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봄, 그 당시 나는 꽤나 힘들었다. 이직도 연애사업도 다 망해버려, 말 그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던 시기였다. 그런데 오래 전 약속한 해외여행일정이 하필 그때 있었다. 그 곳은 바로 프랑스였다. 당시에는 비행기표고 뭐고 그냥 다 때려치고 안 간다고 할까도 생각했었다. 도저히 가서 즐겁게 웃으며 여행다닐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물론 프랑스 파리 도착한 첫 날, 그런 생각은 대체 왜 했던걸까하고 즐거워했다).
대도시인 파리는 3일이나 머물렀지만, 나는 하루씩만 머물렀던 프랑스 남부 아비뇽과 아를에 들렀던 때를 잊을 수가 없다. 기가 막히게 좋았던 날씨, 비교적 차가웠던 파리 도시사람과는 다르게 너무나 따뜻했던 사람들이 나의 좋은 기억에 크게 한 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연 인상깊었던 것은, 아를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나의 시야를 꽉 채운 큰 강이었다. 압도하는 풍경이랄까. 미술에 조예가 없는 나 조차도 바로 알았다. 아, 이 근처구나. 고흐가 그렸던 작품 『Starry Night』의 바로 그 장소가.
유난히 좋았던 날씨, 아를은 고흐가 그렸던 그대로 모두를 압도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고흐가 직접 살았던 유명한 건물인노란 카페에도 직접 가보고, 한국에 와서도 그 이후 고흐 관련 아트전이나 영화('러빙빈센트'는 명작이다)를 이따금씩 보게되었다. 그러다 성장판 서평단을 통하여 책도 마주하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
이번 책을 보며, 그리고 지금껏 고흐를 접하며 느낀 4가지 주요 지점을 짚어본다. 1) 우선 고흐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친동생인 테오에게 거의 모든 금전적 지원을 받으며 그림을 그리고 생계를 유지 해 나갔다. 언제나 테오를 향한 미안한 마음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역설적이지만 그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더욱 예술에만 몰두할 수 밖에 없었다.
중간이 없던 사람, 빈센트 반고흐를 편지라는 매개를 통하여 '인물 탐구'를 하는 책
2) 본업에 대한 이중적 태도.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편지를 읽다 보면, 최고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그리는 법을 알아내고 싶다'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마네, 쿠르베, 졸라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부러워하고 질투했다. 동시에 본인의 야망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예술에 인생을 바치기 때문에 포기해야하는 '기회비용'에 대해 그리 쿨하지는 않다. 악화일로의 건강, 안정적인 결혼과 여인. 가난하여 물감살 돈 조차 동생에게 지원받아 살아가는 처지에, 최고의 예술가가 되려면 그런 기회비용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좌절감은 내비친다. 적어도 씁쓸 해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친동생에게 보내는 편지기 때문에 속마음까지 가식없이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쩐지 고흐는 본래 사람자체가 돌려말하거나 일종의 가식은 없었을 것 같다(순전히 개인적 추측).
그러나 내 기질상 결혼생활과 작품생활을 동시에 해 나가는건 힘들 것 같다. (중략) 진정한 삶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있는 이 예술적 삶조차도 나에게는 생생하게 느껴진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배은망덕하고 분수를 모르는 것이지.
3) 고흐는 철저한 행동주의자로 보인다. 직접 실천하여 얻은 교훈을 최고로 보고 지속적으로 도전한다. 부딪히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본인의 약점을 발견하여 고치려 노력한다. 동생에게도 이론적인 공부와 이념을 익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일러준다. 그것은 우리 자신으로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 건강을 돌보고 힘을 강하게 기르고 강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최고의 공부라 하였다.
4) 고흐는 편견이 없는 사람에 가까워보인다. 초지일관 솔직한 태도와 군더더기는 빼고 얘기하는 직설화법. 편견이 없어지면, 일단 시야 자체가 넓어진다. 테오가 보낸 편지에서는 '형은 새로운 생각의 챔피언'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인상주의가 주로 다루는 소재는 모두 쉽게 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과감하게 아주 강렬한 원색을 사용해야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색채는 아주 부드러워진다.
언뜻보면 집착과 광기어린 천채 예술가 이미지에 딱 맞는 사람이 고흐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 해 보면 보통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시기 질투하다 때로는 그들을 능가하기도 하고. 연인이 없어 슬프지만 애써 담담한 척도 해 보고.
단, 보통 사람같지만 보통이 아닌 지점을 딱 하나만 꼽자면 '끈기'일 것이다. 클리셰같지만, 진리는 언제나 쉬운 문장인걸. 인상주의만큼이나 강렬하고 오랜 여운이 가는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