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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Dec 08. 2020

금이빨 삽니다

2

영준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방안에 햇살이 가득 차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피로가 싹 다 풀리도록 숙면을 하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자 영준은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창 밖으로 맞은편 옆 동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고 있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다소 왜소해 보이는 체격이었지만 이불 양끝을 잡고 힘 있게 털고 있는 모습에서 살림 내공이 엿보였다. 어쨌든 어제 밤일은 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엔 모든 일들이 정말로 현실 같았다. 어쩌면 지금이 꿈일지도 모른다. 가끔 영준은 아주 긴 꿈을 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잘 만들어져 있을 뿐. 그때 어디선가 짧지만 단호한 진동이 느껴졌다. 베개 옆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11시 반까지 삼성역으로 와요.’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었다. 아무리 빨리 가도 시간을 못 맞출 것이 분명하였다. 영준은 오늘 점심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부리나케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얼굴에 물을 끼얹자 어젯밤의 여운이 싹 달아났다. 바닥에 널브러진 청바지와 맨투맨 티셔츠를 잡히는 데로 집어 입고서 밖으로 튀어나갔다. 영준은 지하철역에 도착하여 막 문이 닫히는 열차로 겨우 미끄러져 들어갔다. 영준이 안도감과 함께 가뿐 숨을 몰아쉬는데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호흡하려 했지만 한번 나간 숨이 쉽게 돌아올 리 없었다. 어느 정도 진정되자 날카로운 통증이 영준의 어금니를 뚫고 지나갔다. 영준은 어젯밤 꿈에서도 지금과 비슷한 통증을 느꼈다. 어쩌면 약이 잘못 조제되거나 효과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처방전을 돌려받아 다른 곳에서 약을 지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약사의 눈빛을 떠올리자 단념하게 되었다. 영준은 다시 그곳을 가느니 일단 따로 진통제나 소염제를 사 먹기로 마음먹었다. 교대역을 지날 때쯤 다시 메시지가 왔다.


‘어디쯤 오고 있어요?’


영준은 급하게 나오느라 답장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 미안하게도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바로 회신이 왔다.


‘그럼 먼저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여기로 와요.’


어느새 열차가 목적지인 삼성역에 도착했다. 열차와 플랫폼 사이의 빈 틈을 조심하라는 안내방송과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영준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라 거리에는 근처 사물실에서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이 가득하였다. 영준이 뛰어가며 지나치는 사람들이 신기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산에서 길을 잃고 도심에 나타난 야생 고라니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영준은 다행히 길을 잃지 않고 단번에 식당을 찾았다. 안에는 빈자리가 하나도 없이 손님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중간에 낯익지만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은 후배가 국자를 들고 건더기에 연신 국물을 부어대고 있었다.


“잘 지냈어? 오랜만인데 늦어서 미안해.”


“괜찮아요. 뛰어 온 거예요?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형이 늦는다고 해서 대충 시간 맞춰서 나왔어요. 도착할 때쯤 바로 먹을 수 있게 먼저 끓여 놨는데 괜찮죠? 이제 거의 다 익은 거 같은데 먼저 드세요.”


“어... 고마워.”


오랜만에 만난 후배에게서 과장이라는 직급의 여유가 느껴졌다. 예전에 학교 다니던 시절엔 나중에 ‘사회생활 잘할 수 있을까?’하는 노파심을 들게 만드는 친구였는데 지금은 날 때부터 천상 사회인 같은 아우라를 풍겼다.


“근데 왜 갑자기 이쪽으로 넘어오려고 하는 거예요?”


영준이 이번에 취직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에 하던 일과는 분야 자체가 너무 달랐다.


“3개월 전에 퇴사를 하고 뉴욕에 갔어. 관광지 위주로 놀러 다니다 당시에 개발이 완료된 허드슨 야드를 방문했는데 정말 엄청나더라고. 십여 년 넘게 방치되어 있던 철도 차고지가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로 세련되고 멋진 건물과 시설들이 들어서서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으로 바뀐 그 모습에 완전히 빠져 버렸지. 그래 이거다 싶더라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때마침 나 같은 건설사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쪽 업계 회사에서 뽑는다는 이야기나 공고를 들어서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형, 전에 회사 다닐 때 부동산 관련 업무 해봤어요?”


“아니... 너도 알겠지만 학교에서 시공 연구실에서 석사 졸업했고 전에 다니던 회사는 연구소로 입사해서 2년 반 근무하다 현장 발령 나서 반년 정도 근무한 게 다지.”


“혹시 투자자산운용사는 있어요?”


“아... 이쪽으로 취업 준비하면서 필요하다고 들어서 준비 중이야.”


“음... 그럼 전에 재무나 회계 쪽 공부는 해본 적은요?”


“전혀...”


“그렇군요...”


무심하게 흰쌀밥을 입안으로 밀어 넣는 후배의 얼굴을 보자 어제 의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거 결국 빼야 할 거 같은데요?’


영준은 이래저래 고마움과 미안함이 들어 자신이 밥을 사겠다고 했지만 후배는 재빠르게 카운터로 향해 계산을 마쳤다. 영준이 감사한 마음을 전하자 후배는 법인카드로 결제했으니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며 다음에 취직하면 그때 더 비싸고 좋은 식당에서 대접해 달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의 미소에는 여유로움이 묻어있었다. 입가심을 할 겸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전면에 접이식 유리창이 달린 세련된 2층 건물이었는데 1층 야외테이블과 2층 테라스에는 사람들이 가득하였다.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비즈니스와 관련된 만남을 갖고 있는 중이었다. 영준과 후배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2잔을 시키고 1층에 건물 내부에 자리를 잡았다.


“형 아직도 담배 태워요?”


영준은 몇 해 전 담배를 끊었다가 최근에 다시 ‘피다가 끊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남들이 물어보면 간헐적 흡연이라고 표현했지만 항상 담배를 가지고 다니니 결국 피는 거다 다름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급하게 나오느라 담배를 챙기지 못했다. 후배는 영준의 눈빛만 보고도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고는 자신의 담배 한 개비를 영준에게 건네고 불을 붙여주었다. 첫 모금을 들이마시자 치료받은 어금니가 시렸다. 영준은 조금 마음이 걸리긴 했지만 한 개비 정도는 피는 건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합리화하였다. 주위에 흡연구역이 보이지 않아 영준과 후배는 카페 건물과 옆 건물 사이에 있는 사람 한 명이 경우 지나갈만한 비좁은 골목에서 번갈아가며 담배연기를 하늘로 내뿜었다.


“형, 내가 왜 졸업하고 바로 이쪽에서 일을 시작한 줄 알아요? 보통 우리 과는 졸업하면 다들 건설사 가잖아. 2학년 여름방학 때 인턴 해보니까 딱 알겠더라고 난 건설사 현장 체질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바로 군대 가서 고민 많이 했어요. 입시원서 쓸 때 별생각 없이 건축과를 적고 오긴 했는데 대학생활 즐기다 막상 진로를 고민하게 될 시기가 오니까 건설사는 못 가겠으니 답답하더라고. 그렇다고 전공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고 그러다 부동산 관련 투자나 개발하는 업계에서도 건축 전공자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원래 그런 성격 아닌데 일면식도 없는 선배들 무작정 연락해서 찾아가고 그랬어요. 다급하니까 나 자신도 모르는 모습이 나오더라고. 그리고 이쪽 취직하려고 전혀 관심 없던 재무회계, 관련 법 공부도 엄청 열심히 했어요. 친구들 중 어떤 놈은 고시 공부하냐고 놀릴 정도로... 다행히 운이 좋아서 졸업과 동시 바로 이쪽 업계로 진입하게 됐고요. 처음에 진짜 복사랑 스캔만 엄청했어요. 4년제 대학 나왔는데 실무적인 면에서는 상고 졸업해서 들어온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들보다 아는 게 없었으니까... 그래서 진짜 코피 터지게 야근 엄청했어요. 그렇게 매일 욕 얻어먹으면서 2년 정도 지나니까 좀 알겠더라고. 돌이켜 보면 그때 그렇게 절박한 상황이 내가 이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같아요. 조금 늦긴 했지만 형은 건설사 경력도 있고 똑똑하니까 어디든 들어가기만 해서 빡세게 하면 1,2년 내로 금방 적응할 거예요. 근데 요새 주식, 채권 등 전통 금융 쪽이 시원치 않아서 취준생뿐만 아니라 현직 사원 대리급 애들도 부동산 쪽으로 많이 넘어오고 있어요. 걔들이랑 경쟁해야 할 텐데 어쩌면 내가 했던 것보다 더 고생할 수도 있어요.”


현실적인 조언을 구하려고 만난 것이었는데 막상 직접 듣고 나니 영준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다시 취업준비를 시작할 땐 건설사 경력이 있으니 어디든 그냥 서류만 들이밀면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영준과 같이 순진한 사람들이 살기에는 철저하게 인색한 곳이다. 영준은 저번 주 이쪽 업계에서 손꼽히는 회사에 급하게 경력직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인을 통해 이력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영준은 이쪽 경력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담당자가 이력서를 열어 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단박에 문전박대를 당하고 나서야 영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 마음속 여유로움은 싹 사라지고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혼자 생각에 잠긴 영준에게 후배가 손에 들고 있는 뭔가를 들어 보였다. 빨간불 빛을 계속해서 깜빡이는 진동벨이 격렬하게 떨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둘은 담뱃불을 꺼트리고 안으로 들어가 커피를 받아 아까 맡아놓은 자리에 앉았다. 영준은 한눈에도 진해 보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지만 전혀 쓴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 우선 이쪽 업계에서 오래 일하시다가 지금은 헤드헌팅 하시는 선배님이 있는데 한번 찾아가 볼래요? 아무래도 지금은 뭔가 차곡차곡 준비해서 자리를 노리는 것보다 현실적으로 빨리 어딘가 들어가서 일을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그런 면에서 나보단 그분이 형에게 더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거 같거든요. 그리고 이 바닥은 영업이 기본이라 언제든 자신을 알리고 다녀야 해요. 나라는 상품을 홍보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요. 그쪽에서 알아서 찾아주겠지라고 생각하면 그걸로 이미 게임은 끝난 거예요. 형이 전에 어떻게 사회생활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쪽에서 살아남으려면 부단히 뛰어다녀야 해요. 수면 위의 오리가 편안하게 떠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라앉지 않기 위해 물속에서 쉴 새 없이 다리를 차고 있는 것처럼.”


영준은 마치 자신보다 사회생활을 십여 년 더 많이 한 선배에게 조언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지금 영준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그가 더 이상 노파심을 부릴 그럴만한 애송이가 아니었다.


“그분 연락처 줄 테니까 꼭 찾아가 봐요.”


후배는 영준에게 메시지로 연락처를 전달해주고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업무전화 같았는데 영준이 들어본 적 없는 단어들을 섞어가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통화가 끝나자 후배는 얼른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며 사무실에 들어가 봐야 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카페를 나서며 영준은 남은 커피를 테이크 아웃했지만 후배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두고 나왔다. 그가 근무하는 사무실은 바로 카페 근처에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매일매일 콜로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단호한 검투사의 뒷모습이었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휴대전화 메시지가 도착하였다.


‘택배는 받았니?’


그러고 보니 아까 점심식사 중에 택배회사에서 문자메시지가 왔었다. 오후쯤에 택배가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영준은 어머니께 오늘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도착해 있을 것이니 걱정 말라고 답장을 보냈다. 영준의 어머니는 택배를 보내실 적마다 제대로 받았는지 음식이나 과일들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제대로 정리를 하였는지 하나하나 확인하였다. 마치 영준이 아직도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아이인 것처럼 말이다. 사실 그의 어머니는 치매어르신을 돌보는 일을 한다. 영준이 대학원에 입학한 첫해 가을 학기가 끝나갈 무렵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치매를 앓으셨는데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는 5년 넘게 간병을 하였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의 역할이 뒤바뀐 시간을 보낸 뒤 어머니는 직접 외할머니를 보내드렸다. 장례를 치르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영준은 아버지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평생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는 어머니가 취직을 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지금까지 집안일만 하신 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무슨 일인지 듣고 나니 어느 정도 수긍이 되었다. 영준의 어머니는 치매어르신을 돌보는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단번에 합격하였다고 전해 들었다. 영준의 어머니는 초반 몇 개월 동안엔 고생을 좀 한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일이 자신에게 천직이 라걸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다. 종종 우스갯소리로 젊은 시절부터 일을 시작했으면 지금쯤 대도시 근교에 대형 요양병원을 한 곳 정도 운영하고 있을 거라고 말하곤 하였다. 영준은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신 어머니가 부러웠다. 어쩌면 그 일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하철 열차 안에는 평일 낮시간 치고 꽤 붐볐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할까? 그렇지 않다면 왜 계속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는데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집 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자메시지의 도착 예정시간은 지나있었다. 아마 배달 물량이 많아서 조금 늦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배달이 완료되면 다시 문자가 올 것이다. 영준은 약을 챙겨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왔다. 영준은 퇴사를 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어머니에게는 휴가차 가게 되었다고 둘러댔다. 주요 유명 관광지도 찾아다녔지만 관광객들이 전혀 가지 않을 만한 온전히 자신의 취향에 맞는 곳들도 찾아다녔다. 그중에 한 곳이 맨해튼 차이나타운에 있는 커피 로스터리였다. 그곳은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에 모두에게 열린 공개 세미나를 열었다. 영준이 찾아간 날은 코스타리카의 한 고산지대 농장에서 재배된 원두에 대한 소개하는 세션과 그 원두의 풍미를 배가 시킬만한 여러 방식으로 로스팅한 원두 샘플들을 함께 테이스팅 하는 시음회가 열렸다. 발표자로 나온 로스터리의 현지 농장 담당자는 원두가 재배되는 지역의 지형적 특성과 그로 인한 원두의 특징을 소개해주었다. 신기했던 건 전혀 재밌을 것 같지 않은 얼마든지 지루해질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그 담당자는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현지 농장에 녹아들어 가 직접 원두를 재배하는 경험이 그에게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뿐만 아니라 유머와 위트까지 갖출 수 있게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영준은 전부터 커피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로스팅까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세미나를 듣고 나자 마치 커피 로스팅이 지금까지 자신이 찾아온 운명이라 믿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영준은 원두를 직접 로스팅하는 카페의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다시 취직을 하기 전까지 생활비를 벌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실제로 로스팅하는 일을 배워 두었다가 나중에 직접 로스터리를 운영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하지만 이쪽도 자리를 구하기가 여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카페에서 일하기엔 조금 나이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경력도 없어서 번번이 거절당하기 일 수였다. 그러다 면접을 탈락한 카페 중 한 곳 사장님이 영준의 집 근처에 로스팅만 해서 공급하는 로스터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신기하게도 영준이 매일 지나가던 거리에 있었다. 일반 주택가라 그런 곳이 있을 줄은 전혀 짐작하지도 못했다. 지도를 따라가니 영준은 2층 벽돌집 앞에 도착하였다. 생각해보니 그래도 이 거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집이었다. 영준은 살짝 열린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붉은 벽돌로 마감된 2층 양옥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데 신기하게도 마당 한가운데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가 있었다.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 어린 주인공이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채 모험을 시작하게 되는 첫 관문 같았다. 영준은 조금씩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대낮인데도 계단은 지상과 다르게 정말 어두웠다. 계단참의 희미한 백열전구가 없었더라면 마치 심해 해구의 암흑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맨 아래에는 굳게 닫힌 철문이 있었다. 이제 영준은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 그는 가슴을 펴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문고리를 돌렸다. 문이 열리며 펑! 하고 연기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당장 카페로 영업해도 문제없을 정도로 모든 게 다 갖춰져 있는 곳이었다. 입구 왼편으로 커피 스테이션과 바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뒤 벽면에 걸린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늦은 밤 카페테리아에 손님 몇 명이 앉아있고 건너편에서 주문을 받는 듯한 셰프의 모습이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져 있었다. 단순한 원색들을 사용한 평면적인 묘사의 그림이었지만 보이는 것 이상의 깊이가 느껴졌다. 작가는 자신의 깊고 오래된 도회적 고독함을 감상하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퍼져나가도록 의도한 게 분명하였다. 영준이 그림에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영준이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보니 가죽 앞치마를 두르고 목장갑 낀 채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린 여자가 이곳을 어떻게 찾았는지 신기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눈에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아... 오늘 면접을 보러 왔는데... 사장님 안 계시나요?”


“제가 사장인데요. 혹시 이영준 씨?”


영준은 자신을 사장이라고 소개하는 여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문자메시지로만 연락해서 이렇게 젊은 여자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사장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영준에게 물었다.


“아... 아닙니다.”


“생각보다 나이가 있어 보이시네요?”


“마냥 어린 나이는 아니죠...”


“몇 년생이신데요?”


“88년생입니다.”


“오! 정말요? 나도 호돌이인데?"


영준은 사장과 처음 본 사이였지만 동갑이라 그런지 대화를(면접을) 할수록 잊고 있던 어린 시절 친구를 정말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래 사장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는데 자신의 재능이 전업작가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을 깨달은 뒤부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면서 재밌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카페에서 일하다가 커피와 로스팅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고 지금은 작지만 이렇게 자기 회사까지 차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거래처들을 확보해서 자신의 인건비는 벌고 있는 수준인데 그전까지는 정말 이 일을 계속해서 대출이자를 갚을 수 있을지 매일 밤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혼자서 주문량을 감당하기 어려워 함께 일할 사람을 구하고 있다고 하였다.


“근데 이런 종류의 일을 해온 분 같지는 않네요?”


“그렇게 보이나요?”


“외모가 그렇다기보다 손이 너무 고와요.”


“그런 얘기를 좀 듣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이 굼뜬 건 아닙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다나까’로 말해요? 그러니까 내가 훨씬 나이 든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죄송해요...”


“농담인데 너무 진지한 거 아니에요? 영준 씨가 좋은 분 같기는 한데 그래도 지금 당장은 로스팅 경력이 있는 분이 필요해서... 죄송해요. 그래도 이곳까지 오셨으니 구경도 좀 하시고 우리 로스터리 시그니처 원두로 내린 아메리카노도 한잔 마시고 가요.”


사장은 영준을 로스팅 룸으로 데려갔다. 방금 로스팅한 원두를 보여주며 품종, 원산지, 향과 맛에 알맞은 로스팅 방식 그리고 현재 사용 중인 로스터기의 장단점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알려주었다. 영준도 전부터 로스팅에 관심이 있어서 대략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장의 전문적인 지식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로스팅 룸 투어를 마치고 사장은 영준을 커피 스테이션으로 데려갔다. 며칠 전 새로 블렌딩 한 시그니처 원두를 처음으로 내려보는 거라고 말하는 사장의 얼굴에는 기대와 두려움이 섞여있었다. 사장은 그라인더로 원두를 반 정도 갈아 냄새를 맡아보고 영준에 건넸다.


“어때요?”


영준은 사장의 반짝거리는 눈빛이 어린아이처럼 귀엽다고 생각했다.


“음... 깊이 있는 커피 향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그다음으로 은은하게 시큼한 과일향이 느껴지네요.”


사장의 얼굴은 영준에게 기대 이상의 평가를 들은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열 중인 에스프레소 머신이 고급 외제 스포츠카가 공회전을 하는 것과 비슷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사장은 뜨거운 물을 받아둔 머그잔에 투샷을 붓고 영준에게 건네주었다. 금빛 크레마가 조금씩 사라지며 그 아래로 짙은 커피의 표면이 드러났다. 사장은 영준이 머그잔을 들어 올릴 때부터 한 모금 마시는 모든 동작을 처음으로 걸음마를 떼는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와 같이 바라보았다. 영준이 다시 한 모금을 마시자 사장은 약간 초조해하는 눈빛이었다. 한동안 눈을 감고 있던 영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장님. 저 여기서 무급으로 한 달만 일하면 안 될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영준의 제안에 사장은 조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에 빠진듯한 얼굴을 하다가 영준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럼... 딱 한 달만 오케이?”


그렇게 영준이 이곳에서 일하게 된지도 2개월이 지났다. 첫 달이 지나자 사장이 먼저 영준에게 계속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최저시급이지만 월급도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영준은 사장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놀라웠다. 딱히 잘하는 것이 없었지만 재밌어서 즐겁게 일했는데 사장이 좋게 봐준 것 같았다. 전에 회사 다닐 때 받던 월급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과분한 액수로 느껴졌다. 영준은 재밌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정말 가능하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기했다. 특히 자유로운 근무환경도 마음에 들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장이 바에 앉아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영준은 사장에게 눈인사를 하고 오늘의 로스팅 스케줄 표를 확인하였다. 통화를 마친 사장이 영준에게 다가왔다.


“그 어금니 아픈 건 어때요?”


“아무래도 좀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거 같아요...”


“음... 나도 이 때문에 고생 많이 했는데 조금만 신경 안 쓰면 항상 문제가 터지더라고.”

“몇 년에 한 번은 꼭 이렇게 돌이킬 수 없을 때가 있더라고요.”

“마치 영준 씨의 이탈리안 로스팅처럼?”


영준은 처음으로 혼자서 로스팅을 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사장이 몸이 좋지 않아서(숙취로 인하여) 나오지 않았다. 한 번도 로스팅을 해본 적이 없지만 3일 뒤에 납품해야 할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는 꼭 로스팅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날 볶은 원두는 단 1g도 납품하지 못했다. 사장이 하는 모습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아서 매뉴얼대로 하면 혼자서도 잘 해낼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물은 전혀 달랐다. 이탈리안 로스팅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다 태워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장에게 핀잔 먹을 것이 걱정스러웠지만 다음날 상황을 보고 받은 사장은 막상 별 반응 없이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아마 내가 태워먹은 원두가 적어도 1톤 트럭은 될걸?"


사장은 영준의 실수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해놓고 이후로 종종 그 일을 가지고 놀렸다. 그때마다 못 들은 척 딴짓을 하는 영준의 모습을 즐기는 것 같았다. 사장은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다며 신이 난 얼굴로 영준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고 사라졌다. 아까 전화통화를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같았다. 청소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지만(간혹 즐기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영준은 이곳에서 혼자서 마무리 청소하는 시간을 즐겼다.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빵빵하게 틀어놓고 리듬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길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영준은 마치 자신이 아비정전의 장국영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새하얀 면 러닝셔츠와 팬티를 입고 싶지는 않았다. 장국영이라서 어울리는 조합이지 영준이 따라 한다면 아비와 장국영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다고 영준은 생각했다. 사무실에는 스피커가 각 구석에 하나씩 4개, 천정에 1개의 스피커와 우퍼가 설치되어 있었다. 영준은 5.1 채널의 스피커 시스템은 갖춘 로스터리는 아마 한국에서 이곳이 유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스피커들은 진공관 앰프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영준이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로스팅 관련 기구로 착각하였다. 영준은 음향시스템에 대해서 문외한이었지만 한눈에도 보통의 장비들에 비해 적어도 세네 배 이상은 더 비쌀 것 같았다. 꽤 좋은 장비라서 그런지 영준이 수없이 많이 들었던 노래들이 이 진공관 앰프를 거치면 전에 듣던 것과 느낌이 달랐다.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그 노래들의 진면목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끔 사무실에서 사장이 영준에게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보라고 권하였는데 그때마다 영준이 흘러간 팝송 명곡을 재생시키면 사장은 자기 아버지와 노래 취향이 비슷하다며 애늙은이라고 놀렸다. 오늘 해야 할 과테말라 안티구아 로스팅을 마치고 로스터기 청소와 정리를 마치고 나자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일할 때는 몰랐는데 쉬고 있으니 치료받은 부위가 욱신거리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뭔가에 집중하고 있으면 부차적인 감각들은 잠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영준은 사무실 한편에 있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축 늘어져 있는데 영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고 보니 이미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있었다. 영준은 바 안쪽으로 들어가 테이블 냉장고를 열었다. 가끔 사장이 집에서 남은 음식들을 가져와 냉장고에 넣어두곤 했는데 영준에게 배고프면 언제든지 먹어도 된다고 말하였다. 보통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한입 거리 음식들이었는데 그중에서 참치와 야채가 들어간 두부 말이를 영준은 가장 맛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는 다르게 영준이 즐겨먹는 프랜차이즈 샌드위치가 냉장고에 있었다. 포장지를 벗겨보니 그의 시그니처 레시피로 만들어진 샌드위치였다. 이곳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장과 함께 밖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날 영준은 정말 샌드위치가 먹고 싶었고 사장은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영준은 정말 샌드위치를 좋아하는데 심지어 어떤 날은 삼시 세 끼를 똑같은 샌드위치로 해결한 적도 있었다. 사장은 이국적인 외모와는 다르게 토속 한국음식들을 즐겼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순두부찌개였다. 아마 외국 유학생활로 인해 외국음식에 정말 질린 것 같았다. 영준은 늘 먹는 대로 호밀 빵에 칠면조 슬라이스와 체다치즈를 올리고 할라피뇨와 피클을 빼고 나머지 야채를 다 넣은 뒤 홀스래디쉬 소스를 뿌려 달라고 주문하였다. 사장도 영준을 따라서 똑같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갓 만들어진 샌드위치를 받아 한입 베어 물은 사장의 얼굴은 어떻게 이런 걸 먹을 수 있지 하는 표정으로 영준을 바라보았다. 결국 사장은 샌드위치를 반도 먹지 못하고 남겼고 영준은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사장에게 샌드위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한데 바로 그 샌드위치를 사장이 직접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간 것이다. 영준은 가끔 사장이 겉보기와 다르게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먹을 것을 잘 주어 그렇다기보다 세세하게 설명하기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이 종종 들었다. 영준은 두 손을 모아 목례를 하고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하였다. 평소 같았으면 단숨에 먹어치웠겠지만 어금니가 불편했기에 마치 막 이유식을 뗀 아이처럼 꼭꼭 씹어먹었다. 배가 든든해지자 갑자기 미친 듯이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무리 정리도 다했고 아직 어머니가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도 오지 않았다. 잠시 소파에서 눈을 붙여도 좋을 것 같았다. 다시 소파에 몸을 누이자 영준은 마치 최면에 빠진 것처럼 잠들었다. 그런데 기분 나쁜 금속 마찰음이 영준을 깨웠다. 정말 잠시 눈을 감았다 뗀 것 같은데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오래되어 녹슨 1층 대문이 열리는 소리 같았다. 잠시 후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이 돌아온 것일까? 또각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울렸다. 사장은 평소에도 그렇고 오늘도 구두를 신지 않았다. 도대체 이 시간에 간판도 없고 영업도 하지 않는 이 지하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일까? 점점 가까워지던 구두 소리가 갑자기 뚝 멈췄다. 영준은 출입문을 쳐다보았다. 정적이 흘렀지만 영준은 철문을 너머에 있는 누군가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영준은 속이 메스꺼워졌다. 뭔가 우당탕탕 벌어지기 직전의 고요함이 감돌았다.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고 영준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데 한 여자가 아주 조심스럽게 내부를 살피며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하얀 블라우스와 짙은 남색 투피스 정장을 입고 양손으로 고급 핸드백을 들고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보통 직장인 같지는 않아 보였다. 여자는 조금 긴장한 눈빛으로 문가에 서서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입구에서는 영준이 누워있는 소파가 잘 보이지 않아서 여자는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어떻게 오셨나요?”


영준의 물음에 그녀는 흠칫 놀라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준을 확인하자 여자의 얼굴에서 긴장이 조금 가신 듯하였다. 영준은 자신이 괴생명체나 살인마가 아닌 것에 여자가 안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영업 끝났나요?”


“아... 카페처럼 보이시겠지만 여긴 로스팅하는 사무실이에요.”


“로스팅?”


“커피 원두를 볶는 곳이에요.”


영준은 뒤편에 보이는 로스터기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여자는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여길 어떻게 알고 오신 건가요?”


여자는 순간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리는 듯한 얼굴을 하였다.


“저 노래를 듣고 들어왔어요.”


영준은 순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영준이 청소를 마치고 반복 재생으로 설정한 모튼 하켓이 부른 <Can’t take my eyes off you>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노랫소리가 너무 컸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영준이 몸을 일으켜 볼륨을 줄이려고 하자 여자가 말했다.


“아... 그게 제가 아니고... 지나가다 저도 모르게 갑자기 들어와서 실례를 했네요. 그럼 이만.”


여자는 영준에게 고개 숙여 사과를 하고 뒤로 돌아 계단을 오르려고 하였다.


“잠시만요!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가세요. 시간이 좀 늦긴 했지만요.”


영준의 말을 들은 여자의 뒷모습에서 망설이는 듯한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러다 스피커에서 모튼 하켓의 애절한 사랑고백이 흘러나오자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왔다. 영준은 입구에 우두커니 서있는 여자를 커피 스테이션이 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여자는 조금 긴장한 듯 몸이 움츠러든 채 바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마침 최근에 로스팅한 에티오피아 코체레가 있는데 시음 부탁드려도 될까요”


여자가 수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영준은 바 테이블 아래에서 종이테이프 위에 날짜와 원두 이름이 마킹된 투명한 유리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영준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유리통 안의 윤기가 흐르는 원두는 펜던트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영준은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첫날 로스팅을 마친 후보다 탄 냄새가 많이 가시고 깊으면서도 깔끔한 커피 향이 올라왔다. 영준은 로스팅을 마치고 며칠 뒤 원두의 냄새를 맡는 순간을 즐겼다. 막 로스팅을 마치고 원두의 냄새를 맡으면 과연 이걸 어떻게 마실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데 딱 며칠만 지나면 정말 훌륭한 향기를 풍기는 원두로 바뀌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였다. 그럴 때마다 영준은 마치 석탄으로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연금술사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준은 스테인리스 컵을 저울 위에 올려두고 영점을 조정한 뒤 유리통 안의 원두를 스푼으로 떠서 22g을 맞추었다. 그리고 영준은 스테인리스 컵 안의 원두를 나무로 된 원통 핸드밀에 쏟아붓고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갈린 것 같자 영준은 하던 동작을 잠시 멈추고는 뚜껑을 열어 여자에게 내밀었다.


“맡아봐요.”


여자는 조심스럽게 영준이 내민 핸드밀에 코를 가져갔다. 신선한 원두향이 여자의 코끝에 닿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이런 커피 향은 처음 맡아보는 듯한 표정 지었다. 그냥 커피 향이라고 표현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온갖 다채로운 향기가 그녀의 코안의 후각세포들을 자극하였다. 여자는 이 원두야 말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값비싼 고급 브랜드 옷이나 명품가방보다 더 진실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영준은 여자의 눈빛에서 자신감을 얻고 남은 원두를 마저 갈았다. 곧이어 핸드드립용 전기포트가 증기기관차의 연통처럼 수증기를 쉴 새 없이 뿜어냈다. 물이 다 끓은 것을 확인한 영준은 도자기로 된 드립퍼에 백색의 표백 종이필터를 접어놓고 섬세한 동작으로 전기포트를 돌려가며 필터에 물을 적셨다. 영준은 여자에게 이렇게 먼저 린싱을 하면 커피맛을 해칠 수 있는 종이의 성분을 제거해줄 뿐만 아니라 드립퍼가 예열되어 실제 추출할 때 원두의 깊은 풍미를 함유한 성분들이 더 많이 우러나오게 되어 커피맛이 더욱 풍부해진다고 설명해 주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준의 설명을 머릿속에 담는 듯 보였다. 다음으로 영준은 곱게 갈린 원두를 필터 위에 부어 넣고 조심스럽게 가운데부터 물을 붓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과 분쇄된 원두가 만나자 마치 초등학교 과학실험 수업시간에 플라스크에서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것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여자는 커피를 추출하는데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영준의 모습에서 누군가가 떠올랐다. 수년간 애써 잊으려고 했던 그 사람이 지금 바로 영준의 몸을 빌려 여자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영준이 추출을 마친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잔이 테이블에 닿는 소리에 여자는 혼자만의 상상에서 빠져나왔다. 영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자에게 눈빛으로 마시기를 권했다. 여자는 머그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영준은 원두에 대한 평가가 궁금해 여자의 얼굴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준이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여자를 강하게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참기 어려운 듯 여자는 영준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밖으로 뛰쳐나갔다. 계단을 뛰어오르는 구두 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여자는 분명 초면인 영준에게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영준은 여자가 남긴 커피를 개수대에 버리려다가 호기심에 한 모금 마셔보았다. 본래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쓴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배출 후에 쿨러를 조금 늦게 작동시킨 게  원두가 잔열에 더 볶아져 쓴 맛이 강해진 것 같았다. 어쩌면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커피가 맛이 없어서 도망간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이번 원두는 될 수 있으면 사장에게 숨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시 커피 스테이션을 정리하고 나니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다 택배가 떠올랐다. 영준은 혹시나 하고 복도 곳곳과 같은 층의 이웃집들 문 앞까지 둘러보았지만 박스 비슷하게 생긴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도 오지 않은 걸 보니 배달과정에서 예상에서 빗나간 이벤트가 생긴 것 같았다.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영준은 택배도착 예정 메시지의 배달기사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어디선가 한번 들어본 적 있는 듯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는 것은 아냐~’


택배기사의 통화 연결음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곡이었다. 노래의 후렴구가 계속 반복되었지만 상대방은 전혀 받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고객들의 문의전화에 질려서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는 안 받는 주의이거나 내일 배달을 위해 취침 중일 수도 있다. 다행히 어머니한테 택배 관련해서 확인 연락이 오지 않았기에 내일 연가이 오면 이미 받아서 다 정리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면 될 것 같았다. 영준은 원두 로스팅 냄새가 전 옷가지들을 벗어던지고 샤워를 했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니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영준은 방금 사무실에 나타났던 여자를 떠올렸다. 평소엔 빈틈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철두철미한 사람임일 것 같았다. 하지만 방금 영준과 함께 있을 땐 마치 유령에 홀린 듯 행동했다. 그 노래와 관련된 뭔가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녀의 아련한 눈빛을 떠오른 순간, 어금니가 찌릿하였다. 영준의 눈에 책상 위 하얀 봉투가 들어왔다. 영준은 곧바로 책상으로 다가가 약봉지를 꺼내 입안에 털어 넣고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자격증 공부, 이력서 작성, 면접 스터디 등 할 것들이 많았다. 매일매일 불안감과 초조함이 조금씩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쩌면 어금니가 그렇게 돌이킬 수 없게 된 것도 영준의 지금 상황과 전혀 무관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른해서 그런 것인지 약기운이 빨리 퍼지는 것 같았다. 눈이 조금씩 감기기 시작했다. 영준은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세상도 사람들 얘기처럼 그리 복잡하지 않아~’


휴대전화의 격렬한 진동에 영준은 눈을 떴다. 노래를 가사를 따라 부르다 순식간에 잠들었던 것 같다. 오늘은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역시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생각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오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그녀의 목소리였다.


“어? 네가 왜?”


“뭐라고? 내가 왜?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받고! 이번에 전화 안 받으면 진짜 집으로 찾아갈라 그랬다고!!!”


그녀의 다그치는 말투에 영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정을 올려다보니 덤덤이가 보였다. 어제처럼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덤덤이는 영준이 그녀에게 혼나고 있는 상황이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얄미운 곰팡이 얼룩 같으니라고.


“아... 미안해. 내가 오늘은 정신이 없었어...”


영준은 마치 자신이 정말 잘못한 것처럼 사과했다. 돌이켜 보니 예전에도 자주 그랬던 것 같다. 그녀는 항상 연락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 가끔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하는 걸 잊어버리면 쉽게 토라지곤 했다.


“오늘 점심 먹고 낮잠을 자는데 오빠가 어떤 여자랑 바람피우는 꿈을 꿨어!”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진짜 생생했다고! 오빠가 나랑 같이 있다가 갑자기 전화를 받고 잠깐 누굴 만난다고 밖으로 나갔어. 기분이 이상해서 몰래 따라나가 보니까 고급 외제차를 탄 여자가 나타나서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와 오빠랑 얘기를 하는 거야.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쁜데 딱 봐도 엘리트 같았어. 오빠가 나랑 있을 때랑은 전혀 다르게 정말 즐거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여자가 오빠 귀에 대고 무어라 말하고는 오빠를 껴안았어.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오빠 이름을 크게 부르니까 둘이서 나를 돌아보더라고. 오빠는 마치 비밀을 들킨 것처럼 굉장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그 여자가 오빠 손을 잡아채서 차에 태우려 하는 거야. 오빠가 그 손을 뿌리치려고 하는데 여자가 억지로 차 안으로 밀어 넣고는 사라져 버렸어.”


“음... 개꿈인 거 같은데... 그래도 내가 너한테 가려고 노력한 것 같은데?”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오빠는 얼마든지 힘으로 그 여자를 물리치고 나한테 올 수 있었다구! 어쨌든 결국엔 나 버리고 따라갔어! 오빠 바람피운 거지? 맞지? 얼른 나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해!”


영준은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빨리 순응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안 미안, 그럼 내가 오늘 치킨 사줄 테니까 일루와요.”


“그러고 싶지만 나 못가... 엄마가 오늘 밤에 나가면 눈썹 밀어버린데...”


“음... 그것도 재밌겠다.”


“뭐라구???”


“그것도 예쁘겠다고~~”


“됐어! 다 들었다고! 나 삐졌어...”


영준은 마지막으로 그녀가 절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꺼냈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


“정말???”


“가야지~ 가야지~ 눈썹 밀리면 안 되니까.”


“또 놀리기야?”


“아냐~ 진짜로 정말 보고 싶어 죽겠다구.”


“나두~ 나두~ 언제 올꾸야?”


“지금 바로 갈게! 버스에서 내리면 연락할 테니까 그때 천천히 나와요.”


“싫은데! 싫은데! 싫은데!”


“그럼 나와서 달밤에 체조하고 있어요~”


“힝! 이따가 혼내줄 거야!!!”


“이따 봐요~”


휴대전화 너머로 씩씩거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영준은 전화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나서 자신의 입꼬리가 광대 근육이 당길 정도로 심하게 올라간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녀의 꿈속에서 영준과 바람을 폈다는 여자에 대한 묘사가 오늘 사무실에 찾아온 여자와 정말 흡사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영준은 꿈속에 있었다. 가끔 꿈속에서 그날 만났던 사람들과 벌어졌던 일들이 뒤죽박죽 섞일 때가 있는데 그런 현상인 것 같았다. 그런데 왠지 그 여자가 외제차를 갖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알 길은 없지만 그럴 것 같았다. 휴대전화를 보니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영준은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빨리 방을 나섰다. 그녀를 바래다주던 정류장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매번 배웅해 줄 때마다 그녀는 버스가 오기 전까지 헤어지기 싫다며 영준을 부둥켜안고 칭얼거렸다. 영준은 분명 자신의 기억인데도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듯한 단골 장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괜히 작가나 피디들이 그런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막차 안은 일을 마치고 피곤에 절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고개를 까딱이며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멍한 눈빛으로 휴대전화의 반짝거리는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모두들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반복되는 고단한 일상은 제일 먼저 얼굴과 눈 근육을 굳어버리게 만든다. 반년 전 까지만 해도 영준도 저들 속에 함께 있었다. 하지만 영준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한테 들었던 것처럼 긍정적으로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일하려고 노력하였다. 허나 패기 넘치는 그의 다짐은 조직에서 원하는 자세와 결이 달랐다. 영준이 생각하기에는 별것도 아닌 일에 번번이 불려 가 주의를 받은 뒤로부터는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주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먼저 나서는 것보다는 될 수 있으면 튀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를 맞출만한 행동이나 태도를 골라서 취하게 되었다. 속마음과 다르게 행동해야 하니 정신과 육체를 연결하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오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영준은 회사에서 일하는데 전과 다르게 부자연스러운 표정이나 행동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한 번은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난 적이 있어 병원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렇게 고생하던 중 마음을 달래려 읽은 자기 계발서 나온 한 문장이 영준의 가슴에 꽂혔다.


순진한 감정을 드러내는 건 프로답지 못한 행동이다.


영준은 아무래도 자신은 프로가 되기 글렀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속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남을 속여야 하는 프로가 될 수 있을까? 버스 스피커에서 영준이 내려야 할 정류장이 다음이란 걸 알려주었다. 자정이 넘어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하였다. 전에 그녀와 함께 간 적이 있는 치킨가게를 향해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영준을 껴안았다.

“오빠 냄새~”


“깜짝 놀랐잖아!”


“그래서 싫어?”


“아니...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껴안는데 안 놀랠 수가 있어야지.”


“내가 누군가야?”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오늘은 오빠가 여기까지 와 줬으니까 내가 딱 한번 봐줄게!”


그녀는 면죄부를 내리는 것처럼 성호를 한번 긋고 영준의 양쪽 어깨와 머리에 차례대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애착 인형을 다시 찾은 것처럼 영준의 오른팔을 뽑을 듯이 매달렸다. 치킨가게 구석 테이블에는 중년 남자 둘이 이미 얼굴이 상당히 붉어진 채 소주에 치킨을 뜯고 있었다. 영준과 그녀가 가게로 들어오자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안주거리가 늘어나 재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영준은 그들과 가장 멀리 떨어진 테이블로 그녀를 이끌었다. 메뉴판에는 현존하는 모든 종류의 치킨이란 치킨은 다 적혀있었다. 영준이 유심히 메뉴들을 하나하나 훑어보고 있는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영준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 나 방금 언니랑 떡볶이 먹었어... 그러니까 오빠 먹고 싶은 거 시켜.”


“엥? 떡볶이를 먹었다고?”


“아니~~ 언니가 퇴근하는 길에 떡볶이를 사 왔는데 거기 사장 아주머니가 오늘 장사 떨이라고 남은 걸 다 싸주신 거야. 언니가 혼자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라며 같이 먹자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전에 혼자서 그것보다 더 먹는 것도 봤는데...”


“너두 먹고 싶었던 거 아냐?"


“아닌데! 아닌데! 아닌데!”


그녀가 뜨끔하는 눈빛으로 볼 살이 흔들리게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이 귀여웠다. 언제나 떡볶이 앞에서 쉽게 무너지고 마는 그녀가 정말 사랑스러웠다. 먼저 주문한 생맥주가 적당한 비율의 거품 뚜껑을 쓰고 나왔다. 영준이 시원하게 한 모금을 들이켜는 순간 그녀가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오빠 맥주 마셔도 괜찮은 거야?”


“어? 아... 괜찮을 거야!”


영준은 뜨끔하긴 했지만 꿈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실제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꿈 속이긴 했지만 맥주 맛은 정말 좋았다. 현실보다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 이상한데 분명 치과에서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몰래 마시는 냄새가 난단 말이야!”


“조금은 괜찮다고 했어.”


“그런 게 어딨어? 마시면 마시는 거구 못 마시면 못 마시는 거 아냐?”


“괜찮다고 했다니까~”


“음... 술에 관련된 오빠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렵지만... 불쌍하니까 봐줄게. 근데 딱 요거 한잔만 마셔야 돼. 알았지?”


떡볶이를 먹고 왔다는 그녀는 치킨에 거의 손대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영준보다 더 열심히 먹었다. 그녀는 항상 뭐든지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첫 데이트에 그녀는 삼겹살이 먹고 싶다고 하였다. 영준은 온오프라인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검증된 삼겹살 맛집을 찾아냈다. 불판에서 기름을 튀기며 자글자글 익어가는 삼겹살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고기가 거의 다 익어갈 때쯤 그녀가 밥 한 공기를 시켰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하얀 쌀밥에 기름장을 찍은 삼겹살을 올려 먹는 그녀의 모습에 영준은 완전히 빠져버렸다.


“근데 오빠 신경 치료해야 한댔나?”


“어... 엄청 아프다던데...”


꿈속의 시점은 신경치료를 받기 전인 것 같았다. 영준은 다시금 그때 치료받던 느낌이 전해지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이렇게 생생한 꿈에서 다시 신경치료를 받는 건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네다섯 살에 아마 유치원을 막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인데 그때 내가 정말 이 닦기를 싫어했어. 엄마가 칫솔 들고 쫓아다니면서 혼내도 보고 달래도 보고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봐도 이 닦기를 거부하고 결국 자지러져 버렸거든. 그러던 어느 주말에 아빠랑 언니랑 놀이터에서 술래잡기를 했는데 아빠가 술래를 맡았어. 그날 내가 숨넘어갈 듯하면서도 아빠를 잘 피해 도망 다녔어. 내가 보기보다 어렸을 때부터 발이 좀 빨랐거든. 결국 그날 아빠는 언니만 잡고 나를 한 번도 잡지 못했어. 술래잡기가 끝나자 아빠는 상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곰젤리를 주셨어. 엄마가 이 썩는다고 평소에 사주지 않으시는 거였는데 가끔 아빠가 엄마 몰래 언니랑 나한테 주곤 하셨어. 상을 받고 신이 난 내가 바로 봉지를 뜯어 젤리를 입에 넣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아빠가 내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기 시작했어. 언니 말로는 아빠의 귓속말이 길어지니까 자기는 지루해서 그네를 타러 갔대.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니까 갑자기 내가 눈이 동그레진 채로 놀이터에서 어디론가 뛰어갔대. 언니는 무슨 일 인가해서 나를 쫓아가니 집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라고. 언니는 내가 상으로 받은 곰젤리를 혼자 먹으려고 어딘가에 숨긴다고 생각하고 뒤따라 집으로 들어갔는데 내가 화장실로 들어갔대. 밖에서 놀던 딸들이 갑자기 우당탕탕 집으로 들어오니까 주방에 있던 엄마가 무슨 일이 벌어졌나 알아보려고 나왔다가 화장실에서 뭔가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엄청 놀라서 입이 딱 벌어지셨대.”


“왜?”


“내가 처음으로 혼자서 이를 닦고 있었거든.”


“정말? 혼자서 이를 닦을 줄 알았는데 그때까지 생떼를 부린 거였어?”


“지금 나 혼내는 거야?”


“아니~ 농담이지~~ 근데 갑자기 왜 혼자서 이를 닦았어?”


“엄마도 그게 제일 궁금했대. 때마침 아빠가 집으로 들어오자 엄마는 놀이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대.”


“그래서?”


“아빠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에게 했던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려주셨어.


아빠가 잠잘 때마다 해준 이야기들 중에 세균 악당 이야기 기억나? 늦은 밤이 되면 낮동안에는 숨어있어 배고픈 세균 악당들이 스멀스멀 나타나서 어디 먹을 거 없나 하고 돌아다니기 시작한다는 그 이야기 있잖아. 아빠가 그 이야기를 좀 더 해줄게. 세균들은 보통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고사는데 우리 집 같이 엄마랑 아빠가 깨끗이 청소하는 집에서는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기 쉬어. 그래도 걔네들이 쉽게 굶어 죽지 않는 이유가 먹을게 남아 있는 곳이 딱 한 군데 있기 때문이지. 바로 이를 닦지 않는 아이들의 입속이야. 이쪽저쪽 옮겨 다니다 항상 입안에 먹을 게 남아있는 아이가 누군지 알게 되면 걔네들은 그 아이의 입속에 집을 짓기 시작해. 어떻게 집을 만드는 줄 알아? 바로 이에 까만 구멍을 뚫는 거야. 그 뒤로 먹고살만한 세균 악당들은 아이들을 낳기 시작해. 바로 우리 사람처럼 말이야. 식구들이 많아지면 어떻게 해야 될까? 집을 더 키워야겠지? 그럼 집을 더 크게 만드는 거야. 나중에 손자 손녀 세균들까지 태어나서 대가족이 되면 집이 비좁아지겠지? 그렇게 되면 다른 이로 옮겨가서 새로 집을 만들기 시작해. 계속해서 세균 가족들이 많아지며면 결국 어떻게 될까? 그 아이의 여러 이에 온통 까만 구멍들이 생기고 결국 뽑아야 될 거야. 만약 제이가 계속 이를 안 닦으면 어떻게 될까? 그럼 이가 다 빠져서 더 이상 아빠가 주는 곰돌이 젤리를 못 먹게 되지 않을까?


엄마 말로는 아빠가 내가 그렇게 눈을 크게 뜨는걸 처음 봤다며 따라 하셨다고 하더라구. 아빠는 어떤 일이든지 하나하나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시고 결정은 언니랑 내가 알아서 하게끔 기다리셨어. 엄마 입장에서는 가끔 그런 아빠의 모습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돌이켜 보면 아빠는 자신이 딸들과 계속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나중에 혼자서 판단할 수 있는 자세를 가르치려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대.”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카페에서 사장과 종업원으로 만났다. 처음에 두 분은 나이차가 있어서 서로 전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것이라 짐작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남녀관계라는 것이 한번 눈이 맞으면 걷잡을 수 없는 화학적인 연쇄반응과 같은 것이니 이미 시작된 사랑은 본인들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기제는 지금 영준 앞에 떡볶이와 삼겹살을 너무도 좋아하는 아름다운 그녀를 남겼다. 그런데 가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를 보면 영준은 도통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리 연인 사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공감할 수도 위로해줄 수도 없는 각자의 사연이 있다. 그럴 땐 얼른 화제를 전환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고 영준은 생각했다.


“와~ 여기는 생맥주 맛집이네!”


“그래? 다른 데서 파는 거랑 똑같은 맥주 아닌가?”


“그렇긴 한데 이 집 맥주 맛은 뭔가 확실히 다른 것 같아. 맥주를 따르는 기계를 좋은 거 쓰나 봐.”


“아! 그거 우리랑 거래하는 도매업자가 얼마 전에 폐업한 식당에서 가져왔다고 싸게 준다고 해서 산거예요.”


서빙을 하던 치킨집 사장 아저씨가 친절하게도 맥주 맛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이 상황에서 참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민망하긴 했지만 그녀가 웃는 걸 보니 영준의 마음이 편해졌다. 아마 그녀 아버지의 기억 속에도 딱 지금 같은 미소가 남아있지 않을까? 혹시 돌아가신 분들의 기억이란 게 어딘가에 남아있다면.. 어느덧 치킨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시계를 본건 아니었지만 연신 입을 벌리며 하품소리를 크게 내는 친절한 사장 아저씨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치킨에 소주를 드시던 아저씨들의 테이블은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계산을 하고 나온 새벽의 거리는 한산했다. 멀리서 경적소리와 함께 어디론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희미해져 갔다... 그녀의 집으로 가려면 큰 길가에서 언덕을 올라가야 했다. 따로 인도가 구분되어 있지 않은 길이라 통행량이 많은 낮에는 걸어 다닐 때 위험할 것 같았다. 그녀와 팔짱을 낀 채로 걸어가는데 불이 꺼진 마을버스가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 차고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버스기사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까?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 중에 하나였는데 한 번도 답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은 그 누구에게 물어본 적도 없었다. 영준의 머릿속엔 이런 궁금증들이 차고 넘쳤다. 누군가 영준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를 보고 마치 전원이 꺼진 로봇 같다고 말해주었다.


“오빠~ 무슨 생각해?”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얼마 전 꿈에 아빠가 나왔어. 가끔 꿈에서 날 보러 오시는데 그날따라 뭔가 좀 이상했어.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시는데 충분히 가까워졌는데도 얼굴에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거야. 너무 놀라서 아빠한테 얼굴이 왜 그렇냐고 물었어. 그러자 입이 있어야 할 부분이 움직이면서


‘그건 우리 딸이 아빠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점점 아빠 얼굴을 잊어가고 있어서 그런 거야.’


라고 말하시는 거야. 순간 왈칵하고 울음이 터져버렸어. 내가 울먹이며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소리쳤지만 아빠의 얼굴은 여전히 흐릿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 그리고 잠에서 깼는데 정말로 울었는지 베개가 젖어 있었어. 곧바로 머릿속에 아빠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하는데 꿈속에서처럼 흐릿하게만 생각이 났어. 너무 무서워서 창고방 책장으로 달려가서 어린 시절 앨범을 꺼내 한참 아빠 사진들을 들여다봤어.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기억하던 얼굴과 조금 다른 느낌이 들더라구. 분명 아빠가 맞는데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사람 같았어. 그냥 이상한 꿈을 꿔서 그런 거겠지?”


그녀가 말을 끝내며 영준을 쳐다보았다. 웃고 있는 얼굴 너머로 불안하게 떨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나쁜 꿈을 꾸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그랬어. 그래서 오늘 떡볶이도 먹고 치킨도 먹었잖아! 근데 그 아버님보다 더 좋아하는 남자가 누구야?”


“몰라서 물어?”


“응!"


“진짜 이러기야?”


“장난이야~ 장난!”


영준은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될 순 없지만 대신 따뜻한 포옹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그녀는 영준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 손을 흔들며 집으로 들어갔다. 이미 버스가 끊긴 지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영준은 언덕길을 내려가다 때마침 내려오는 택시를 잡아탔다. 맥주에 달아오른 취기를 식히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꿈속에에서도 취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밤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평소보다 커 보이는 달이 떠있었다. 취해서 그리 보이는 것인가? 얼핏 오늘 슈퍼문이 뜬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달이 지구와 가장 가까울 때 뜨는 보름달. 영준은 지구와 조금 더 가까워진 달이 그녀를 편히 잠들 수 있게 만들어 주길 기도했다. 서늘한 바람이 영준의 얼굴을 계속해서 쓰다듬었고 그의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가장 크다는 보름달이 점점 야위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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