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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Mar 10. 2022

호수효과

2

 취기일까? 아니면 시차 때문일까? 정신이 몽롱했다.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자신의 짐을 찾아 갔지만 내 것은 도통 저 비스듬히 눕혀놓은 굴뚝처럼 생긴 수화물 출구에서 빠져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 벨트 위로 나의 은빛 캐리어가 반짝거렸다. 군데군데 새로 생긴 스크래치가 보였다. 나만큼 쉽지 않은 비행을 한 게 분명하였다. 입국장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민지가 어린아이처럼 배시시 웃고 있었다. 아직 부기가 덜 빠져 통통한 얼굴이었다. 그 옆에는 그녀의 남편인 다니엘이 보였다.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키가 한뼘은 더 큰 것 같았다. 이제 민지의 정수리는 다니엘의 명치보다는 배꼽에 더 가까워 보였다. 민지가 그를 처음 소개한날 ‘토르’를 연기한 할리우드 배우가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민지와 같이 웃고 있는 그는 맥주라면 사죽을 못쓰는 인상좋은 백인 아저씨에 가까웠다. 그런데그의 품에 낯선 포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민지가 달려와 나를 덮쳤다. 곰 인 형에 파묻힌 것처럼 푹신한 기분이 들었다. 대학시절 언제나 나보다 말랐던 그녀였지만 예전의 슬림한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버터도 튀겨먹는다는 나라에서 그녀의 타고난 체질도 어쩔 도리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 때 다니엘의 포대기 안에서 무언가 솟아올랐다. 젤리를 한데 뭉쳐놓은 것 같은 작고 뭉툭한 덩어리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다니엘의 포드 SUV가 공항을 빠져나와 90번 고속도로를 올라탔다. 십 여분이 지나자 표지판 너머로 허공에 불빛들이 떠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민지가 보내준 사진들에 등장한 고층 건물들 같았다. 어두운 밤하늘에 건물의 실루엣이 반짝거리는 모습이 '시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의 마지막 한장면 같았다. 나와 함께 뒷좌석(물론 카시트자리)에 앉은 늦은밤 외출에 지쳤는데 주리는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바뀌는 입체그림처럼 주리의 얼굴에서 다니엘과 민지가 번갈아 나타났다. 이제 갓 백일이 지났을텐데 이목구비는 나보다 더 뚜렸한 것 같았다. 차가 조금씩 속력을 줄였다. 시내로 접어든 것 같았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민지가 다니엘에게 귓속말을 했다. 키득거리는 것이 둘이서 작당모의하는 것 같았다. 곧이어 민지는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리를 한번 보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잠시 보여줄 곳이 있어.”


 차가 멈춰선 곳은 도심 한가운데 있는 성당 앞이었다. 주위의 고층빌딩들 때문인지 성당은 한없이 작아 보였다. 도로에 접한 비대칭 파사드와 오른편에 우뚝 솟은 첨탑이 인상적이었다. 민지가 문을 열자 예상치 못 한 칼바람이 차 안으로 들이닥쳤다. 주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고 옆에 있는 담요를 집어 덮어주었다. 민지를 따라 밖왔다. 전화로 두꺼운 옷을 챙겨오라던 그녀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곳의 추위는 상상이상이었다. 효과가 없을 걸 알았지만 나는 괜스레 짚업후드 지퍼를 목 끝까지 밀어 올렸다. 성당 안은 조용했다. 홀로 기도중인 몇 사람이 띄엄띄엄 앉아있었다. 난방시설은 가동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꽤 오랜시간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성당 내부를 둘러보는 내 옆으로 민지가 바짝 다가왔다. 그녀의 따뜻한 입김이 반가웠다.


“원래 여긴 시카고 대화재 때 소실 되었어. 후에 고딕양식으로 재건축한 게 바로 지금 이 모습이야.”


다니엘과 민지는 바로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로 일년이 지났고 며칠 뒤 같은 곳에서 주리가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다니엘 뿐만아니라 그의 형제와 사촌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다니엘의 집안은 이곳에서 일생일대의 중요한 의식을 치뤄야 그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이 있는게 틀림없었다. 성당 내부는 밖에서 보이는 투박한 모습과 달리 기둥과 제단 곳곳에 화려한 장식과 조각들이 가득하였다. 특히 측랑 바깥쪽 기둥과 기둥 사이로 보이는 스테인드글라스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성당 내부를 훑고나자 민지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던 특급호텔이 떠올랐다. 여러 양식이 뒤섞인 그곳은 역사가 담긴 이곳에 비하면 그저 반짝이는 페인트로 덮힌 합성목 판자쪼가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남편의 일정에 맞춰 겨우 잡은 시술일정 때문에 이곳에서 그녀의 결혼식을 볼 수 없었던 게 너무도 아쉬웠다.


“세례식은 이번주 일요일 주님세례축일이야. 내가 그날을 받으려고 그동안 얼마나 헌신적으로 성당일을 도왔는지 아니? 미국사람도 결국 한국사람이랑 다를거 없더라. 어찌됐든 정말 아름다운 세례식이 되겠지?”


 차로 돌아왔을 때 주리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상기된 뺨 위로 솜털이 뽀송뽀송한 저 핏덩이는 며칠 뒤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첫번째 행사가 열린다는 걸 짐작이나 하고있을까?


“역시 제 버릇 남 못준다더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 집에서 편히 쉬다 가면 어디 덧나니?”


“그래! 덧난다!!! 사실 농담이고... 너도 잘 알지만 나 다른 사람 집에서 잘 못자잖아. 그리고 나 요새 늙어서 그런지 이도 엄청갈아. 우리 남편 말로는 집 떠나갈정도로 심하다던데? 혹시나 다니엘이 자다 권총강도가 든 걸로 착각하고 경찰에 신고할지도 몰라.”


다니엘이 뒤를 돌아보더니 나에게 윙크를 보냈다. 아직 한국말이 서툴러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겠지만 자신의 이름을 듣고 반은 한 것 같았다. 아마 내가 그의 픽업서비스에 감사함을 표하는데 별거 아니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민지가 나를 설득하는 걸 포기할 때쯤 다니엘의 차가 호텔 앞에 멈춰섰다.


“자 여기야. 기지배 좋은 데로 예약했네.”


“내가 한게 아니고… 남편이 해준거지.”


“돈 잘버는 남편 만나서 좋겠다. 어쨌든 자기전에 꼭 연락줘야해? 맞다! 나는 내일 낮에 어머님이랑 세례식 때 주리한테 입힐 드레스 보러 가야하고 저녁에는 다니엘 사촌들이랑 저녁식사 하기로 해서 모레나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내일은 혼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지?”


나를 어린아이 다루듯 이야기하는 그녀를 어이없다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난 너가 그런 얼굴을 할 때 제일 무섭더라. 여튼 요새 시카고에서 완전 핫한 브런치 카페가 있거든? 평일에도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새로운 메뉴가 나왔다네. 내가 차로 데리러 올테니까 모레 아점 먹으로 거기로 가는 거야?”


 포드 SUV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려는데 민지가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라 손짓을 해댔다. 체크인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갔다. 호텔은 미시간호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룸 서비스가 왔다. 와인과 치즈플레이트였다. 남편이 보냈다는 카드도 끼어 있었다. 체크인 할 때 리셉션 직원은 말로는 내가 묵는 방이 시카고의 야경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전망이라고 했다. 고층건물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으로 환히 빛나는 시내 쪽과 반대로 암흑이 펼쳐져 있었다. 이 도시에 붙어있는 호수방향 인 것 같았다. 어둠을 담은 유리창에 내 모습이 비쳤다. 신경쓰이던 주름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입꼬리가 올라갔다. 와인을 따라 유리창에 비친 어려진 나와 잔을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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