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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sm Jun 24. 2019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한 팀’이었다

52회 대통령기 등산대회 출전기


등산의 ‘등’자도 몰랐던 내가, 2017년 봄에 등산학교라는 곳에 가서 6주간 교육을 마치고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등산이나 등반을 계속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동안 회사일로 중국에 가 있다가 이듬해 돌아와 다시 등반을 시작한 것이 2018년 6월. 우연히 등산학교 동기 형님이 계신 산악회에 들어가서 춘클릿지를 어렵게 등반하고 난 후 신기하게도 작년에 나는 무려 20번이 넘는 멀티 등반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렇게 난 산에 미쳐가고 있었다.


본격적인 등반 경력이 1년도 채 되지 않았던 나는 올해 초 대통령기 등산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산악회 선배들에게 '한 번 참가해 보고 싶다'는 말을 던졌고 그렇게 팀이 꾸려졌다. 그때가 2019년 3월 말이었다.


나를 비롯해서 날 산악회로 이끌어 주신 등산학교 동기 형님, 그리고 등산학교 6 기수 선배이자 동갑내기 산악회 선배까지 이렇게 한 팀으로 꾸려진 3명은 산악회 회장님을 비롯하여 등반대장님 그리고 많은 산악회 선배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한 주 한 주 등산대회를 준비했다.


약 3주간은 산악회 등반 대장님의 지도하에 일요일마다 주마 등반을 연습했고, 틈틈이 매듭법과 응급처치 등 등산대회에 필요한 다양한 이론과 실습도 병행했다.


대회를 앞둔 2주 전부터는 등산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을 위해 서울시 산악연맹에서 준비한 과목별 강의 및 모의 테스트에 참여하여 최종 실전 연습을 마쳤다.


대장님 지도하에 주마링 연습 (우이암)


모든 연습을 마치고 대회에 출전하는 후배들을 격려해 주는 자리에서 “약 한 달간 준비하면서 옛날 대통령기 등산대회의 추억을 잠시나마 떠올리게 해 주어 너무 고맙다”라는 산악회 등반 대장님의 말씀에 대통령기 등산대회가 단순히 대회를 떠나 산악인들이 함께하는 일종의 축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산악회 선배들과 더 친해질 수 있었고 특히 함께 호흡을 맞춘 팀원들과 좀 더 끈끈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출발 당일 아침 함께 파이팅을 외치며!

5월 18일 토요일 아침 7시에 연맹에서 마련해 준 버스를 타고 대회 장소인 부산 다대포 몰운대로 향했다. 부산으로 가는 내내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대회 장소에 도착해서 텐트를 치는 동안에도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선수 등록을 마치고 개회식이 열리는 늦은 오후가 되면서  비는 잦아들었고 그렇게 52회 대통령기 등산대회의 막이 올랐다.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산악인들로 인해 부산 몰운대 일대는 떠들썩했고, 각 시도 연맹에서 마련한 각 부스에는 선수들을 지원하고 격려하기 위한 모습으로 대회장의 열기는 밤이 깊을수록 더 후끈 달아올랐다.


드디어 대회날 아침이 밝았다. 우리 팀은 조금 일찍 일어나 대회 준비를 마쳤고 아침 식사 후 출발 순번을 배정받아 출발을 기다렸다.


참고로 대통령기 등산대회는 3명이 1팀이 되어 주어진 시간 동안 나침반과 지도에 의존하여 각 포스트를 통과하면서 산악 이론, 독도법, 매듭법, 응급처치 등 등산에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점검하고 마지막에 주마(어센딩) 등반까지 완료한 후 모든 점수를 취합해서 순위가 정해지는 방식이다.


드디어 우리 팀의 차례가 다가왔고 힘찬 파이팅과 함께 출발선을 통과하여 첫 번째 포스트를 향해 달려갔다.


첫 번째 포스트에서는 산악 이론에 대한 필기 테스트가 있었고, 중간중간 체크포인트를 지나 두 번째 포스트에서 장비점검 테스트도 무사히 마치고 세 번째 포스트를 향해 다시 힘찬 발걸음을 시작했다.


세 번째 포스트를 향해가는 순간, 지금도 미친 듯이 후회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마음이 너무 앞선 것이었을까? 순조롭게 다음 포스트로 향해가던 나는 잠깐의 방심으로 인해 왼쪽 발이 심하게 접질렸고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정도의 큰 충격으로 바닥에 주저 않고 말았다. 깜짝 놀란 팀원들이 급하게 응급처치를 했고 상태의 심각성을 느낀 우리 팀 대장이 경기를 포기하고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지난 한 달간 이 대회를 위해 함께 땀 흘리며 준비했던 팀원들과 산악회 선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이대로 포기하고 내려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걸어볼게요. 더 걸어보고 그래도 아프면 우리 그때 내려갑시다.”


발을 접질렸던 순간과는 달리 신기하게도 몇 발자국 걸어보니 통증이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날 생각해서 내려가자는 팀원들을 극구 말리면서 우리는 천천히 세 번째 포스트로 향해 달려갔다.


걷는 내내 발이 후끈거리는 느낌은 있었지만 충분히 견딜 정도의 통증이었다. 매듭법을 테스트하는 세 번째 포스트를 지나 독도법 이론을 테스트하는 네 번째 포스트, 그리고 응급처치를 테스트하는 마지막 5번째 포스트까지 마치고 약 50미터 앞에 결승선이 눈에 들어왔다.  


“형님! 선배! 우리 손잡고 들어갑시다.”


그냥 좀 뭉클했다. 내가 발을 다쳐서 운행 발란스가 무너진 것에 너무 미안했고, 오랜 기간 준비했던 것을 포기하고 내려가자고 말해 준 선배들의 모습이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선배들 손을 꼭 잡고 결승 테이프를 끊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 셋은 손을 꼭 쥐고 결승선을 통과했고, 이후 마지막 테스트인 주마 등반까지 52회 대통령기 등산대회를 완주하게 되었다.


텐트로 돌아와 등산화를 벗고 나니 그때서야 통증이 느껴졌다. 이미 내 왼발은 등산화를 벗을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있었다. 대회 측 응급처치 담당자에게 붕대 압박 조치를 받았고 서울로 상경하여 다음날 정형외과를 방문하니 인대가 심하게 파열되어 3주간 반깁스 후 상태를 봐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등산대회 이후 40일 지난 지금은 깁스를 풀었고 꾸준한 물리치료와 재활치료로 인해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잘 걷고 있다. 하지만, 한 달이 넘는 동안 왼쪽 발목에 근육이 빠져버려 등반을 할 수 있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번 대통령기 등산대회를 통해 언제 다시 등반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사고를 당했지만, 정말 소중한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등반을 하는 것도 좋지만, 등반이나 등산을 하면서 닥칠 수 있는 다양한 위험요소들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대처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가장 기본이 되는 산악안전에 대한 이론을 습득하고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나를 지키고 나와 함께 등반하는 자일 파트너들을 지킴으로써 오래오래 등반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대회를 마치고 상경하기 전, 부상당한 발을 이끌고 함께 한 팀원들과 대회를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자갈치 시장에 들러 싱싱한 회에 소주 한 잔을 나누면서 나도 모르게 순간 눈물이 펑펑 쏟아졌었다.


'내가 다치지 않았다면 좀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미안함과, 장년부로 출전해야 할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반부로 함께 해준 등산학교 동기 형님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부상을 당하는 순간 가장 먼저 날 걱정해준 동갑내기 선배의 모습이 떠올라 순간 뭉클했던 것 같다.



벌써 한 달 이상 주말에 산에 가지 못해 많이 아쉽지만, 지난해 열심히 등반했던 열정에 잠시 휴식을 주면서 주변을 한 번 더 되돌아보며 앞으로 더 오래 계속될 나의 등반 인생에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위안을 삼아 본다.


그리고,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내년에 열리는 53회 대통령기 등산대회에도 다시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팀’이었던 이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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