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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인드박 Nov 15. 2022

사무실에서 우는 일.

눈물의 성공학

군 복무 시절 나는 행정병이었다. 매일 당직, 보초근무를 짜는 일을 맡았는데 선임들이 가만두지 않았다. 주간 근무표가 나오면 나를 불어 바꿔달라며 요구했고, 수시로 나는 불려 갔다. 요구는 어느새 압박이 되었고 그렇게 수정에 수정을 거친 근무표는 너덜너덜해졌다. 누군가에게 수혜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만이 되었고, 이를 들은 중대장에게 불려 가 혼이 났다. 그 일에 신경을 쓰다 보니, 어느새 맡고 있는 다른 업무에 펑크가 났다. 소대장의 경고를 받았지만, 갓 진급한 일병에게 두 개, 세 개의 일을 관리한다는 것은 아직은 버거운 일이었나 보다.

출처-픽사베이


중대장의 명령에 의해 근무표가 수정이 되지 않자, 가장 힘이 큰 '일할 기수'라고 불리는 상병들이 새벽에 근무를 서게 되었고, 결국 집합이라는 것이 걸렸다. 군대생활이라는 게 힘든 건 개인이 아니라 항상 그룹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나 개인에 대한 징벌이 내 옆, 주위로 연쇄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은 큰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그 집합이라는 것도 내가 속한 행정병들이 받는 것이었다.  

 

내가 속한 헌병대는 당시 대외 순찰, 군대 행사를 지원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기 때문에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인원을 뽑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체대 출신들이 많았큰데 아마 일단 체격으로 위압감을 주는 것도 헌병일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행정병들은 주로 현역 헌병 역할을 수행부상을 입었거나, 또는 헌병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빠지는 인원들이 주로 일하는 곳이었다. 참고로 군대헌병들은 일반 훈련소 퇴소 뒤, 후기 집합교육을 따로 받기에 모든 이들에게 기수가 존재한다. 그래서 병영생활의 모든 것은 기수가 기준이며, 가장 힘이 있는 것은 병장으로 넘어가기 전 상병들, 그들을 '일할 기수'라 불렀다.

  

집합이 걸리는 날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부사관들이 당직을 서는 날로, 군대에서는 내무생활 규율과 질서 강화를 위해 인정을 하고 '적당히'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나 역시 새벽에 잠을 자다가 불이 켜지고 갑자기 다른 내무반으로 끌어 갔는데, 그 내무반은 알거나 낯선 중대원들이 우리를 둘러싼 곳이었다.  가장 중앙에는 가죽 장갑을 꽉 낀 상병들이 서있는데 심판자들이었다.

경험이 있었던 선임 행정병 2-3명은 이미 각오를 했던지, 맞았던 경험이 있었던지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뒷짐을 쥐고 목을 상대에게 내밀었다. 최대한 충격을 대비하기 위해 엉덩이를 뒤로 젖히고, 무릎을 굽혔다.


목침이라는 것은 나무로 된 베개만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른 뜻도 있었다. '목을 침'이라는 말을 줄여서  불렀다. 생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목일 텐데 그 목을 때리는 것이 행해진 것은 지금 돌이켜보면 아찔하면서도 야만적인 일이었다. 당시 나에게는 일절 항변도 없이 상대에게 목을 내민다는 것은 개가 주인에게 배를 내미는 것이나, 침팬지들이 털을 골라주는 것과 서열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에 대해 공동책임으로 선 이들이었기에 나 목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지금은 그때의 충격을 다시 회상할 수는 있지만, 얼마나 실감 날지는 신뢰할 수 없다.


풀스윙으로 검은 가죽 장이 내 목으로 날아왔다는 것은 기억이 생생하다. 충격! 잠결에 집합을 당해서 비몽사몽 한 정신에 폭포수를 맞은 것과 같았다. 세차장에서 쓰는 압력이 센 물을 정면에서 맞은 것과 같았다. 육체와 함께 있던 정신이 그 순간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그 유체이탈을 몸소 느꼈던 것은 확실하다. 그날 이후 목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맞았던 부분은 조금의 멍이 남았다. 몸이 불편하긴 했지만, 정작 충격을 받은 것은 마음이었다. 군대 폭력을 몸소 겪은   뒤 정신이 공황상태가 되었다.


문제는 이후였다. 나는 그 일을 겪은 후에 근무표를 더 비정상적으로 짜기 시작했다. 나를 비난했던, 조금이라도 문제를 삼을 것 같은 사람들은 좋은 시간에 배치했다. 대신 나에게 우호적이었던 사람들 그래도 신참이 고생이 많다고 나를 동정했던 사람들, 그리고 굳이 그런말 없이 묵묵히 근무했던 사람들을 취약시간에 배정하기 시작했다. 평일 새벽, 기상전 타임에, 또, 휴가나 외출이 많은 주말에 그들을 배정했다. 더이상 집합은 없었지만, 내 주변에 사람들이 떠나가거나 뒤에서 나를 욕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게 너무 힘들었다.


리고 그일이 있은 후, 소대장에게 제대로 혼이 났다. 내가 또 업무에서 실수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큰 실수였다. 부대 이동 차량의 선탑자를 잘못 배정했기 때문이었다. 대형사고였다. 화가 단단히 난 소대장이 지휘봉을 던졌고 지휘봉이 내 얼굴을 스쳤다. 왼쪽 눈썹 옆이 찢겨 피가 흘러내렸다. 피가 흐르자 나는 사무실에 눈물을 흘렸다. 억울함 때문인지, 부조리함을 눈감고 있는 소대장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 업무를 잘하지 못한 나에 대한 실망감 때문인지, 집에 가고 싶었는지, 그 모든 게 혼재해서 그랬는지, 나는 엉엉 통곡을 했다. 놀이터에서 우는 아이와 같았다.


소대장이 화장실에 가라고 했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갔다. 비어있던 중대장실로 데리고 갔다.

"화 내서 미안하다."

그가 중대장실에 있는 전화기를  내게 내밀었다. 어디든 전화 한 통을 하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우는 아이가 사탕을 받아 바로 눈물 뚝 했던 것처럼 나는 그랬다.

눈 옆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소대장은 나에게 친절했다. 아니 그 뒤로도 화를 낼 것 같은 상황에서도 내 앞에서는 참았다. 눈물이 효과가 있었다.

  

사물실에서 직원들이 종종 울었다. 휴지를 앞에 두고 뽑아서 눈을 닦고 코를 풀었다. 고객이 심한 말을 한 건지, 다른 부서 직원이 매몰찼는지는 모르지만, 서럽게 때론 억울하게 울어댔다.

부하직원이 울 때 어떻게 하라는 교육은 받지 못했기에 나는 당황했다.

부끄러울 테니 모른 척할까

너무 매몰차 보일 테니, 달래줘야 하나

데리고 가서 이야기도 했고 달래도 보았다.

큰 소용은 없는 것 같았다.

여기는 재주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어느새 가만히 두고 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눈물을 참고 묵묵히 일하는 직원이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말을 듣고 였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보다 다수인 그들이 손해 본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침을 맞고 엉엉 울던 20대 내가 다시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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