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제가 되기 한참 오래 전, 저는 뮤지컬 기획일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학예회 대본을 친구와 쓰기도 하고, 연극을 만들고 학창시절 동안 배역을 맡기도 하고 기획을 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작품을 관람했습니다. 공연예술을 좋아했고 그 중에서도 춤과 노래 모두 다 함께하는 뮤지컬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친구들에 비하면 절대적으로 초라한, 말도 안되는 금액의 돈을 받고 다녔습니다. 최저시급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돈이었고 그나마도 마지막 두 달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좋았습니다. 제가 원했으니까요.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요. 대본 선택부터 무대에 뮤지컬이 올려지기까지 그리고 방송 홍보와 기업 협찬까지 정말 다양한 일을 했습니다. 기획안을 참으로 많이도 썼습니다. 생각하는 바를 글로, 도표로, 이미지로 표현하여 타인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게 즐거웠습니다.
한번은 뮤지컬 갈라 콘서트를 기획한 회사에게 의뢰를 받아 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콘서트를 기획한 회사와 함께 하는 회의가 끝나고 팀장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사기꾼의 냄새가 난다. 이 공연 제작비도 못 받고 결국 안 될 거 같다.”
저는 놀라서 어떻게 아시느냐 여쭈었습니다. 회의하면서 본 그들은 그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사기꾼이 나 사기꾼이야~ 하고 얼굴에 써붙이고 다닐 거 같니. 사기꾼들을 하도 많이 보니 이제는 탁 봐도 알겠다.”
그 냄새가 무엇인지 알 리 없었던 저는 공연기획사로 코엑스 오디토리움 대관을 완료하고 회의에 들어온 그 회사 사람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그저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만 했습니다. 제작 계약금을 받고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뮤지컬 배우들을 섭외하고 캐스팅을 하고 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인터파크에 티켓 판매까지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는 동안 그 회사로부터 약속되었던 제작비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공연 날짜는 다가오는데 상황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았고 팀장님은 염려했던 부분이 점점 현실이 되자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눈 끝에 결국 공연 자체를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연말을 맞이하여 설레는 마음으로 뮤지컬 갈라 콘서트를 예약한, 어쩌면 그들의 삶에 첫 번째 공연이, 또는 중요하고 의미있는 날이 될지도 모르는 공연이 이렇게 취소가 된다는 것을 공연예술을 사랑하셨던 팀장님은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평소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 그저 부고란에 '한국 뮤지컬을 사랑한 사람'이라는 말 한마디면 된다고 하셨던 팀장님은 이런 일로 인해 사람들이 다시 공연장을 찾지 않게되는 것이 우려된다고 하셨습니다. 기획사가 아닌 제작사이기에 그럴 의무는 없었지만 공연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취소 공지만 보내고 끝낼 것이 아니라는 팀장님의 의견을 따라 공연을 예매한 수백명의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기획사 대신 사과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시어머니될 분을 모시고 처음 공연을 보러 가는 거였다는 분, 여자친구와 처음 공연을 보러 가는 거였다는 분 등 전화기 너머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팀장님은 제게 그 연락두절된 공연기획사는 아마도 이 뮤지컬 갈라 콘서트 기획안을 들고 돌아다니며 돈을 투자받고서는 잠적했을지도 모른다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배우들은 연말 스케쥴을 다시 짜야 했고, 제작사는 사과 전화를 해야했고, 티켓을 구매했던 사람들은 다시 연말 계획을 잡아야만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시간이 존중받지 못하고,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의미없이 소비되어버린 셈입니다. 보이지 않던 아이디어를 보이는 현실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이런 식으로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사기꾼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누군가는 그런 일을 만들어내려는 사람들을 모두 다 사기꾼이라며 생각을 펼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을 지 모르니까요.
그 일이 있고난 후 회사는 다음 프로젝트로 직접 창작 뮤지컬을 기획하기로 했습니다. 배우 캐스팅 전에 극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대본을 읽으면서 웃던 기억이 납니다. 유명한 뮤지컬도 아닌 창작 뮤지컬이고, 저예산이기에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유준상, 김영호, 김선경, 이희정, 서범석, 허윤정, 김병춘, 이필모 배우가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회사들이 출근하는 오전 9시에 출근을 해서 일을 보고 오후 4시에는 대학로 연습실로 출발했습니다. 기획일 이외에 방송과 잡지사 홍보일을 함께 했기에 방송제작자, 기자들과 만났을 때 진행과정을 보다 생생하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에 배우들의 연습 현장에 함께 했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며 열정 가득한 저를 보고 팀장님들과 대표님은 흥미로워하셨습니다.
오후 5시, 왼편에는 피아노가 있고, 오른편에는 거울이 있는 연습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그 순간. 오후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공기 중에 떠있던 먼지들이 나의 존재를 알아채고 놀라하는 그 때. 나로 인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으로 인해 멈추어있던 시간이 돌아가는 듯한 그 낡고 오래된 건물의 묵혀있던 쾌쾌한 냄새를 만나는, 고요하고 텅 빈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습니다.
대학로 연습실에 배우분들, 연출 선생님과 조연출, 피아노 반주자 모두 모이면 어느 덧 왁자지껄해집니다. 대본에서 보던 그저 활자에 불과했던 대사들이 배우들을 통해 한 인물로 탄생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저와 기획팀이 대본을 읽을 때와는 철저히 다르게 글자들이 숨을 쉬고 말을 하고 움직이며 감정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이 되어갑니다. '아! 이 사람들이 배우구나!' 라고 감탄하며 배우라는 사람들이 지닌 힘을 생생하게 만났습니다. 방송홍보도 함께 담당했기 때문에 배우 유준상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꽤 있었습니다. 저보다는 한참 연배가 있던 그를 저는 준상 선배라 불렀습니다. 그는 연습 기간 중 한 번도 늦는 일이 없었습니다. 한 번은 연습실에 가기 전 근처 슈퍼에서 믹스커피, 종이컵 등을 사고 있었습니다. 준상 선배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연습실 문이 잠겨있다고요. 조연출이 전날 마신 술 때문에 늦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때로 연습이 끝나고나면 야식과 술자리가 있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연출 선생님의 생신 파티를 했고, 창작 뮤지컬 연출이라는 고된 작업과 낮은 금전적 보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던 준상 선배는 현찰봉투를 생일 선물로 건네기도 했습니다. 대학로에서 연극과 뮤지컬을 오랜 시간 했던 사람이기에, 그 고생을 겪어본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선물이었습니다. 선배를 만나기 위해 나무엑터스 사무실에 가 있을 때 그 회사 실장님은 제게 “우리 준상이 광고 모델비가 얼만데, 너네 창작 뮤지컬 정말 말도 안 되는 금액인데 지가 하겠다고 해서 하는 거니 잘 해줘야 해"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준상 선배가 좋았습니다. 그가 돈을 벌고 싶었다면 결코 할 필요가 없는 한미한 출연료였고, 작품의 유명세조차 없는 창작 뮤지컬이었기에 뮤지컬 배우의 명성에 크게 득이 되지도 않았을테니까요. 돈도 명예에도 도움되지 않는 이 작품에 그가 출연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 때 제가 다녔던 창작 뮤지컬 기획사 대표님의이 오래전 그를 캐스팅했고, 그래서 그가 뮤지컬 무대에 처음으로 오르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단순한 이유가 좋았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봐주지 않을 때 캐스팅해주셨던 걸 기억하고, 과거의 고마움을 위해 현재의 불편함을 감당하는 그의 행동은 지금 생각해도 멋집니다.
그 때 그 작품의 뮤지컬 곡 중 하나가 바로 1969년 개봉한 폴 뉴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 Sundance Kid)의 주제곡이기도 한 "머리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이었습니다. 내 머리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눈물이 아니고, 비가 그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보다 자유로운 내게 올 행복에 대한 기대감을 그리는 노래. 빗소리가 새우튀김 튀기는 기름소리처럼 세차게 들리는 날에 이 노래를 틉니다.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내일에 자신의 인생을 내건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 머물던 그 무대가 있는 극장의 향이 떠오릅니다.
런던, 뉴욕, 라스 베가스, 파리 등 세계 여러 도시의 유명한 극장, 오페라 하우스에서 200여편 이상의 뮤지컬, 발레, 오케스트라, 연극, 콘서트, 서커스 공연을 관람한 덕분에 사람들은 제게 공연예술의 향은 어떤지 묻고는 합니다. 요즘은 대학로의 지하 공연장에도 카카오나 그린 계열의 디퓨저를 두는 곳들이 생겨 보다 산뜻한 공연예술 경험을 관람객에게 제공합니다. 그럼에도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선명하고 깨끗하고 화사한 플로럴, 머스키 등의 어떤 향도 아닌 바로 오래된 연습실, 무대 위 두꺼운 장막 옆의 대기 공간에서 나는 그 시간이 묵혀진, 그 자리에 오래 자리하고 있던 먼지가 텁텁하게 베긴 향입니다."
누군가에게는 향이라고 할 수 없는 먼지, 박테리아 어쩌면 분장하면서 떨어진 피부 각질 조직들이 산화되면서 나는 냄새와 같은 그 향들은 저를 그 때 그 자리로 돌려보냅니다. 눈을 뜨기 힘들정도로 눈부신 뜨거운 조명이 무대를 비추면 공연장 안을 부유하는 먼지들 알갱이 하나하나가 다 보이는 공연장 안으로 말입니다. 그 공연장 안에서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변하는 배우들, 전체 그림을 보면서 배우들 하나하나의 방향을 그려내는 연출가,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부분을 하나씩 체크해나가시는 음향 감독, 조명 감독, 안무가, 작곡가 그리고 스텝들, 무대 위 배우의 얼굴을 배역에 맞게 만듪어주시는 메이크업 감독, 배우가 갈아입을 의상들을 준비하는 의상팀, 무대 배경을 완성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소품팀, 무대 위 커튼 뒤의 분주한 공기와는 확연히 다르게 숨죽여 멈추어있는 공기 속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마치 남극공기와 아마존 밀림 공기 그 경계선에 서서 공연이 잘 마무리되길 바라던 심장 떨림은 여전히 제게 뚜렷하게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