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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니날다 haninalda Apr 25. 2020

제라늄-라흐마니노프:피아노 콘체르토No. 2

서울식물원의 향



라흐마니노프

Rachmaninoff:Piano Concerto

No. 2 in C minor, OP. 18




축구장 70개의 크기를 자랑하는 서울식물원.


개장에 앞서 서울의 크리에이터들을 선정하여 개장을 축하하는 행사 <누군가의 식물원>이 열렸고, 서류지원과 면접을 통해 선정되었습니다. 향수의 원료가 되는 식물, 꽃을 바탕으로 하는 천연 향료와 인공 향료를 전시도 하고, 사전 신청을 받아 나만의 서울식물원 향수를 만드는 코너도 준비했습니다. 10월에 진행된 행사였고, 뜨거운 여름부터 그 준비를 하게 되었지요. 참가자분들이 만들 향수의 구조를 어떤 방향으로 설계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조향작업을 할 때 들었던 음악이 바로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가이고 지휘자인 라흐마니노프의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였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음악은 들을 때마다 시작부터 마음에 파도가 치기 시작하는 운동감이 느껴집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서울식물원 향을 설계하던 그 때 이 음악을 듣고 떠오른 것은 바로 제라늄이었습니다.



독일 뮌스터 시내모습




그건 어쩌면 독일 뮌스터에서 열렸던 Skulptur Projekte Münster 에서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술 행사들을 보기 위해 떠났던 독일. 거리에 핀 장미꽃들이 향기롭던 도시 뮌스터. 그 곳의 작품 중 하나는 바로 사람들에게 식물 씨앗을 나누어주고 그것을 심고 관찰하는 것을 추적관찰하는 것이었습니다. 뮌스터의 주민들의 정원 공간에서 만난 책 한권. 따스한 햇살이 비추이던 그 때 나무 아래에서 제레미 델러(Jeremay Deller)작가가 손으로 직접 작성한한 그 아카이브 책을 넘기다 만난 제라늄. 그 책 속에 자리하고 있던 제라늄, 그 제라늄을 비추이던 독일의 태양이 제게 떠올랐습니다.




제레미 델러 아카이브 책 속의 제라늄




종종 '꽃의 여왕'이라 불리우는 로즈, 장미향과 헷갈리게 되는 제라늄. 시트로넬올, 네롤, 제라니올, 리나룰. 장미와 분자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제라늄은 꽃잎이 아닌 잎과 줄기에서 장미와 비슷한 향을 추출합니다. 제라늄의 향이 떠오르고서는 그와 어울릴 다른 향을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이 곡은 파도가 출렁거리고, 바람에 꽃들이 흔들리기도 하면서 서서히 클라이맥스로 올라갑니다. 전설적인 기교, 13도의 음정을 칠 정도로 컸던 손을 가진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했던 그의 이 곡을 들으면 저는 집중이 잘 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생각할 때, 행사 참가자들이 사용할 재료들을 작은 통에 덜어넣거나(뚜껑 열고 잠그는 거 손목이 후덜덜해집니다) 저울들의 건전지를 하나씩 일일이 넣어야하는 작업들을 할 때(이거 은근히 힘듭니다), 무념무상으로 작업에 몰입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곡이 시작되고 15분 정도 지나서 부드럽고 잔잔하게 펼쳐지는 순간에는 창문 닫혀진 작업실 안에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기분을 갖게 만듭니다. 그 때 뮌스터 그 정원의 푸르른 식물들과 꽃들이 떠올라서 그래서 제라늄이 떠올랐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용한 정원, 작가의 작품을 찾기 위해 걷던 우리들, 작품을 지키며 우리를 맞아주었던 뮌스터의 한 대학교 학생이었던 리사, 풀잎들의 모양을 따라한 그림자와 따스한 태양빛, 산들거리던 바람에 실려오던 꽃향기 그리고 새들의 울음 소리.



  

  

 


평화롭고도 따스했던, 마음이 충만하게 차오르던 그 때의 그 순간


회색빛 건물들에서만 살다 만난 초록 때문이었는지, 꽃들의 향기 때문이었는지, 함께 간 사람들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별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저 마음이 따스하게 채워졌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이 음악을 들으면 그 때의 마음이 스멀스멀 차오르던 그 순간이 떠오릅니다. 연주가 진행되고 마지막 부분으로 갈 수록 그런 마음은 더욱 더욱 커져갑니다.



"인생이라는 집채만한 파도가 내가 타고 있는 작은 배를 집어삼킬 듯이 다가와도 두렵지 않고 이겨내리라. 


누가 뭐래도 이 파도가, 바다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 이 풍랑이 오히려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지어다. 그저 나를 맡기며 갈 지어다."


는 생각이 들만큼 두려움보다는 알 수 없는 환희로 가득차는 마음이 되어갑니다. 마음이 그러니 몸에 힘이 차오릅니다. 그래서 집중이 잘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식물원 임시개장을 축하하는 그 행사를 준비하던 그 해 10월

라흐마니노프 Piano Concerto No. 2 in C minor, OP. 18를 들으면서

어쩌면 저는 열정적으로 그 때 제가 만났던 그 식물들, 꽃들의 향을 제라늄이라는 향을 매개체로 하여

서울식물원에서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따스하게 마음이 차오르던 그 순간을요.



서울식물원 '나만의 서울식물원 향수만들기' 워크샵 진행 모습
photographed by 포토그래퍼 양승욱




1901년에 발표된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가 불안증과 우울증을 겪다 정신과의사의 도움을 받아 다시 작곡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할 때 완성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의 고통의 시간의 끝에 완성된 음악이 제게는 힘을 채워주는 곡이 되는 셈이네요. 개인적으로 여러 연주들 중에서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가장 좋아합니다. 제게는 다른 이들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연주들보다 좀 더 담백하면서 감칠맛나게 들려서요.  


2018년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링크를 첨부합니다.


https://youtu.be/aNMlq-hOIoc


이미 아시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살아서 인터뷰할 때 그냥 한 두시간 연습하고 공연한다고는 했습니다.


사후에 부인이 그건 거짓말이었다고 밝히죠. 한 두시간만 자고 연습했다고요. 서울식물원 향을 좋아하는 들이 이 향 너무 좋다~ 라는 이야기를 하면 저도 너스레를 좀 떨어보고 싶어집니다.

"어. 그냥 한번에 만들어지더라..." 이런 식으로요. 그러나 역시 저는  그런 말이 쉬이 안 나오더랍니다. 보이지 읺는 곳에서 불철주야 노력하고 계실 세상의 모든 아티스트와 창작자분들의 오늘 하루가 향기롭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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