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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록 Sep 09. 2019

조국이 쏘아올린 작은 공

염치와 몰염치 사이

썼다 지웠다 하면서…. 내가 왜 이 주말 내내 이런 걸 쓰고 있는가를 생각한다. 장관 하나 임명하는 게 아니라 새삼 처음 겪는 현상이기에 생각보다 복잡하고, 해서 한 번쯤 정리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조국으로 시작하였으나 조국으로 그치지 않는 일종의 징후. 재미있는 건 그게 딱히 조국의 잘못은 아니고, 그는 본의 아니게 우리 사회를 진단하는 일종의 리트머스가 되어 주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 낮던 말았던 역사는 그대로 흘러갔을 것이고, 조국이 아니라 누구라도 검찰개혁을 추구하는 이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더라면 지금의 광기는 어차피 똑같이 흘렀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조국’을 옹호하는 것은 사실 ‘조국' 개인을 위한 옹호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이 팩트인가에 대해 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그 사실관계들을 다 파악할 능력도 없고, 지금 상황에서 유의미한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도 내가 쓰려는 글과 별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슬로보에 지젝의 다음 말로 갈음한다. 


설사 폭력과 강간에 대한 '모든' 보도가 실제 사실로 밝혀졌다 할지라도, 폭력에 대해 떠돌던 이야기들은 여전히 '병리학적'이고 인종주의적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유발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인종주의적 편견이며, "그것봐, 흑인들은 정말 그렇다니까.문명이라는 얄팍한 껍질에 덮인 폭력적인 야만인들이라고!"라 말하는 이들이 느낀 만족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우리는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이라 부를 만한 현상과 마주친 셈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실제로 진실이라 해도, 내가 그런 말을 하는 동기가 거짓인 경우이다. by 슬로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중

그렇다. 얘기하고 싶은 것은 비록 그들이 던진 그 숱한 의혹이 실제로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말을 하는 그 동기가 거짓이기에 유효한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진보 vs 보수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다. 살아보니 그렇다. 인간은 ‘어떤 신념을 지지하느냐’로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게 아니다. 그저 조금 더 염치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그러니 이것은 염치와 몰염치에 대한 이야기이다.


Part 1 : 염치와 몰염치의 정치학

1) 다만 염치를 원할 뿐이다

애석하게도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은 여전히 기울어져 있고 정권 한 번 바뀌었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한달 동안 쏟아져나온 기사들의 양만 보아도 그렇다. 그런 관점에서  조국은 약자다. 대한민국의 민정수석까지 한 양반이 무슨 약자냐고 하겠지만, 약자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도 약자다. 무슨 상고 출신 따위가 대통령을 하냐고...무시하는 자들의 세계에서 그들은 약자다.

그것을 청문회에서 본다. 나중에 자한당 출신의 장관 후보자가 청문회장에 들어서더라도, 민주당의 의원 그 누구도 김진태처럼 히죽히죽 비아냥거리며 질의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혹여 그런 이가 있다면 그는 당 내부적으로 비난 받을 것이고, 지지자들에게 외면을 받을 것이다. 적어도 민주당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그 정도의 염치가 있다. 그들이 염치가 있는 것은  자신들의 우위가 여전히 아주 우연적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지지층이 그걸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우연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예의를 갖추고 조금이라도 더 원칙을 지키려 한다. 우리는 그 염치를 끊이없이 요구해야 한다. 보수의 지지층들로 하여금 염치에 대해 더 예민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2) 우리 안의 이중성_1 : 진보의 도덕 코르셋

그런데 딜레마가 생겨난다. 그러다 보니 특정 세력에게만 지나치게 염치를 요구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너무 오래된 떡밥이다. 누가 부정부패한 짓을 했는데 그게 자한당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수긍하고 민주당이나 정의당이라고 하면 괜히 더 분개하고 있지는 않는가? 왜 그래야 하는가? 진보여서 더 도덕적이야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은 그냥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러니 비난과 비판을 하더라도 그런 기준으로 하자. 

솔직히 저런 의혹들이 만약 황교안이나 김진태에게 쏟아졌다면, “어, 의외로 깨끗한데?”라고 말을 했을 이들이, 조국이라고 하니까 들쑤시는 꼴이 제일 못 보겠다. (대학교수가 자기 논문에 대해서 아무 논란이 없는 것만 해도 참 잘 살아온 인생이다 싶은데..) 괴물과 싸우기 위해서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 빌어 먹을  코르셋을 좀 버리자. 나는 진보도 돈 많이 벌어서 잘 살았으면 좋겠고, 노회찬이 지금도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왜 파렴치한에게는 관대하고, 염치를 아는 자의 염치는 들쑤시는가. 공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과연 공정한 일인가.


3) 불의에도 등급이 있다

인정하자. 나보다 높은 계급의 이들은 어차피 더 많은 혜택과 더 많은 유혹에 사로잡힌다는 걸. 착각하지 말자. 내가 그런 짓을 안한 것은 안한 것이 아니라 그냥 능력이 없어서 못한 것일을 수도 있음. 똑같이 높은 자리에 있어도 많이 해처먹는 놈 있고 적게 해처먹는 놈이 있다. 뭐랄까, 적어도 거기에서 염치와 도덕성이 갈린다고 생각한다.

높은 자리(계급)에 있으니 많이 해먹어도 된다가 아니라 누구는 10억 해먹고 누구는 천만원 해먹었다면 나는 후자가 도덕적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올라갔을 때 그 정도도 안 해먹고, 그 정도의 특권도 누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그 사람을 비판할 최소한의 권리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몰염치에도 등급이 있다. 젊은 세대들의 눈에 조국과 그의 가족이 특혜를 받았다고 느낄 수도 있다.(그 모든 의혹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그들에게 조국은 그저 똑같은 파렴치한 기득권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나경원이 사학비리를, 장제원이 자녀교육을 이야기는 하는 몰염치 앞에서 조국의 파렴치는 너무도 나약해 보인다. 조국이, 민주당이 절대선이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다만 더 큰 몰염치를 막고 싶을 일 뿐이다. 그래도 김진태보다는 낫지 않은가. 조국보다 더 나은 누군가가 있지 않겠냐고? 글쎄다. 지금 같아서는 신생아가 청문회장에 들어가도 전생을 가지고 털어될 것이다. 


Part 2 : 우리는 얼마나 염치 있는가?


4) 우리 안의 이중성_2 :계급적 사대주의 

돈 많고 집안 잘난 이들이 나서면 그 계급의 특혜를 들먹이고 카르텔에 대해 분개하는 이들이 그렇다고 자신보다 돈 없고 가난해 보이는 이들에게는 선뜻 지지를 보낼까. 글쎄다.  ‘쟤보다는 내가 낫지…'라고 생각하겠지. 청소노동자가 후보로 나오면 이슈는 되지만, 득표는 미미하다. 

그게 우리 안의 이중성이다. 정치인은 그래도 나보다 똑똑하고 훌륭해야지, 지도자감이라고 생각한다. 그 판단의 기준이라는 걸 고작  학벌과 직업, 재력에 두고 있지는 않은가.  미안하지만 그게 우리안의 계급적 사대주의이다. 그게 안 되니까 그냥 서민 후보를 뽑으면 될 일을, 선거철마다 시장에서 국밥 먹고 어묵 사먹으며  서민 코스프레 하는 후보들만 줄줄이 있는 것이다. 

그 계급적 사대주의 기제는 참으로 웃겨서 나보다 아예 월등하게 서너칸 정도 높은 사다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분노할 엄두도 못내다가, 한칸 정도 위에 있다 싶으면 분노한다. 왠지 그 머리채는 내가 잡아챌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래서 내가 그 자리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그게 안 되어서 억울한 거다. 

그건 욕망이지 정의감이 아니다. 

사다리 위의 사람들을 비난하는 그 시간에, 더 낮은 사다리에 있는 이들의 삶에 한번이라도 돌이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몰염치이다. 그 순간의  우리는 그 위 칸의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그닥 없어 보인다. 


5)무능력의 도덕성 

그리고 사실 할 수 없어서(할 능력이 없어서) 해먹지 못한 것은 도덕이 아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소소한 권력을 가지고도 깨알같이 해먹는 이들이, 남들의 잘못에는 득달같이 분개하며 사회정의를 운운하는 걸 보면, 정의를 독점했다는 오만에 대한 비난은 누구에게 돌려야 할지 가끔 아득하다. 그런이들을 보자면 말로는 일제시대에 태어났으면 다들 독립운동했을 것처럼 떠들지만, 발톱 2개만 뽑혀도 생각 바뀔 사람들이 태반이다. 

우리는 종종 단지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앞선 사람들을 비판할 권리를 얻은 듯 군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할 지 자신할 수도 없으면서...


6) ‘세대론'이라는 이름의 우생학 

세대론적 관점은 가장 비겁한 시각이다. 애석하게도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아니 그 이전에도 대한민국의 기득권은 5060남자들이었다(20년 전 기사에서 '386세대의 열패감' 같은 단어를 찾는 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세대의 모두가 기득권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누군가는 폐지를 줍는다) 

그런데 그걸 하나의 세대론으로 퉁쳐 버리는 건 일종의 인종차별주의나 마찬가지다. 국가, 인종, 성별, 혈액형 등등으로 사람을 묶어서 차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특정 성향으로 묶어서 일반화해버린다.)

나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아주 잠깐이라도 일제 시대를 겪어온 이들의 삶을, 6.25를 거쳐온 삶을, 가족을 두고 전쟁터로 달러를 벌러 갔던 삶을, 독재자에게 저항하다가 최루탄과 고문으로 망가지는 삶을. 

나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위안부로 끌려가고 전쟁통에 아이를 낳고, 여공으로 미싱을 박고, 남자들의 세계에서 하나하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간 여인들의 삶을. 다만 그 모든 삶들이 때론 함께하고 때론 충돌하여 켜켜히 쌓여 올랐기에 지금 이나마한 삶이라도 있다 여긴다. 해서 그 모든 삶들이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 586을 하나의 세대론으로 묶어 비판하는 것은 일종의 허위 이데올로기다. 때리고 싶은 것을 정해놓고 가상의 허수아비를  세워뒀을 뿐이다. 그런 것은 있지도 않다. 허수아비를 상대로 가상의 분노를 선동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지 말자. 이것은 특정 세대의 문제가 아니고, 그 시선으로 문제를 대하는 건 손톱만큼도 건설적이지 않다. 어차피 모든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른이 된다. 그리고 그 아들은 또 아버지를 죽이고 어른이 되겠지. 


7) 젊은이들의 선택적 분노장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애들 징징대는 거 진짜 못 들어주겠네. 그런데 또 생각해본다. 이것에는 화내어야 하고 이것에는 화내지 말아야 한다는 걸 누가 정해줄 수 있는가. 그런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것이야 말로 파시즘이 아닐까. 

분노하는 대상이  불의라면 그것은 비록 선택적 분노라 하더라도 좋은 것이다. 그들의 눈에 조국과 그의 가족이 특혜를 받았다고 느낄 수도 있다.(그 모든 의혹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그들에게 조국은 그저 똑같은 파렴치한 기득권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 탓할 수는 없다. 

다만 바랄 뿐이다. 이렇게 눈뜨기 시작한 분노이니 그동안 눈여겨 보지 못한 불의들에도, 다만 더 많이 분노하시기를. 사다리를 걷어차였다고 분노하기 이전에, 사다리가 있어도 오르지 못했던 이들의 삶과, 사다리가 다시 생겨난다 해도 그 근처까지 오지도 못할 이들의 삶을 위해서도 분노하고 고민하기를. 적어도 그 고민과 분노가 없다면 자신들의 분노 또한 그저 이기적인 몰염치라는 것을 이해하기를.

종종 잊지만, 때론 서울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하나 더 높은 사다리에 있는 것이다. 공정을 이야기하려면, 자신의 선 자리가 공정한 것인가부터 고민해야 한다. 그 또한 어떤 염치의 시작이다. 




사실 써놓고 나서도 안 올리려고 했는데....임지현 교수님의 글이 떠돌길래 올린다. 


"더 엄격하고 높은 도덕적 잣대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근대화의 주역이었다는데 자부심을 느끼는 보수와 좌파의 차이는 아마도 부끄러움에 있지 않을까 한다. 엄혹한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을 했으므로 더 당당하고 자랑스럽다는 태도가 아니라, “나는 과연 최선을 다했는가”하는 자기 성찰에서 오는 부끄러움 말이다. 그래야 좌파이고, 그래야 사람이다.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힘은 자기 정당성이 아니라 부끄러움에서 온다."

마지막 문장에 백번 공감하면서도 여전히 특정 정치세력에게만 더 엄격하고 높은 도덕적 잣대를 요구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그래야 좌파이고"는 빠졌어야 옳다. 좌파가  아니어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들을 지지할 따름이다. 그들이 절대선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진보여서가 아니라.  

사실 '민주화 시대 이후의 민주주의’같은 것이  특정 세력의 자성 같은 것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PS.   

꽤 공유되고 있는 모 컬럼니스트가 자신의 컬럼에 이렇게 썼더라. 

"지난 칼럼에서도 인용한 짐 콜린스의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를 강남 좌파와 586 정치 엘리트를 위해 또다시 인용해야겠다. 짐 콜린스는 한때 세계 시장을 지배했던 위대한 기업의 몰락을 5단계로 설명했다. 1단계: 성공으로부터 자만심이 생겨나는 단계, 2단계: 원칙 없이 더 많은 욕심을 내는 단계, 3단계: 위기 가능성을 부정하는 단계, 4단계: 구원을 찾아 헤매는 단계, 5단계: 유명무실해지거나 생명이 끝나는 단계. 위기를 부정하면 몰락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성공으로부터 아직 자만하지도 않았고, 원칙없이 더 많은 욕심을 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실패한 주제에 여전히 자만하고, 원칙없이 더 욕심을 내는 단계에 있는 이들의 몰염치가 눈에 더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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