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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니 Nov 14. 2015

하나, 여우 같은 남자를 만나다

스물셋 여자의 글은 Fiction인 척 하는 Nonfiction일지도



조금은 이성적인 나이 스물셋


가슴이 뛰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당신 생각이 났다.

다만 내게 아픔을 줄 당신을 

결제하고 싶진 않았다.


내게 사귀자는 말은 진열대 위의 

수없이 많은 상품들의 유혹으로 보였고

나는 그중 무엇이 나와 어울리는지를 

알아야 하는 나이였다.

자극적인 맛으로 현혹시킨 후 

나를 아프게 할 것들

순간 흥미롭지만 

금방 싫증이 나 버릴 것들

그것이 보일 만큼의 연애를 했고, 

그것을 결제 않을 정도의 현명함을 

손에 꼭 쥐었다.     


당신은 진열된 것 중 가장 매력적이었고,

나는 당신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봤으나 

매번 당신을 외면한 후 나가버렸다.

매일 당신과 연락하지만,

당신의 이름도, 나이도 

나는 훅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당신을 외우려 했던 적이 없었다.


다만 당신의 말이 

당신의 모습이 

당신의 행동이 

끊임없이 밀려들어와 

내 습관을 꽉 채웠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당신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먹어보지 않아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을 내는 사람이었고

당신은 먹어보지 않아도 내 몸을 상하게 할 식사였다.     


다만 나는 당신을 만지고 싶었고 당신의 스치는 손을 꽉 잡아버리고 싶었다.          

끼와 친절의 차이는 진심이다.

진심이 담긴 선의는 친절이나, 진심이 담기지 않은 친절은 끼다. 

  

같은 와인이

다른 이름으로 제공 되기도 한다.      

당신의 혀끝을 감싸 정신을 아득하게 할 와인.     

포도와인.     

두 와인은 같은 와인이라면

당신은 전자로 나를 취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와인을 처음 맛본 사람은 첫 와인에 대한 만족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미 많은 와인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첫 와인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당신은 나에게 그런 술이었다.     





그러나 이성적일 수 없는 나이 스물셋




울어버렸다. 참 한심하게도.

나에게 큰일인 것들이 당신에겐 사소했다.

그 생각이 나를 서럽게 했다. 

나는 당신을 만나기로 했다.

사귀자는 단어도 아니었다.

사랑을 한다는 단어도 아니었다. 

그 흔한 단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하는 단어였다.

“만나볼래”라는 말이었다.

만남이란 단어엔 권리가 있다. 연인처럼 대할 권리 같은 것이다.

책임은 없다. 연인처럼 대해야 하는 책임 말이다.

그 단어가 참 우스웠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내가 그 단어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중증이다. 무언가를 끊어내는 일이 이렇게나 힘든 것이었을까?

당신은 늘 내게 곱씹을 거리를 잔뜩 안긴 채 먼저 떠나간다.

당신이 준 껌의 포장을 벗기자

얇은 은박지가 나온다. 가소롭다. 나약하게나마 저항해 보는 모습이 꼭 나와 같다.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그 은박지를 스윽 밀어낸 후 안에 든 과일 향 껌을 씹는다. 씹는다. 씹는다. 당신이 떠난 후에도 나는 당신을 몇 번이고 더 씹어본다. 

당신의 말. 당신의 손짓 당신의 음성 당신의 노래 당신의 손끝 당신의 입술.

맛이 좋다.     

한참 당신을 씹어내고 나면 단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딱딱한 행동과 말이 입안에 머문다.

나의 쓸쓸함은 그때 찾아온다. 퉤, 과일 껌을 뱉어낸 후 입을 쓱 닦아버린다.

결국 내가 당신을 씹었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분명 달랐다. 아니. 같았을 것이다. 조금, 달랐을까?

당신은 늘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늘 나는 속은 것이었다. 그에게 속은 것이 아니다. 변한 내 호르몬이 나를 속인 것이다. 당신을 좋아하기 시작하자 자꾸만 착각이 일었다. 나를 조금이라도 좋아해 주지 않을까? 그러다가 당신도 이내 나라는 사람에게 빠져주지 않을까? 나는 우스운 상상에 온 몸을 맡겼다.     


결국 당신을 끊어내지 못했다 나는. 내 마음의 첼로 소리를 한번 따라가 보기로 했다. 오선지 위의 음표들이 하나, 하나 발 디딜 공간을 내어 주었고, 나는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검은 음표를 따라 춤을 췄다. 이 곡의 끝은 어디일까? 


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곡이 결국 단조라도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스물셋의 낙엽은 그렇게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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