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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니날다 haninalda Jul 28. 2022

관상, 심상, 그리고 향상 -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

테이-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




낡은 기억의 문은 한번 열리고 나니 평소에는 신경쓰지않았던 전생과도 같은 다른 기억 상자들이 보입니다. 나무액스 실장님은 제게 "너네때문에 우리 준상이가 그토록 안 하던 예능에도 출연하잖니. 너네 뮤지컬 홍보하겠다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어려서부터 거의 본 적이 없던 TV 방송국에 자주 가게 되었습니다.


유준상, 김영호, 김선영 세 배우분들과 함께 한 프로그램의 촬영을 가게 되었습니다. 스튜디오는 매우 컸고 층고는 일반 건물의 4층 높이 정도로 매우 높았습니다. 녹화는 오전부터 시작해서 오후 늦게야 끝났습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카메라, 연출, 소품 담당자분들과 작가님들 많은 분들이 계셨지만 작품 배우 세 분 외에 제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거대한 공간, 저마다 자신들의 일로 바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혼자 촬영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저, 이름도 없는 창작 뮤지컬의 홍보담당자인 어린 제게 관심을 쏟을 일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 때, 메인 MC셨던 유재석씨가 제게 다가오셨습니다.


"스튜디오가 춥죠? 촬영 지켜보고 기다리는 거 힘드실텐데 괜찮으세요?"


라며 식사는 하셨냐며 겉치레가 아닌 따스하게 살피듯이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그의 작은 배려는 따스했고 향기로웠습니다. 메인 MC로 녹화 내내 힘드셨을텐데도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 사람들을 먼저 살뜰히 살피는 폭넓은 시야와 친절한 마음씨. 나중에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의 지난했던 무명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시련이 있었기에 단단해진 그는 저와 같은 미약한 사람도 살피는 여유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닐까 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싶다 생각했습니다.


또 한 번은 지금은 사라진 개그 프로그램 생방송 무대에 배우들이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대기실에 있는 동안 함께 무대 위에서 호흡을 맞추는 개그맨 분들이 인사를 하러 와주셨고, 그렇게 생방송 대기실의 긴장감이 넘치는 공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편하게 웃으며 보는 개그 프로그램을 위해 준비하는 개그맨들이 있는 공간의 공기는 몸을 짓누르듯이 무거웠습니다. 시간이 지나 일했던 뉴욕의 패션위크 백스테이지보다도 아니 그리 멀리 갈 것도 없이 대학 수학능력평가 시험장보다도 가장 긴장감이 넘치는 공기를 꼽자면 바로 그 때의 그 공기였습니다. 제가 처음 갔을 때부터 대기실 복도에서 똑같은 한 마디의 대사를 외우던, 똑같은 제스처를 연습하고 또 연습하던 개그맨 분들의 잘하겠다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날선 긴장감이 팽배한 순간.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되는 개그맨분들이 대기길에 들어오셨고 합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주거니 받거니하는 대사에서 긴장했던 개그맨분들이 틀렸고 죄송하다고 90도 인사를 하며 사과를 하셨습니다. 뮤지컬 무대 경험이 많은 준상선배는 괜찮다고 괜찮다고 했습니다. 함께 있던 다른 개그맨 분은 "이 친구들이 신인이라 긴장해서 이렇습니다. 무대에서는 잘 할겁니다."라고 다독여주셨습니다. 그들이 대기실 밖을 나간 후 저는 혼자 잠시 나가 복도를 걸었습니다. 연습하는 대사들 이외의 잡담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인지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거 같았습니다. 어떤 향분자도 끼어들기 힘들 정도로 긴장감이 강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공기 중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습니다. TV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아주 짧은 그 몇 초의 순간을 위해 뜨겁게 준비하는 그 모습들, 그 공간의 공기는 지금도 뚜렷하게 제 심장에 다가옵니다.


하루는 준상 선배가 제게 친구가 공연장에 찾아올 거라고 했습니다. 배우의 일상을 밀착 카메라로 촬영하는 아침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친구의 그 날 일정이 유준상의 공연장에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촬영 시간에 맞춰 온 배우는 준상 선배처럼 담백하고 깔끔한 결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대학로에서부터 함께 고생하며 연기를 하던 친구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 때 공연장을 찾아왔던 그 분이 <하얀거탑>, <베토벤 바이러스>, <불멸의 이순신>인 김명민 배우라는 것을요. 때때로 공연 연습을 마치고 다같이 회식이라도 하는 날이면 새벽 늦게야 모든 일정이 끝나기도 했습니다. 우리 배우들 중에 언더로 캐스팅된 배우가 있었습니다. 배우가 아프거나 다른 부득이한 사정으로 무대에 올라가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경우에 무대 에 올라가게 되는 운동으로 치면 후보 선수와도 같은 역할입니다. 그러나 투철한 연습은 물론 건강관리까지도 잘하는 배우들 덕분에 제가 있는 동안에 언더 배우는 무대에 오른 적이 없었습니다. 이필모 배우였습니다. 언제 무대에 올라가서 연기할 지는 모르지만 연습만은 다른 배우들과 똑같이 했습니다. 필모 선배는 늦게 일을 마치는 날에는 대학로에서 집 근처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엄마가 틀어놓은 TV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에 등장하는 걸 보고 반갑고 기뻤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묵묵히, 꾸준히, 열심히 해 온 시간들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뮤지컬, TV 녹화 촬영 현장을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절실히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무대 위 TV 브라운관을 너머 보이지않는 곳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의 피, 땀, 눈물이 있다는 것을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의 그 크고 깊은 시간들을요.


준상 선배의 적극적인 홍보 의지 덕분에 이외에도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수많은 관계자분들을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전날 마신 술을 많이 드셨던 거 같습니다. 걸어 들어오는 순간 부터 술 냄새가 났습니다. 어떤 분은 담배를 심하게 피우는 듯 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무거운 담배 냄새가 후두둑 떨어져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키듯 냄새를 퍼트렸습니다. 어떤 분은 담배에 믹스커피까지 더해진 악독한 하수구 냄새를 온 몸에 소란스럽고 시끄럽게 묻히고 돌아다니는 듯 했고 그런 분과 인사라도 나누고 나면 제 몸에서도 그 냄새가 나는 듯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처음 볼 때 첫인상을 말합니다. 누군가는 얼굴을 보는 관상을, 누군가는 김 구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심상을 말할 것입니다. 저는 ‘향상’이라 말해야겠습니다. 그 사람이 내뿜는 ‘향기의 형상’은 제게 그 사람을 말해 줍니다. 촬영장을 함께 다니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준상 선배의 벤을 타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이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과음하지 않아서 함께 하는 순간의 향이 고운 사람이라 참으로 다행이고 고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향상이 좋은 사람은 최소한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 누군가의 기억 속에도 향기를 남기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살아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요. 꿈꾸었던 사랑이 다 부서져 또 흩어져 향기가 된다는 테이의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처럼, 샴푸향이 느껴지 뒤돌아본다는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를 들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자리를 떠난 후에도, 시간이 지나간 후에도 흐믓한 미소를 짓게 하는, 잔향의 선율이 좋은 향상을 가진 사람이 되자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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