
오늘의 열매도 맛나게 먹자. 냠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