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이며 무자비한 양궁의 나라’. 워싱턴포스트가 한국 양궁에 대해 쓴 기사 문구이다. 경기 내내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제압하면서도, 한국 대표팀은 다른 팀과 달리 웃음과 여유로움을 보였다는 이유였다.
1988년 올림픽 참가 이래 33년째 금메달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여자 양궁 단체전 9연패 위업 달성. 이후 열린 기자회견장의 첫 공식 질문은 “한국은 여러 세대가 지나도록 어떻게 최강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가?”.
위싱턴포스트에 실린 한국 양궁 기사
사실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한국 양궁이 이전만큼 압도적인 결과를 내긴 힘들 것이란 전망도 많았다고 한다. 외국 선수들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 되고 있고, 한국 양궁의 최강 자리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경기 방식 변경으로 변수가 많아졌다는 이유였다. 재미난 것은 해외 양궁의 상향평준화의 배경에 양궁 한류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대회 상위권에 오른 6개국 코치가 한국 출신이다.
88 서울올림픽 이후 33년간 이어오고 있는 한국의 이 같은 믿기지 않는 성과에 많은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철저한 실력 위주의 선발방식 원칙, 일본어 방송까지 나오도록 한 실제 경기장과 비슷한 장소에서의 체험, 이미지 트레이닝을 포함한 과학적 훈련방식, 타국가에 비해 높은 지원 등에서 나아가 이제는 DNA까지 다룬다.
물론, 역사 문화적 접근을 완전히 엉뚱한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인간의 뇌 만큼 복잡한 구조와 기능을 가진 존재는 없으며, 태어난 이후 이토록 많은 뇌의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 역시 단연코 없다. 결국 인간은 유전과 환경의 조합으로 변화하는 고등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보면 중국의 시각에서 우리를 '동쪽 오랑캐'로 폄하하며 ‘동이(東夷)’라 불렀지만, 활을 잘 쏘는 민족임은 인정했다. 동이(東夷)의 오랑캐 '이(夷)'자가 '大(클 대)'와 '弓(활 궁)'을 합친 말이니, 이는 사람[大]이 활[弓]을 메고 있는 것을 뜻한다.
신궁의 역사는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 역시 신궁(神弓)의 피를 타고 났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 역시 신궁으로 불렸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고분 벽화로 전해오는 무용총 ‘수렵도’에 담긴 고구려인의 활쏘기 그림은 신궁의 DNA를 단지 머나먼 역사 이야기로만 남겨두게 하지 않는다.
고구려 고분변화 무용총
하지만, 결국 DNA는 어떠한 환경에 놓이냐에 따라 발현 여부와 그 범위가 영향을 미친다. 인류 뇌과학의 위대한 성과 중 하나로 손꼽히는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은 환경 속에서의 인간의 역동적인 변화와 성장을 잘 제시한다.
‘마인드 체인지’에서 수전 그린필드는 세계적인 신경과학자 브라이언 콜브의 연구를 요약하면서 신경가소성에 대해 “뇌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의 미래도 바꾼다. 당신의 뇌는 유전자만의 산물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쌓이는 경험을 통해 조각되는 것이기도 하다. 경험은 뇌 활성을 바꾸며, 그 변화는 유전자 발현 양상을 바꾼다. 눈에 보이는 행동 변화는 모두 뇌에 일어난 변화의 반영이다. 반대로 행동은 뇌를 바꿀 수 있다.”라고 말했다.
‘뇌는 훈련하면 변화한다’. 신경가소성에 따른 결과 중 대표적인 것이 시간이 지난 후에 이전보다 얼마나 나은 역량을 보이는지 그리고 위기의 상황에서 얼마나 좋은 결과를 내는가로 나타난다. ‘몰입’은 치열한 훈련의 결과이다.
20세의 나이로 양궁 사상 첫 3관왕에 오르며, 신궁(神弓)으로 떠오른 안산 선수의 심박수가 외국 언론의 화제가 되었는데, 3연패를 앞둔 슛오프 마지막 한 발의 상황에서 올림픽에서 처음 도입된 심박수 중계에서 최대 분당 심박수가 정상범위인 100을 조금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대 선수는 168까지 치솟았다. 이날 안산 선수의 심박수는 89에서 119를 오갔을 뿐이다. 경이로운 몰입의 상태라 볼 수 있다.
미국의 저명 심리학자 칙센트 미하이는 이러한 몰입경험을 ‘flow’라 말하며 고도의 집중을 유지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잊어버리고 나아가 자신의 생각마저 잊어버리는 심리적 상태라고 표현했다. 마치 물 흐르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며, 몰입의 순간은 엄청난 파워를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몰입은 어떤 조건에서 일어날까?
칙센트 미하이는 그의 저서 ‘몰입의 발견’에서 “명확한 목표가 주어져 있고, 활동의 효과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으며, 과제의 난이도와 실력이 알맞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누구나 어떤 활동에서도 몰입을 맞보면서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몰입의 경험은 갈수록 쉽지 않을 것 같다. 인간 뇌의 특별함으로 손꼽히는 ‘몰입’의 효용성에서 불구하고, 디지털 정보화 사회로의 발달은 인간 역량의 계발을 가로막는 환경을 첩첩히 쌓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연결된 정보화 사회에서 가장 크게 변화된 특징이 바로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이다. 그런데 인간의 뇌가 하는 기본적인 정보처리방식은 ‘single-in, single out’.
뇌가 하나의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넘어갈 때 간극이 생기는데, 주의력이 이것을 바로바로 따라오기 어렵다. 문제는 이런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멀티태스킹으로 이곳저곳으로 주의를 분산할 때 뇌에 도파민을 분비시켜며 기분이 좋아지는 보상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는 점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앤서니 와그너 교수팀이 18~26세 건강한 남녀 80명을 대상으로 미디어 멀티태스킹이 기억과 주의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실험에서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TV를 보는 동시에 다양한 스마트기기를 사용하도록 하고 뇌파측정(EEG)과 동공 크기 변화를 관찰했다. 그 결과 미디어 멀티태스킹 시간이 길수록 심각할 정도로 주의력과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미국 하버드대와 영국 옥스퍼드대 등 국제 연구진이 수행한 인터넷이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인터넷 사용으로 뇌의 다양한 기능 가운데 집중력과 기억력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특히, 멀티태스킹이 뇌의 주의력을 현격히 낮추며 단일작업에 대한 뇌의 집중력의 저하를 일으켰으며, 또한 단기 기억력이 감퇴 되었다.
한국 양국 대표팀이 이룩한 ‘신궁(神弓)’ 역사의 물줄기의 이어짐과 그들이 흘렸을 땀방울의 무게로 나타난 몰입적 결과는 감탄스럽다. 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무관중으로 열리는 올림픽 경기를 눈 앞에서 스크린으로 보며 환호하고 있는 지구촌의 현실과 교차되어 간다.
검색은 하되 사색은 하지 않고, 눈을 감으면 잠을 자고 상상을 하지 않는 사회로의 진입은 가속화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의 정서적 교류이고, 스크린에 잠시 빠져 있지만 이내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깨어 있음이다.
치열한 훈련의 결과로 나타나는 몰입적 경험의 지속성은 단지 나의 재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내 주변과 함께 하는 데 있음을 인지하자. 몰입을 강조한 칙센트 미하이 교수가 긍정심리학의 대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도쿄올림픽 최고의 사진 중 하나로 떠오른 남자 양궁단체전 시상식에서 맏형 오진혁 선수의 제안으로 한국, 대만, 일본 선수들이 웃으며 다 함께 찍은 셀카 사진처럼 말이다.
금은동 메달의 차이가 아닌 함께 하는 즐거움, 몰입적 경험의 지속성은 나에 대한 사랑을 주변으로 확장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