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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sno Apr 25. 2018

우리 곁의 수많은 '케빈'에 대하여

학교 강당에 동급생들을 모아 놓고 끔찍한 학살을 저지른 한 소년이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남겨진 '죄인'들의 삶과, 악의가 없었던 그들의 지나간 과거를 교차해 가며 비추는 한 영화가 있다. 자극적인 사건 그 자체를 관객들에게 드라마틱하게 전시하는 대신, 전후에 있었던 징후와 남겨진 것들을 조용히 응시하는 방식을 선택한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그런 미덕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케빈에 대하여>는 얼핏 사이코패스 범죄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엄마와 아들 사이의 관계, 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 등의 깊고 풍부한 이야기를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엄마가 자식을 낳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주고 받게 되는 서로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과 태도가 해소되지 않고 쌓이기만 할 때, 어떤 파국으로 치닫게 될 수 있을까. 사소한 잘못들이 한방울씩 쌓여 생각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커다란 죄를 타인으로 하여금 잉태하게 만드는 경우, 문제의 시작을 명확하게 가리는 것이 과연 가능할수 있을까, 혹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죄인을 둘러싼 주위 사람들이 쉽게 보일 수 있는 '반응'을 넘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무엇일까. 영화를 보면서 질문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엄마는 케빈을 낳았다. 원치 않는 출산이었다. 케빈은 다소 이상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엄마는 그런 케빈을 자신이 낳은 자식임에도 기분 나빠했다. 그렇다고 엄마는 케빈을 낙태하거나 고아원에 버리지는 않았다. 심각할 정도로 학대하거나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단지 사랑을 주지 않고 자기 기분대로 대했을 뿐이다.  적당히 귀찮아하고 적당히 돌보았으며 또 적당히 괴롭게 만들었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는것이 그저 짜증이 나서, 악의도 선의도 없이 시끄러운 공사장 한복판에 데려다 놓고 귀를 막고 있는 식으로. 아이를 심하게 다치게 만들거나 눈에 보이는 상처를 남긴 적은 없었고, 아동 학대로 신고를 당할 일도 없었다. 죄에 대해 그 누구도 묻지 않았기에, 엄마는 잘못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는 채로 오랜 세월을 관성처럼 살아왔다.


엄마는 케빈이 동급생들을 학살하는 사건을 벌이기 직전까지도,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평범하지 않았던 것은 마침 좋은 핑계가 될 수도 있다. 그 아이가 괴물이 된 것은 여태까지 키워온 당신 탓이라고 그 때의 엄마에게 쏘아붙였다면 아마도 억울해서 이렇게 울컥했을 것이다. 아무리 내 자식이라 해도 그 아이가 먼저 그렇게 이상하고 못되게 혹은 귀찮게 구니까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니라 그 아이가 먼저 나를 괴롭혔던 거라고, 난 어른이니까 나중에 사과도 했지만 그 아이는 그러지도 않았다고, 그렇게 심하게 잘못한 적도 없는데 엇나간 것은 내가 아니라 괴물로 태어난 케빈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소한 괴물같은 아이를 낳아 살인자로 키울 마음을 가진 엄마는 세상에 없을테니까.


나는 커서 꼭 살인자가 되고 말겠다 다짐하며 태어나는 아이 역시 세상에 없다. 케빈도 마찬가지다. 엄마의 작은 짜증, 사소한 원망들을 조그마한 아이는 예민하게 하나둘 마음속에 쌓아갔을 뿐이다. 엄마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악의도 선의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케빈은 열여섯 생일을 코앞에 두고 살인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살인자 아들을 둔 엄마는 한 순간에 이웃들 모두가 저주하는 마녀가 되어 있었다. 무엇하나 그 누가 원하거나 의도했던 것은 없었다.


모두가 좋아하는 책임 추궁을 해보자면, 그래서 결국 누가 문제였던 것일까. 누가 더 큰 잘못, 원인 제공을 했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케빈? 그런 케빈을 키워낸 엄마? 법적으로 봤을때 답은 간단하다. 손에 직접 피를 묻히고, 그 결과로 교도소에 끌려간 케빈이다. 그 이전까지는 다만 사소한 잘못을 주고 받았을 뿐, 누구도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기에 범죄자라는 타이틀을 얻은 케빈이 명백한 커다란 죄를 지었다. 그래서 케빈은 청소년 교도소에 들어갔고 열여덟살 생일을 맞아 성인 교도소로 이송을 앞두고 있으며, 그리하여 케빈보다도 그의 엄마를 더 많이 비추고 있는 이 영화의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 가 된다.


드러난 큰 죄를 지은 '케빈에 대하여' 안주거리마냥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 범죄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건 그만큼 너무 쉬운 일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가 똑같이 정의로운 자세로, 세상의 수많은 케빈들, '돌을 맞을만한 놈'들에게 쉽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나는 몇년 전에도 작년에도 어제도 오늘도 보았고, 아마 내일도 내년에도 내가 죽는 그 순간 까지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현상은 허기진 강아지가 허겁지겁 먹이를 먹는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이후에 남겨진 것들까지도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범죄자에 대한 온라인 린치에는 정작 선의도 악의도 없고, 다만 방향잃은 분노만이 농축되어 가상의 공간 안에 찐득하게 쌓여갈 뿐이다. 린치가 끝나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서 있다가, 또다른 린치거리가 나타나면 피라냐처럼 똑같이 모습으로 모여들었다 흩어진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죄와 변하지 않는 돌팔매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자리, 언제나 같은 죄와 같은 돌이 날아드는 그 자리를 언제까지나 응시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너무 희미해서, 돌팔매질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빈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한다.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작은 목소리를 듣고 이야기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 거의 들리지도 않는 희미한 소리들 속에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한 사람의 눈에 띄는 잘못과 형량, 혹은 그를 잘못 키운 부모에 대한 쉬운 비난 그 이상의 유의미한 것들이 숨어 있다. 더 늦기전에 또 다른 케빈에게 온기를 건네줄 수 있는 방법, 누군가는 결국 범죄를 저지르고 누군가는 그런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 이외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실현하기가 너무나도 힘이 드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들여다보고 고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이런 쉽게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응시하려 노력하는 태도만이 세상의 많은 케빈들을 이해하고,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세상의 비극을 줄일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케빈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엄마는 케빈을 면회하러 간다. 내가 왜 그랬는지 엄마는 알고 있을 줄 알았어. 끔찍한 살인마 답지 않은 케빈의 그런 투정섞인 말을 이제서야 듣게 된 엄마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 되고, 조용히 케빈을 안아준다. 시종 불안하고 죄의식으로 뒤덮여 있던 영화는 비로소 굳어있던 표정을 푼다. 불편함으로 팽팽하던 영화가 아주 조금 따뜻해지는 순간이다. 그 극소량의 온기는, 두시간 동안의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차갑고 어두운 시간 전부를 녹여 주기에 충분하다. 싸이코패스 범죄자의 잔혹한 범죄, 그리고 그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 주제인 영화에서였다면, 전혀 필요 없었을 장면이다. 나는 뒤늦은 후회와 이해에서 피어오른 작은 불씨가, 이미 저질러 버린 씻을 수 없는 큰 죄의 잔해에서조차 서툴게 타오르는 것을 본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쉽게 괴물 혹은 악마라 이름 붙이는 사람들을 바꾸어 놓을 불씨를 이미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런 불씨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런 불씨가 간절히 필요하다. 아주 작은 불씨로도 때로는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 사람이 달라지면 세상이 변한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수많은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해야만 한다. 쉬운 성난 욕설과 비난을 넘어서, 그 이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상상력과 공감어린 태도만이 우리를, 우리의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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