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APR19
보스턴의 추억이 더해져 캐리어는 전보다 더 무거워진 듯하였다. 버스터미널로 가기 위해선 다시 차이나 타운을 지나가야 하였다. 일요일 오전이라 그런 지 문을 연 가게도 거리를 지나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여유 있게 나오려고 하였지만 언제나 그렇듯 겨우 시간을 맞춰 버스에 올랐다. 보스턴에서는 워싱턴 D.C.로 가는 직행버스가 없어 뉴욕에서 환승을 해야 한다. 버스 좌석은 지정석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먼저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통로 쪽에 앉아 창가 좌석을 확보하는 모양새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운이 좋아 내가 차에 올랐을 때도 두 자리가 빈 곳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눈치게임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올라탄 사람들은 어디에 앉아야 할지 망설이는 눈빛으로 계속해서 뒤쪽으로 들어왔다. 이미 두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옆자리를 내주기 싫은 것이 당연하게 서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외면하였다. 나 역시도 그저 소시민의 하나인지라 아무도 내 옆에 오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부유하는 영혼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몇 커플(!)만 탄생한 채 버스가 출발하였다.
내 바로 앞의 양옆 좌석들에는 친구로 보이는 백인 여성 두 명이 각각 한쪽씩 맡아 잡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통로를 중심으로 창가 쪽으로 발을 뻗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정말 편안해 보이는 자세가 나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기에 상관 할바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말하는 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친구끼리 대중교통에서 조곤조곤 대화하는 건 누구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마치 자신들의 개인 공간인 것 마냥 큰 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나 이외에 주위 사람들도 불편한 눈치였지만 그녀들은 전혀 개의치 않아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버스 안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한참 떠들다가 한쪽이 피곤하다며 잠에 빠져들고서야 조용해졌다. 나는 그 틈을 타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스카웃은 자신의 사촌 할아버지를 찾아뵈어 끔찍한(?) 입맞춤을 해드린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능청스러운 그녀의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시간이 좀 지났음을 깨닫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익숙한 스카이라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는 뉴욕에서 보스턴행 버스를 탔던 정류장과 달리 터미널(!)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건물 밑으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려 짐을 챙기고 승하차장에서 터미널 내부로 들어가자 마치 1980년대 맨해튼에 도착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벽과 원형기둥들은 짙은 갈색빛 벽돌로 마감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누런 아이보리색 타일들이 예전의 모습을 간직한 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다음 버스를 타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남아 터미널 구경하기로 하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어디선가 피아노 연주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에스컬레이터가 끝나는 맨 위층 유리난간에 붙은 피아노 한대가 보였다. 단숨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피아노가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원래 민무늬 검은색인 피아노는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마치 모자이크 작품처럼 다양한 원색의 그림, 글자 그리고 스티커로 장식되어 있었다. 피아노 앞에는 중년 남성이 짙은 회색의 중절모를 쓰고 형광색 도료를 흩뿌린듯한 검은 가죽재킷을 입고 있었다. 피아노와 그의 행색과는 다르게 그의 손가락을 움직임을 통해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연주는 감미로운 클래식 피아노 곡이었다. 지나가던 사람인지 아니면 거리의 피아니스트인지 모르겠지만 뉴욕 맨해튼의 버스터미널이라서 당연한 듯한 모습이었다.
매점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버스에 올랐다. 이번에도 지정석이 아니었지만 버스를 타기 위해 줄 서있는 사람들만 헤아려도 만석이 분명해 보였다. 버스에 올라 두 자리가 비어있는 뒤편 창가 좌석에 먼저 앉았다. 이윽고 누군가 내 옆자리에 앉아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나보다 덩치가 더 커 보이는 흑인 여성이었는데 인상이 좋아 보였다. 확실히 나보다 덩치가 큰 사람이 옆에 앉으니 여유공간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나를 배려하려는 모습을 보니 나도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창가 쪽으로 더 붙어 앉았다. 그렇게 다시 버스는 뉴욕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노을이 하늘을 점점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밝은 조명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달린 이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보이는 대형 입간판은 이곳이 숙박시설임을 알려주었다. 모텔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상당해 보였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마치 영화 촬영을 위한 세트장 같이 공허해 보였다. 낯선 곳을 향해가는 설렘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고독함이 드디어 기회를 잡은 듯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늘이 어두움으로 가득 차고서야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버스터미널은 보스턴의 그곳처럼 기차역과 함께 붙어있었다. 허름한 주차장 같은 버스터미널과는 달리 기차역 로비는 고풍스러운 양식의 하얀 석재로 마감된 아치구조로 되어 있었다. 로비 내부는 옅은 초록빛 조명을 받아 마치 심해 속에 들어온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갑자기 어디선가 대왕고래가 헤엄쳐 지나가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상상 속 해저탐험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늦은 밤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거리에는 차와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제 막 개발이 완료된 신도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곧게 뻗은 넓은 도로를 따라 서있는 가로등만이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이방인을 인도해주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었다. 보스턴에서 묵은 곳과 같은 체인의 호스텔이었다. 보스턴처럼 버스터미널에서 걸어서 갈 수 있다는 점, 주위 어떤 시설보다 저렴한 숙박비(도미토리 스타일이니 가능한) 그리고 호스텔임에도 꽤 준수한 시설관리가 이 체인의 특징인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달려온 여독을 푸는 데는 시원한 생맥주만 한 게 있을까? 다행히 숙소 근처에 로컬 브루어리가 있었다. 워싱턴 D.C. 를 대표하기라도 하듯 이름도 'Capitol City Brewing Company'였다. 거리의 한산한 모습과는 다르게 식당 안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였다. 속으로 '그럼 그렇지'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모두들 실내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음료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종업원이 다가왔는데 인상이 좋아 보이는 히스패닉계 젊은 남자였다. 그에게 맥주 추천을 부탁하자 이곳 대표 맥주인 'Amber Waves'를 권해주었다. 아메리칸 엠버 에일의 일종으로 캐러멜 맥아를 사용하여 달콤한 맛이 난다는 메뉴판에 설명이 눈에 들어왔다. 종업원이 가져다준 그 맥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호박처럼 짙은 황색을 띠고 있었다. 공복 상태에서 마시는 맥주는 언제나 목을 타고 넘어가 온몸으로 퍼진다. 맥주와 함께 주문한 시그니처 햄버거에는 영양 가득하게 달걀프라이가 올라가 있었다. 소고기 패티, 베이컨 그리고 달걀프라이의 삼위일체 조합은 햄버거를 베어 물 때마다 자연스레 맥주를 마시게끔 만들었다. 문득 버스 안에서 갑자기 센티해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그랬던 것이 분명하였다. 두 번째 맥주를 시키기 위해 메뉴판을 다시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