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인수봉 서쪽 벽을 오르다
작년 봄에 등산학교를 졸업하면서 처음으로 암벽등반이라는 것에 취미를 갖게 되었다.
학교에서 주말 6주간 기본 교육과 인수봉 등반 그리고 만장봉 졸업 등반을 끝내고 다시 여름 암벽반에 5박 6일간 설악산 여기저기를 등반하고는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중국에 머무느라 작년에 실질적인 등반은 거기까지였다.
원래 등반은 가을이 피크고 꾸준히 해야지만 두려움을 없애고 등반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건데, 올해 초 한국으로 돌아와 봄부터 다시 등반을 하려니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게다가 매듭법이다 뭐다 학교에서 배웠던 기본 기술마저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패닉에 빠져있었다.
그럴 무렵.. 등산학교 동기 형님의 추천으로 산악회에 가입을 했고 지난 6월부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일 산악회 형님 누나들을 따라 등반을 나섰다.
이번 추석 연휴에도 등반은 계속되었고, 집에서 눈치 보지 않고 나올 수 있는 3명이 인수봉 비둘기길 그리고 만경대 릿지길을 올랐다
등반 배낭은 늘 묵직하다.
기본 장비만 해도 무게가 꽤 나가고, 여기에 1인 1자일(로프)이 필수인 등반이기에 내 배낭은 늘 찢어질 듯 저런 모양이다. 배낭 잘 싸는 것도 중요한데 그게 잘 안된다.
이제 가을이 되면 바람막이나 우모복도 배낭에 넣어야 하니, 슬슬 배낭 가볍게 꾸리는 방법을 연습해야겠다.
약 50분가량의 어프로치(등반 시작점까지 걸어가는 것) 후 등반 시작 포인트에 도착했다.
오늘 등반할 코스는 북한산 인수봉 동쪽면에 위치한 비둘기길이다.
그나마 인수봉에서 쉬운 편에 속하는 길이 '고독의 길'과 '비둘기길'이라고 하는데, 사실 어딜 가든 등반은 다 어렵다.
등반을 할 때는 짧게는 30미터, 길게는 60미터가량 피치가 떨어져 있어 선등자와 후등자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무전기가 필수이다.
산악회 형님들이 선등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무전기를 테스트해본다.
이날 난 3명 중 가장 마지막 등반 주자였고, 선등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무전기 하나를 갖고 등반을 시작했다.
산악회 부대장님 형님이 오늘의 선등자이다.
꽤 오래 산악회에서 등반 실력을 쌓아서 이제 대장님을 능가하는 등반 실력을 인정받아 줄곧 선등을 서는 분이다.
선등 하는 부대장님 뒤로 다른 형님이 등반을 한다.
사실 선등보다도 선등자 바로 뒤에서 등반하는 2번 등반자가 가장 고생을 많이 한다. 선등자 뒤에서 선등자 빌레이를 봐야 하고, 또 바로 뒤에 오는 후등자 빌레이도 봐야 하기에 그 누구보다 바쁜 위치가 바로 2번인 셈이다.
중간 지점에서 2번 형님과 내가 만났다.
내가 오르는 동안 빌레이를 봐주고, 내가 도착하자마자 다시 다음 피치를 오르는 선등자 빌레이를 본다.
비둘기길은 난이도가 엄청 높은 것은 아니지만, 높이에 대한 공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중간에 크랙 지점에서 2번 형님이 레이백 기술을 선보인다.
크랙의 틈이 좁으면 참 편한데, 이 크랙은 조금 벌어져 있어 아주 쉽지만은 않다.
출발 이후 1,2,3번이 다시 만났다.
이다음 피치가 오늘의 크록스이자 하이라이트 구간인 볼트 따기 구간이기에 다 함께 모여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 다음 피치를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다.
선등자인 부대장님이 이제 다음 피치를 향해 등반을 시작한다.
우선 볼트 따기 구간까지 크랙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볼트 따기 구간에서 부대장님이 멋진 등반기술을 선보인다.
인수봉 동쪽의 검암길이나 심우길처럼 볼트 따기 구간이 직벽 코스가 아닌 우상향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 보니 약간의 버티는 팔 힘만 있으면 충분히 볼트 따기로 등반이 가능한 곳이다.
이제 내 차례다.
부대장님이 하는 모습을 볼 때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는데, 역시 쉬운 등반은 없다.
근력 부족으로 중간에 잠시 쉬어가기도 했지만, 차근차근 무사히 난 코스를 지났다.
볼트 따기 난 코스를 지나니 바로 정상이 보인다.
약간의 크랙을 이동해 등반을 하니 인수봉 동쪽 하강 시작 포인트가 보인다.
등산학교 때에도 인수C코스로 올라 여기서 하강을 했었는데, 당시만 해도 이 길을 거슬러 올라오는 건 불가능해 보였으나, 벌써 2번이나 올라오고 나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항상 인수봉 정상에 오면 사진 한 장을 남긴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하강 전에 요렇게 산악회에서 왔다 갔다는 증거를 남긴다.
이제 하강이다.
능숙한 부대장님과 2번 형님이 하강을 준비한다.
조만간 하강 포인트에서 자일 설치하는 방법과 매듭법을 제대로 배울 예정이다.
부대장님 다음으로 하강은 내가 2번째이다.
먼저 내려간 부대장님이 요렇게 사진을 찍어주셨다. 엉덩이를 좀 더 아래로 내려야 하는데, 자세가 그리 좋지 못하다. T.T
이날 비둘기길을 오른 후 하강을 하니 오후 3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등반에 대한 열정이 그 누구보다 많은 형님들이기에 이렇게 하산하기에는 아쉽다는 듯 한 코스를 더 가보자면서 반 강제로 날 끌고 만경대 릿지길로 향했다.
아.... 젠장
하루에 2코스 등반은 아직 나에게는 무리인데....라는 푸념을 할 겨를도 없이 난 이미 만경대 릿지길 위에 있었다.
어찌어찌 만경대 릿지길을 등반하는 가운데, 형님들이 최고의 포토존이라면서 아찔한 곳에 날 세우더니 포즈를 취하라고 한다.
사진을 보니 뭔가 어색한 포즈. 발아래가 완전 절벽이라.... 다리가 덜덜거려서 저런 표정이 나왔나 보다. 엉~~ 엉~~
만경대 릿지길로 마무리하고 하산하는 길목에 석양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산악회 형님이 근사한 사진을 찍어주신다.
등반을 하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이 많다.
그때마다 왜 내가 이 짓을 하고 있는지 후회하면서도 막상 등반을 마치고 나면 뭔가를 이룬 것 같은 성취감에 빠져든다.
그렇다. 일종의 중독이다.
좋은 중독.....
오늘도 새로운 길에서 안전하게 등반을 했고,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