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와의 콜라보레이션 작업 요청을 받았습니다. 작가의 작품을 보며 저만의 해석으로 향을 창작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갈까 여러 날 고민을 했습니다.
작가의 이름은 앙뜨 바짐(Ante Badzim)
미니멀한 풍경, 사진 바깥의 모습까지도 상상하게 만드는 올 해의 호주의 사진 작가로 선정된 바 있는 사진 작가입니다. 그가 담아내고 해석해내는 하늘과 바다의 푸른 빛을 좋아합니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건조하게 날카로워진 마음이 촉촉하게 부드러워지는 기분이 듭니다. 처음에는 베르가못과 시트론프룻과 함께 하는 모래사장을 걷다 만나는 산뜻한 푸른 빛의 바다의 향을 만들어보았습니다. 작품에 충실한 향으로요. 그러다 저 작품 속 주인공들처럼 멋진 해변가의 풀장 선베드에 누워 칵테일을 마시는 그런 기분은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블랙베리와 코코넛을 더한 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 작품을 집 안에 걸고 있는, 창문을 열면 저 풍경이 펼쳐지는 그런 공간. 그 안의 워크 인 클라짓에서 저녁 약속을 위해 잘 다려진 하얀 셔츠를 고르고 입고 나오는 남자의 몸에서 나는 향은 어떨까? 그런 상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시트러스하게 시작해서 샌달우드, 앰버, 시더우드가 베이스노트가 잔향에 세련되게 퍼지는. 이 향수를 입고 그녀를 만날 때에는 이 잔향만이 그의 피부를 감싸며 그녀를 환영하겠죠. 그런 상상을 하면서 신나게 작업을 했습니다.
창작을 마치면 항상 에탄올을 섞어 부향작업을 합니다. 오일 형태로 피부 위에 찍어바르는 것과 에탄올이 더해져 공기 중으로 활발하게 날아가는 향분자의 표현은 크게 다르기 때문이지요. 수백번의 스포이드질을 거쳐 완성된 향들이 여러 개였습니다. 중간 중간 한국의 아트 에이전시를 통해 향을 대하는 작가의 이야기도 전달받았습니다. 제 예상대로 그가 좋아하고 즐겨 입는 향은 세련된 향들이었습니다.
한 가지의 향을 선택해야 했기에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코로나가 극심해지기 전이라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는 스타일이 잘 못 하는 편이지만, 제 피부는 하나 뿐이고 하나의 향을 입으면 다른 향을 시향할 수 없기에 부탁했습니다. 고맙게도 친구들은 시간을 내어주었습니다. 건성피부, 중성피부, 지성피부 등 저마다 피부 타입도 제각각이라 제게는 너무도 완벽한 시향이었답니다. 특유의 감성으로 저마다 향에 대한 자신만의 감정과 기억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과일향이 나는 칵테일을 마시던 그 때를,
샤워를 마친 후의 좋은 기분을,
안기고 싶은 보송보송한 누군가의 품을,
다가가기 힘들지만 갖고 싶은 어떤 이를,
그리고
집에 가면 이 작품이 걸려져있을 것 같은 누군가를
친구들의 왼쪽 손목 위
그리고 오른쪽 귀 뒤의 목에 향수를 입힙니다.
손목은 모두들 아시는 향수를 입히는 곳이고, 귀 뒤의 목 부분은 피지선이 있는 곳이라 우리 피부 중에서 조금 더 기름진 부분이지요. 그러다보니 향이 좀 더 오래 지속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시향을 하면 친구들의 손목을, 목덜미를 부여잡게 됩니다.
손목을, 목덜미를 제게 믿고 맡기는 친구들에게 그저 고맙습니다.
제가 여자친구들에게 팔짱을 끼거나 하는 스킨쉽에 친숙한 스타일은 아니다보니 누군가의 피부 위에 코를 갖다대고 킁킁대는 것은 사실 제가 스스로 어색해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친구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듯합니다.) 어색하지만 친구들 피부 위에서 나는 향분자를 만나는 그 순간이 참으로 좋습니다. 향이 체온이 있는 누군가의 피부 위에서 표현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피부란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선인데 그 경계선에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더욱 좋습니다. 시간을 내어 향수를 만나기 위해 와주고, 새로운 향을 착향해야하니 평소에 입던 향수도 입지 않고,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와주어서는 피부를 내어주는 친구들이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시향을 마치고 친구들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면서 미국 시트콤 <프렌즈>를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는 소식에 <프렌즈>를 켰습니다. 파블로스의 개처럼 오프닝 송의 발랄한 띵띵띵~ 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 카페의 그 소파가 떠올랐습니다.
Your Job's a joke, you're broke, your love life's D.O.A.
일은 한심하지. 돈은 없지. 연애는 시작과 동시에 끝이지
It's like you're always stuck in second gear
2단 기어에 꽉 막혀있는 것만 같아
When it hasn't been your day, your week, your month, or even your year, but
너의 하루가, 한 주가, 한 달이 심지어 일 년 전부가 네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라 할 지라도
I'll be there for you
내가 널 위해 그 곳에 있을께
When the rain starts to pour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할 지라도
I'll be there for you
내가 너를 위해 그 곳에 있을께
Like I've been there before
마치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I'll be there for you
난 널 위해 그 곳에 있을께
'Cause you're there for me, too
왜냐하면 너 역시 나를 위해 있어줄 테니까
<프렌즈> 오프닝 노래가 이렇게나 인생을 아는 노래였던가.....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프닝 영상만 몇 번을 돌려서 봤습니다.
1994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6년전에 만들어진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오프닝 노래가 친구에 대해 참으로 정확하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때나 지금이나 인생이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아니 사실은 참으로 어려운 것임을 말해주는 사람들은 많지 않음을요. 그럼에도 삶이 찬란하고, 향기로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세차게 내리는 비를 함께 맞아주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I'll be there for you
난 널 위해 그 곳에 있을께
*붙이는 말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대고 킁킁댈때 사실 저는 웃음을 많이 참고 킁킁댑니다. 이 포즈를 취하는 제 자신이 웃겨서 속으로 엄청 웃습니다. 부탁한 당사자가 웃으면 안 될 거 같아 웃음을 참습니다. 격하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