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일부터 4일까지 제주
1637년 6월 16일 제주도 어등포(지금의 구좌읍 행원리)에 조선의 제15대 왕 광해군이 도착했다. 조선왕조 역사상 최초로 왕이 제주도에 입도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 1623년 조선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 사건인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의 자리를 빼앗긴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이듬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태안으로 옮겨진다.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이괄(李适)은 반정 세력 내부 권력 다툼의 희생양으로 몰리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1636년에는 다시 강화도 옆 교동도로 옮겨진다. 청나라를 건국한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직접 출병하는 병자호란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명과 청의 교체기에 명과의 명분은 살리는 동시에 떠오르는 청과는 실리를 도모함으로써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가를 지켜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광해군이었다. 상국인 명나라를 섬기지 않고 오랑캐와 화친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조선을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 청나라가 곱게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결국 병자호란은 1637년 1월 30일 발발 후 불과 45일만에 인조가 곤룡포 대신 평민이 입는 남색 옷을 입고 청 태종의 진영이 설치된 잠실 나루 부근 삼전도에 도착해 2만여 명의 청군이 도열한 사이를 걸어 황제를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적인 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로부터 불과 4개월 여가 지난 6월 6일 광해군은 다시 제주도로 이배(移配)된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피해의식이 극에 달한 인조가 더 이상 멀리 갈 수도 없는 땅끝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641년 7월 1일 67세의 나이에 광해군은 제주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는다.
독립적인 고대국가 탐라국이 제주에 건국된 이후 삼국시대(백제)부터 복속의 관계를 가지긴 했지만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했던 제주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추구하던 조선시대부터는 독립국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다. 그리고 조선에서 제주는 유배의 섬이 되었다. 먼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죄를 물어 고려 유신이었던 한천(韓蕆)∙ 김만희(金萬希) 등을 제주로 유배시킨다. 중종 때는 기묘사화에 연루됐던 김정∙이세번이, 명종 때는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됐던 유희춘과 왜군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는 죄명을 쓴(을묘왜변) 광주목사 이희손이 유배됐다. 선조 때는 기축옥사에 연루된 소덕유(정여립의 조카)∙길운절이, 당쟁이 절정으로 치닫는 숙종 때에는 노론의 거두 송시열이 유배됐다. 그 이후로도 유배인이 끊이지 않으면서 조선에서 제주는 명실상부하게 유배지 1순위로 자리매김한다. 제주가 유배지로 선호된 것은 조선의 영토 안에서 왕이 거처하는 곳으로부터 가장 먼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제주는 땅끝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조선이 가진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전까지의 제주는 땅끝이 아니라 ‘바다로 열린 섬’이었다. 심지어 고려 시대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제주에 상륙한 몽고군에게도 제주는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 기지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탐라총관부 설치). <고려사>에는 1012년 고려 현종 때 제주가 대선 2척을 고려에 조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 당시에 제주는 이미 대형 선박을 건조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선박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삼국시대부터 제주는 해상교통의 요지이자 국제 해상무역이 활발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제주 근해를 흐르는 제주 해류(난류)는 쿠로시오 해류의 한 지류로 일본 규슈 서쪽을 흐르는 해류에서 갈라져나와 제주 남쪽에서 서쪽 끝을 지나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제주 해협을 지나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후 서해의 중앙을 따라 북상하다가 발해만에 이르면 중국 본토 연안을 따라 남진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제주는 해상 교통의 요지이자 중국과 일본, 동남아와 서구를 연결하는 연결점이었던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제주시 건입동 산지항에서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사용되던 중국 화폐 오수전(五銖錢)과 한나라를 일시 빼앗았던 신나라(서기 8~23년) 시기의 왕망전(王莽錢) 등이 출토된 바 있다. 교류가 활발했던 만큼 다양한 세력이 제주에 터를 잡았을 것이다.
연결의 섬으로서의 제주의 역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탐라국의 건국 신화가 나온다. 태초에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홀연 세 신인(神人)이 한라산 북녘 기슭의 모흥혈(毛興穴, 삼성혈)에서 솟아났다. 세 신인의 이름은 첫째가 양을나(良乙那), 둘째가 고을나(高乙那), 셋째가 부을나(夫乙那)로 사냥을 하며 가죽 옷을 입고 고기를 먹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줏빛 흙으로 봉한 나무함이 동쪽 바닷가로 떠밀려와서 열어보니 돌함과 사자(使者)가 있었다. 돌함에는 푸른 옷을 입은 세 명의 처녀와 송아지, 망아지, 그리고 다섯 가지 곡물의 씨가 있었다. 사자가 “나는 벽랑국(碧浪國)에서 온 사자인데 우리 임금이 세 딸을 낳으시고 이르시되, 서쪽 바다에 있는 산에 신자(神子) 셋이 태어나시어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시다 하시며 신에게 명하시어 세 따님을 모시고 가도록 하여 이 곳으로 왔사오니 마땅히 세 따님을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라고 말하고는 구름을 타고 떠나간다. 이 내용만으로도 많은 것을 유추해볼 수 있는데 첫째, 당시 제주는 이미 여러 씨족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가장 큰 세력이 양씨, 고씨, 부씨의 3성이었으며 이미 일정한 지배체제를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세 성씨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을나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단군처럼 지배자의 호칭이었을 것이다. 둘째, 이 당시 제주는 아직 수렵채집 중심의 신석기 시대였다. 섬이 넓고 기후가 좋아 수렵채집만으로도 충분한 인구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셋째, 해양 교류가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문물을 전해준 벽랑국이 어디인지에 대해 전남 완도에 존재하던 소국(小國)이라는 주장, 일본이라는 주장, 인도라는 주장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그 곳이 어디든 이미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임금과 공주라는 호칭과 가축, 곡물을 전해준 것으로 보아 이들은 이미 수렵채집 단계를 넘어 농업국가로 발전한 선진국이었다.
많은 건국신화가 그렇듯 제주의 삼성혈 신화 역시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발굴 작업을 통해 이미 2세기 전후에 제주에서는 전 지역이 동일한 양식의 토기를 사용하고 지배자의 무덤이 등장한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 시기에 이미 강력한 지배계층이 자리잡고 있었고 섬 전체가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고대 국가로 형성되던 시기에 제주에서도 탐라국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것도 한반도에 등장한 다른 고대국가와 달리 제주는 처음부터 연결과 융합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 형성의 결정적 기반을 제공하는 세 성씨의 부인들은 제주가 아닌 외국에서 왔다. 그 곳이 어디든 제주 해류로 연결되는 국가였던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직 연구가 빈약하지만 탐라국을 건국한 세 성씨 역시 제주가 아닌 외부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주 출신으로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를 지낸 신용하 박사의 주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1년 신용하 교수는 ‘탐라국 형성의 원류’라는 논문을 통해 탐라국은 B.C. 1세기에서 A.D. 1세기에 걸쳐 고조선 문명권을 구성했던 고구려족, 양맥족, 부여족 일부가 해로를 타고 시간차를 두면서 제주도에 도착해 제주 최초의 고대 국가를 형성하게 된 것이며 그 사실의 일부가 3성씨의 결합에 의한 탐라국 건설 신화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을나는 고구려 족장, 양을나는 양맥족의 족장, 부을나는 부여족 족장으로 보는 것인데 제시한 근거 몇 가지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을나'라는 족장의 호칭은 부여·양맥·고구려 등 북방에서 이동해온 예·맥족 호칭이다. '일본서기'는 탐라국 왕자 고씨가 일본에 사절로 갔을 때 고구려족임을 뜻하는 '구마(久麻)'로 표기했다. '신당서' 등 중국측 고문헌이 탐라국 국왕의 성을 부여·고구려 왕족의 성명 중 하나인 '유리(儒李)'라고 기록하고 있다. 용담동 석곽무덤에서 나온 철제 장검 2점은 만주 길림성과 대동강 이북 서북한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한반도 남부·남해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제주도 여러 곳에서 발굴된 수혈주거지가 만주·한반도 맥족과 한족의 수혈주거양식과 동일하다. 3을나가 거주구역과 형제 순위를 정할 때 사용한 활쏘기는 맥족의 관습이었다. 탐라국 형성 초기 유적유물들이 모두 제주도 북방 해안에 집중된 점도 탐라국 건국 주체세력이 북방으로부터 들어온 증거라는 본다. 탐라국은 고조선 문명권을 구성했던 고구려족, 양맥족, 부여족의 대이동 과정에서 건국된 뒤 섬 안의 다른 지역 마을공동체를 포섭하면서 제주도 전체로 확대 발전했다는 논리인데 나는 이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탐라국은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지역에서 해류를 타고 제주로 유입된 이주민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국가였다. 제주는 고립의 섬이 아니라 국가가 형성되는 시점부터 ‘연결과 융합’의 섬이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이 또 있다. 바로 지금으로부터 1만 5천 년 이전에는 제주도와 지금의 한반도, 대마도와 일본 열도가 모두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서해(황해)는 당시만 해도 육지여서 중국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걸어서 중국으로 갈 수 있었다. 경희대 지리학과 윤순옥 교수와 경북대 지리학과 황상일 교수가 <한국지형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당시 황해와 동중국해는 곳곳에 사막이 펼쳐진 육지였고 차갑고 건조한 날씨 때문에 넓게 펼쳐진 초원 위를 매머드가 무리지어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 구체적인 증거가 제주에서도 발견된다. 2003년 제주 안덕면 사계리 바닷가에서 지금으로부터 1만 9천년에서 2만 5천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사람 발자국과 동물 발자국 화석이 대규모로 발견됐는데 100여 점에 달하는 사람 발자국과 함께 장비류(털 매머드)의 발자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 학자들도 황해 해저를 시추 조사한 결과 제주도 서쪽과 남쪽, 평안도 앞, 발해만, 양쯔강 하구 등에서 사막의 존재를 확인했다. 대략 1만 5천년 전부터 해수면이 상승하기 시작하여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오늘날과 유사한 해안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해수면이 상승한 이유는 뭘까. 어빙하기가 끝나면서 빙하가 녹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이전에 비해 해수면이 120미터 상승했다. 다시 말해 지금으로부터 1만 5천년 이전까지만 해도 동남아시아와 중국, 한반도, 일본은 육로로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 교차로에 있었던 제주에서는 다양한 연결과 융합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제주를 조선은 땅끝으로 만들어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착취했다. 조선에서 제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립과 착취로 점철된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지역특산물을 왕에게 진상하는 제도는 조선시대 들어 제주민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큰 문제가 됐는데 특히 제주 특산물인 전복과 귤 진상은 민초들을 극심한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진상과 수탈, 관리들의 횡포에 왜구의 침략과 기근까지 더해지자 배를 타고 제주를 탈출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제주를 떠난 사람들은 유민이 되어 전라도, 경상도 뿐 아니라 중국 해랑도(海浪島) 지역까지 떠돌았다. 급기야 1629년 8월 13일(인조 7년)에는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이 내려진다. 제주도민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아예 금지한 것이다. 이 조치로 쌍돛을 단 대선을 만들 만큼 선박제조기술이 뛰어났던 제주에서 더 이상 뗏목 이상의 배는 만들 수 없게 되었다. 고기를 잡는다는 핑계로 돛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갔던 사람들이 육지로 도망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먼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수단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 결과 탐라국 시대부터 제주가 가지고 있었던 선박제조기술과 항해기술은 사장되어 버리고 만다. 지금은 제주 고유의 문화유산이자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한 해녀의 역사도 알고 보면 아름답지 않다. 출륙금지령은 특히 제주도 여자가 육지로 시집가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전복을 채취하는 남자 ‘포작’(鮑作, 보재기)들이 수탈에 못 이겨 도망치면서 조선 후기에 그 숫자가 절대적으로 줄어들게 되자 그 의무가 해녀들에게 전가된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제주에 해녀가 존재하긴 했으나 깊은 바다로 들어가 전복을 잡는 것은 남자들의 역할이었고 해녀들은 주로 얕은 바다에서 우뭇가사리와 미역을 채취하는 역할을 담당했었다. 1694년 제주목사 이익태가 저술한 <지영록>에 따르면 당시 미역 잠녀(해녀)는 800명이나 되는데 비해 전복 해녀는 9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진상품의 수량을 채워야 하는 관리들은 도망친 포작의 가족을 닦달했을 것이고 대부분 포작의 아내였던 해녀들은 연좌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해녀가 되었던 것이다.
이 출륙금지령은 1823년까지 무려 20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이 긴 착취의 시간이 제주 사람들로 하여금 육지에서 온 사람들은 일단 ‘가해자’로 인식하게 하는 고정관념을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이 고난의 시기, 출륙금지령으로 제주 사람들은 육지로 나갈 수 없던 시절에 공식적으로 육지에 오른, 그것도 제주도민 중 아무도 만난 적이 없던 조선의 왕을 만나기까지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것도 여자였다. 바로 거상(巨商) 김만덕(金萬德)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그녀는 기녀의 수양딸이 되면서 어린 나이에 기적(妓籍)에 오르게 되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관아에 가서 양인의 신분을 회복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제주목사 신광익과 판관 한유추를 찾아가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부득이하게 기녀가 된 사정과 양인으로 환속시켜줄 것을 끈질기게 요청하여 결국 양인의 신분을 되찾는다. 이 때부터 사업가로서의 그녀의 재능이 마음껏 발휘되기 시작한다. 포구에 객주를 차리고 제주의 특산물인 말총∙미역∙전복∙우황∙진주 등을 육지에 팔고 기녀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양반층 부녀자의 옷감, 장신구, 화장품 등을 공급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으게 됐다. 그러던 중 1790년대 들어 제주에서 흉년과 태풍의 피해가 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1794년에는 바람과 해수로 큰 피해를 입자 제주목사였던 심낙수가 조정에 구휼미 2만 섬을 요청하는 일도 벌어진다. 당시 흉년은 백 년만에 한 번 있을 정도로 큰 재난이었다고 한다. 1795년 조정에서는 5천 섬의 구휼미를 제주에 내려보냈으나 쌀을 실은 배 12척 가운데 5척이 난파당한다. 이 때 김만덕이 그동안 모은 재산을 내놓아 배를 마련하고 육지 연해의 곡식을 사들여 친척들과 그동안 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도와준 후 나머지를 모두 관아에 보내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도와주게 한다. 이러한 선행은 1796년 정조대왕에게까지 보고가 되고 제주 여인으로는 최초로 출륙을 허락받아 왕을 알현한다. 김만덕의 선행에 감동한 정조가 상을 주려하자 그녀는 대담하게도 한양의 대궐을 구경하고 싶다는 소원을 말하는데 평민 여성이 대궐에 들어가는 것은 당시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내의원 ‘차비대령 행수의녀’라는 임시 직책까지 하사하며 정조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김만덕은 이듬해 봄까지 한양에서 지내다가 금강산까지 유람하고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녀에게 제주는 착취와 고립의 섬이 아니었다. 제주가 가진 자원과 그녀의 사업가적 수완은 그녀에게 기회와 자유를 주었고 세상과 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까지 해주었다. 1812년 10월 22일 74세의 나이로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죽기 직전 가난한 이들에게 남은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주고 양아들에게는 살아갈 정도의 작은 재산만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는 기업가정신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제주시 건입동의 사라봉 기슭에 있는 모충사에 그녀를 기리는 비가 세워졌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김만덕의 본관은 김해이며 탐라 양갓집 딸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집안이 기울어 의지할 데가 없었고 가난하여 고생했다. 옷과 식비를 줄여서 재산을 크게 불렸다. 칠순에도 얼굴과 머리가 신선 부처와 다름없었고 눈동자 두 개가 빛나고 맑았다.” 그녀가 죽은 후 10여 년이 지나 200년간 족쇄가 되었던 출륙금지령이 해제된다.
광해군이 죽고 12년이 지난 1653년. 제주도 정반대편, 지금의 서귀포 안덕면 사계리에 일단의 외국인들이 파도에 떠밀려 들어온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무역선 스페르베르(Sperwer)호가 1653년 1월에 네덜란드를 출발해 같은 해 6월 바타비아(Batavia,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7월 타이완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폭풍우에 밀려 8월 중순 제주도 해안에 표착한 것이다. 배에 타고 있던 64명의 선원 가운데 28명은 익사하고 살아서 제주 해안에 오른 36명 중에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endirk)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작성한 보고서 <하멜 표류기>가 조선이라는 은둔의 나라를 유럽에 알린 최초의 기록이 된다. 제주도에 표착했을 당시 하멜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이듬 해 7월까지 제주에 억류되어 있던 10여개월간 하멜 일행은 공교롭게도 광해군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던 유배지에 머문다.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이 그들에게 매우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하멜은 그 곳이 ‘지금 국왕(효종)의 아저씨가 왕위를 찬탈하려다 갇혀 죽은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국제정세를 빠르게 파악하면서 현실적인 외교를 통해 피폐해진 국가를 바로 세우려 했던 광해군의 삶과 훗날 조선을 전세계에 알리는 하멜의 삶이 유배지 제주에서 오버랩 된 것이다. 광해군은 제주에서 죽었지만 하멜은 1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악착같이 살아남아 1666년 9월 4일 조선을 탈출하면서 하멜표류기를 통해 조선을 세계에 알리게 된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도록 조선은 여전히 문을 걸어잠궜다. 주변의 국제정세는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을 사실상 지배한 당파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 당파 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기회는 하멜이 조선을 탈출한 후 200년이 지나서야 오는데 바로 흥선대원군의 등장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무너진 왕권을 다시 확립하는데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균형감각을 잃고 조선을 더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지도층의 죄는 그대로 일본의 조선 강점으로, 6∙25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그 고통은 고스란히 민초들의 몫이 되었다. 이 엄혹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너지지 않고 이 땅을 지켜낸 것은 오직 민초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개인과 기업이 혁신의 주체로 전면에 나서는 21세기가 되어서야 그 인고의 세월은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제주는 여전히 절해고도(絕海孤島)의 관광지로서만 가치가 있는 고립의 섬이어야 하겠는가. 아니면 태고적부터 부여받은 연결과 융합의 섬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해야 하겠는가. 이제 제주는 바닷길 외에 하늘길이 육지와 일본, 중국 그리고 전세계로 연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제주는 과거 ‘탐라국’의 영광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2006년 7월 제주는 특별자치도가 되었다. 1991년 12월 <제주도개발특별법>이라는 이름으로 최초 제정된 <제주특별자치도특별법>은 제주도민이 주체가 되어 지역이 가진 자원을 보호하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제주는 중앙정부의 계획과 달리 독자적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지역이 되었다. 다시 말해 제주는 다시 연결과 융합의 섬, 더 나아가 창조의 섬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제주가 다른 어떤 지역보다 지역창업생태계를 더 성공시킬 수 있는 이유다.
항상 저녁 비행기를 타고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좀 일찍 도착해서 저녁 약속 전에 5km 러닝을 했다. 코스는 탑동광장을 출발해 용두암까지. 탑동광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들민이 해산물을 채취하고 수영을 즐기는 아름다운 해변이었는데 1991년 매립이 되면서 광장으로 조성되었다.
원래 해변의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탑이 있어서 탑동으로 불리게 됐는데 지금도 탑동 여기저기에 작은 탑들이 있고 광장 끝에 위치한 야외공연장도 탑의 형상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이 탑들은 모두 방사탑(防邪塔)으로 마을로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제주 전역에서 방사탑을 볼 수 있지만 탑동에 탑이 많았던 이유는 이 지역에 유독 청상과부가 많았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들어오는 살기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해서 해변 좌우에 돌탑을 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용두암까지 가려면 한천(漢川)을 건너게 되는데 높이 7~8미터 계곡 사이에 멋들어진 용연(龍淵)이 자리를 잡고있다. 용이 놀던 연못이라는 전설 때문에 용연이라고 불리는데 물이 맑고 달밤의 경치가 아름다워 조선시대 선비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연못에 배를 띄워놓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객들에게 잊혀지고 제대로 관리가 안 되어서인지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용두암은 언제 보아도 신비롭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저녁 미팅 전에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 인사차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 모인 장소는 칠성로에 위치한 <일도가공>. 마치 태국에 와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가게는 이미 핫플레이스가 됐다. 정밀공업사를 연상시키는 이 가게 이름에는 어떤 뜻이 담겨있을까. 먼저 이 가게가 위치한 곳은 행정구역상 ‘일도’일동이다. 그리고 이 가게는 표면상 식당 같지만 ‘가공’식품 전문기업이 되는 비전을 가지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매우 맘에 드는 작명이다. 일도가공은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종합식품주점’으로 제시한다. 일도가공의 창업 스토리 역시 매우 스타트업스럽다. 창업멤버들은 원래 인근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던 한 숙박 스타트업에 합류하면서 인연이 되었는데 게스트하우스 1층에서 맥주펍을 운영했었다. 아직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대표는 서울에서 디자인 관련 일을 하던 중 로컬 창업에 관심이 있어 숙박 스타트업에 합류한 경우이고 일도가공 현장 매니저인 여성분은 원래 두바이에서 호텔리어로 일했는데 숙박 스타트업의 비전에 반해 제주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스타트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의례 벌어지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숙박 스타트업을 떠나게 됐고 함께 팀을 이뤘던 사람들과 직접 창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실패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이 한 스타트업의 실패가 이 팀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기회가 된 것이다. 일도가공은 모든 메뉴가 다 맛있는데 나는 특히 태국식 샐러드 쏨땀이 좋았다. 제주산 그린 파파야와 콜라비를 채 썰고 태국 쌀, 레몬그라스, 라임을 함께 넣고 로스팅 한 후 식혀서 가니쉬(Garnish)처럼 올리고 그 위에 다시 고수를 듬뿍 올리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집에 쌓아두고 먹고 싶을 정도로 묘하게 자극적인 맛이다. 일도가공에 30분 정도 앉아있으면서 나는 제주가 왜 고립된 섬이 아니라 연결과 융합의 섬인지를 신명나게 이야기했다.
자리를 옮겨 8시부터 제로포인트트레일 유아람 대표를 만났다. 미팅 장소는 이 부근에서 가장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카페 <에이바우트> 칠성로점. 제주는 카페도 대부분 8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늦게까지 하는 곳들이 많지 않다. 에이바우트는 제주 청년이 창업한 기업으로 제주에는 스타벅스만큼 많은데 이미 육지에 진출해 강남 테헤란로에도 매장이 있다. 제로포인트트레일은 제로포인트(해발고도 0미터)에서 출발해 목적지까지 완주하는 트레일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스타트업으로 현재는 산지천의 제로 포인트부터 한라산 정상까지 완주하는 프로그램 하나만을 운영하고 있지만 제주에서 사업성을 검증하고 전국으로 확대할 준비를 하고 있다. 제주에 적합한 사업모델이면서 육지와 글로벌로 확장 가능한 사업모델을 계속 발굴하고 있는 입장에서 제로포인트트레일은 매우 독특하면서도 확장성이 큰 사업모델로 보인다. 이 팀의 또 하나의 매력은 창업가인 유아람 대표의 스토리다. 어느 날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매료된 그는 급기야 소설의 배경이 된 크레타 섬까지 찾아가게 되고 여행에서 돌아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제주로 내려와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전년도 처음으로 유 대표를 만났을 때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던 나는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았나 궁금해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결국 아직도 다 읽지 못했다. 문장이 탁월하다는 건 금방 알겠는데 기본적으로 소설적인 흐름이 나에게는 잘 안 맞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문학가를 꿈꿨던 내가 이제는 단순명료하지 않으면 싫증을 느끼니 사람의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전년도에 코로나로 고생하기 이전부터 충분한 시간동안 지켜보았기 때문에 나는 이 자리에서 유 대표에게 씨드 투자를 제안했다. 성장하는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지만 진입장벽이 높고 브랜드로 성장할 경우 여타의 아웃도어 브랜드들이 하지 못했던 영역을 구축할 가능성이 있다.
다음 날 아침 미팅은 탑동의 또다른 핫플레이스 <ABC베이커리>에서. 아침 미팅 장소로 여기만큼 좋은 곳이 없다. 갓 구워나온 맛있는 빵과 매일 착즙해 판매하는 신선한 주스가 있다. 빵은 이태원에서 유명한 <오월의 종> 사장님이 직접 컨설팅을 하셨고 커피는 품질 좋은 <프릳츠커피>의 원두를 사용한다. 관광객 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사랑받는 식사용 빵을 주로 판매하는 이 곳은 오후가 되면 대부분 빵이 완판된다. 오늘 아침 미팅의 주인공은 제주에서 중소형 숙박업소 침구 세탁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세탁 스타트업 제클린의 차승수 대표. 전국에서 숙박업소가 가장 많은 지역인 제주는 침구 세탁 시장을 검증하기 위한 훌륭한 테스트베드다. 그러나 시장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만만치 않다. 우선 볼륨이 가장 큰 대형 숙박업소의 침구 세탁 시장은 수익성이 지극히 낮다. 여러 업체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상당한 규모의 설비 투자를 해야하기 때문에 스타트업에게는 당장 진입하기 어려운 시장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제클린은 상대적으로 경쟁이 치열하지 않고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중소형 숙박시장을 집중 공략해왔다. 그러나 이 니치 마켓을 안정적으로 확보했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스타트업에게 필수인 확장성과 성장성을 제주도에서 이 시장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여러 차례 미팅을 하면서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을 집중적으로 설계해 왔다. 미팅을 마치고 점심은 ABC베이커리 뒷골목에 위치한 <하루방보쌈>에서. 여기 보쌈은 언제 먹어도 역대급이다. 내가 지금까지 가본 전국 어느 보쌈집 대비해서도 좋다. 여장부 사장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식당 안에 수시로 울려퍼진다. 배가 불러서 다음 약속 장소인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까지 도보로 이동. 탑동에서 출발해 제주성 유적터까지 대각선으로 이동한 후 산지천을 건너 언덕길을 올라가다가 카페 <누옥>을 발견했다. 공간과 커피가 모두 좋았다. 덥고 습한 날씨에 잠시 넋을 놓느라 이번에는 기회가 없었지만 다음에는 가게 주인장에게 스토리를 물어봐야겠다. 잠시 숨 돌리고 다시 출발해 삼성혈과 신산공원 사이 산지천을 따라 걸어 올라가다 우회전 하면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가 보인다. 가보려고 리스트업 해두었던 <제주침술소 소바>가 센터 근처에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다음에는 여기서 점심을 먹어보자.
오후 미팅 손님은 제주살림 강경주 대표님. 제주살림은 제주 전통방식으로 마른두부를 만드는 스타트업이다. 이미 한살림과 마켓컬리에 납품이 되고 있는데 원하는 수량을 다 공급하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강 대표님은 제주에서 나고 자라 서울로 유학한 후 젊은 시절을 시민사회운동에 투신하다 50대 후반이 되어서 제주로 귀향한 분이다.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전정환 센터장이 이전부터 미팅을 몇 차례 권했지만 두부만으로는 스케일업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동하지 않았었는데 2주 전 회사에 방문해 대표님의 창업 스토리와 기업가정신을 듣고 생산라인을 둘러본 후 두부의 맛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먹어본 두부 중에 이런 두부는 없었다. 역시 답은 현장에 있다. 대표님의 비전과 그동안 이뤄놓은 결과물, 그리고 식품의 본질인 두부의 맛을 경험하면서 머리 속에서 그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제주다우면서도 큰 기업가치를 만들어내 제주와 대한민국에 기여할 수 있는 사업계획이 조금씩 다듬어지고 있다.
기분좋게 미팅을 마치고 이번에는 산지천을 따라 산지천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까지 걸어 내려갔다. 한여름 무더위처럼 습하고 더운 날씨.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2 근처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 <브라보>에 들러 팔라조와 초당옥수수 젤라또, 두 종류를 한 컵으로 주문해 산지천을 바라보면서 잠시 쉬면서 먹었다. 부산에서 왔다는 사장님은 가게를 오픈한지 두 달 정도 되었다고 한다. 1층은 아이스크림 가게로, 2층부터는 숙박으로 운영할 계획인데 숙박은 아직 오픈을 못했다고. 이번 달에는 오픈해보려고 한다니 다음에는 여기 숙박도 경험해보자.
다시 산지천 하류 방향으로 걸어서 김만덕 기념관을 통과해 사라봉 방향으로 우회전. 제주여객항 앞을 지나 건입동 언덕길에 형성된 마을을 통과해 제주원도심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사라봉을 땀 흘리며 올라갔다. 높이 184미터.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제주 10경의 하나로 예로부터 ‘사봉낙조(沙峰落照)’라 하여 이 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낙조의 아름다움이 유명했다는데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그 낙조를 보러 꾸역꾸역 올라온 건데 저녁부터는 날이 흐려지면서 구름에 가려 석양 노을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원도심을 바라보는 전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내려갈 때 보니 제주 원주민들에게 사라봉은 산책과 운동을 즐기는 동네 뒷산 같은 곳이었다. 관광객은 많지 않고 거주민들이 적지 않게 산책로를 걷거나 뛰고 있었다. 이런 게 좋다. 사라봉 주변에는 일제 강점기 때 패망하던 일본군이 숨기 위해 파놓은 땅굴들이 여기저기 있다. 내려가는 길에 프랑스 레스토랑 <르부이부이>를 지나쳤다. 맛집이라는데 다음에는 여기도 와보자. 1993년에 지어진 건입현대아파트를 지나쳐 탑동 숙소로 이동. 이 날 도보로 이동한 거리는 총 14km.
3일차 아침 미팅도 역시 <ABC베이커리>. 탑동이 아닌 다른 곳에서 미팅을 해도 되지만 제주 지역창업생태계는 탑동을 중심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기 때문에 가급적 탑동에서 미팅을 하고 있다. 아라리오 제주 김지완 대표와 탑동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한 회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나누면서 콘텐츠가 들어설 공간을 둘러봤는데 가능성이 매우 큰 공간이다. 11월 오픈 목표로 준비하기로. 12시에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승택 이사장님과 오랜만에 만남. 점심 장소로 정해주신 <신해조식당>이 제주에서 간장 쥐치 조림으로는 가장 유명한 곳이라는 고급 정보를 얻었다. 제주에서는 조림 중 쥐치를 최고로 꼽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쥐치가 제주말로 '객주리'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런데 객주리의 영어 이름이 재미있다. 'Unicorn filefish'. 여기서도 유니콘이구나. 식사를 마치고 어제 봐두었던 동문시장 길 건너편 <롤링브루잉>에 가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오픈한 지 한 달 밖에 안 된 신상 카페인데 부산 핫플인 전포동 카페 <나이브 브류어스>가 오픈한 신생 브랜드였다. 제주 원도심이 점점 핫해진다는 게 느껴진다. 아직 오픈 초반이어서 그런지 에스프레소는 맛이 안정화되지 않은 느낌. 커피를 마시고 국립제주박물관으로 이동해 전시를 빠른 속도로 관람하고 제주기상청을 코워킹스페이스로 리모델링한 <W360>에 들러 로컬크리에이터 워크샵에 마스터로 참여한 각 지역 대표 로컬 크리에이터들과 수다를 나누고 팀들의 중간발표를 잠깐 듣고 제주 일정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