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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가까웠다. 평일 늦은 밤이라 공항은 한산했다. 탑승구가 열리기 몇 분 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급한 계약 건을 마무리 하느라 야근중이었다. "데려다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도착하면 바로 연락해!" 전화기 너머 그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시카고까지 12시간. 신혼여행 이후로 오랜만의 장거리 비행이었다. 그것도 내심 고대하던 혼자만의 여행.
몇 개월 전이었다. 한창 잠들어 있는 새벽에 전화가 걸려왔다. 민지였다. “너 아니면 안 돼.” 그녀는 십 여 년 전부터 해왔던 그 말을 또 다시 반복했다. 민지는 해비타트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만났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종교이야기가 나왔다. 민지는 내가 천주교 모태신앙인 것을 듣자 갑자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어느새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중에 물어 보니 당시 민지는 카톨릭 신자기 되기 위해 교리 수업을 받는 중이었다. 성당에서 결혼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민지가 기대한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다. 어렸을 적 엄마는 내가 성당에 다녀와야 한 주일치 용돈을 주셨다. 성가대에 들어가면 용돈을 올려준다기에 한 달 만에 성가라는 성가는 모조리 외우기도 했다. 나에게 성당은 엄숙해야하는 성스로운 장소라기보다 생애 처음으로 마주한 생계의 현장이었다.
그날 환영회가 끝났을 때 민지는 만취한 상태였다. 사실 그녀뿐만 아니라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알콜분해 능력이 뛰어난 집안 내력 덕분에 가장 멀쩡한 내가 민지를 들쳐 업고 택시를 잡았다. 아파트 동 출입문 앞 계단에 앉아 그녀의 부모님이 내려오시길 기다렸다. 안에서 누군가 나오는 모습에 반가운 마음이 드려는 찰나! 뭔가 뜨거운 것이 내 어깨위 로 흘러내렸다. 민지가 내 옷 위로 아까 먹은 안주들을 게워냈다. 조금 정신이 좀 들었는지 잠에서 깨 나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꼬부라진 혓바닥으로 대뜸 삿대짓을 하며 말했다.
“너 마리아! 나주에 내가 아가 나으면 대모 해주야 해? 아뢌지?”
이번 여행의 비행기 티켓은 지금까지 모은 마일리지로 퍼스트클래스를 예약했다. 남편을 만난 이후로 함께 다니는 여행들의 모든 비용의 그가 결재하였다. 그래서 그동안 마일리지만 쌓았지 써본 적이 없었다. 불현듯 이번이 아니면 언제 마일리지를 써볼 수 있을 지 모르다는 생각이 스쳤고 퍼스트클래스라면 남편도 납득할 것 같았다. 좌석벨트 표시등이 꺼지자 샴페인을 주문했다. 평소에 즐기지는 않지만 톡 쏘는 탄산과 알딸딸해지는 달콤함이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는데 그만한 건 없었다.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에서 얼마 전 발매된 유명 피아니스트의 클래식 앨범 속 가장 유명한 연주곡이 흘러 나왔다. 금방이라도 단잠에 빠져들어 갈 수 있는 순간, 누군가 아주 조심스럽게 나의 어깨를 흔들었다.
“고객님. 쉬고 계시는데 정말 죄송하지만 잠시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 승무원이었다. 입가에 팔자 주름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곤란한 것 같은 그녀의 난처한 표정이 주름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표정과 달리 승무원은 바로 본론을 꺼내었다. 이코노미 승객중 한명이 갑작스런 발작을 일으켰다고 했다. 다행히 기내에 의사가 타고 있어 바로 응급조치를 실시했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헌데 시카고까지 그 승객이 안정을 취하며 가기 위해서 누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승무원은 거기까지 말한 뒤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그녀가 내 자리에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번에 자리를 양보해 주면 다음번 비행기 탑승 때 퍼스트클래스로 업그레이드를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무래도 마일리지로 퍼스트클래스를 타고 있는 승객은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내가 조금 뜸을 들이자 승무원은 내가 이코노미로 옮겨도 일등석과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해줄 것이며 이번 비행도 마일리지 적립을 받을 수 있게 조치하겠다고 덧붙였다. 손가방을 들고 자리를 옮기는데 남자 승무원의 부축을 받아 이동하는 중년여자와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를 지나치는 그녀의 한쪽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이코노미 좌석은 비좁았다. 일등석에 않은 시간이 얼마되지 않았지만 몸은 이미 그 넓디넓은 소파같은 좌석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되었던 건 통로좌석인 것과 옆자리에 남자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튜어디스를 불러 일등석에서 마시던 샴페인을 시켰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기내서비스를 알차게 이용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곧바로 치즈플레이트도 주문하였다. 샴페인을 한모금 들이켰다. 분명 같은 술이었지만 맛이 확 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잔을 내려놓고 주위를 살폈다. 그제서야 옆 좌석에 앉은 승객에 눈이가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는 남자였는데 풋풋해 보이는 이십 대 대학생 같았다. 얼핏 요새 인기 있는 드라마 속에서 ‘밥을 잘 사준다는 누나’를 따라다니는 남자주인공과 닮아보이기도 했다. 그는 품안에 무언가 안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꽤 큰 그림도감 같아 보였다. 표지는 얼굴과 달리 핏줄 선 두꺼운 전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어디서 본 적있는 유명한 그림이었다. 나는 다시 샴페인을 들이켰다. 알콜이 그림을 기억해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