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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Mar 12. 2022

호수효과

3

 미시간 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어제의 술기운이 싹 달아날만큼 날카롭게 살속을 파고 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는 아무리 봐도 바다 같았다. 역시 미국이란 나라는 동아시아의 작은 반도나라와 스펙트럼과 규모가 너무 달랐다. 산책길을 걸어가는 내 옆으로 중간중간 조깅하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반팔 반바지 차림인 것이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멀리 호수쪽으로 튀어나온 부지 위에 대관람차가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도를 보니 네이비 피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포털 검색에 따르면 예전에 미해군 훈련소로 쓰이던 곳이 지금은 일반인들을 위한 놀이공원과 식당과 편의시설로 채워져 운영중이라고 했다. 만약 우리나라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모조리 다 철거한뒤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섰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 주위로 ‘호세권'이라는 신조어가 들어간 분양 플래카드가 곳곳에 붙어 있었을 모습이 눈에 선하였다.


 산책길이 끝나자 공원이 나타났다. 계단을 올라가니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둥그런 은빛 조형물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은 볼록거울처럼 주변의 모습을 반사시켰는데 우주선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언제 이륙할지 모를 우주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입김은 예열을 시작한 우주선의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같았다.

 공원을 벗어나자 갑작스럽게 돌풍이 몰아쳤다. 더 이상 밖에서 돌아 다니긴 무리였다. 근처에 보이는 큰 건물로 무작정 들어갔다. 발개진 얼굴에 온기가 돌자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일반적인 빌딩이 아니었다. 높은 천장과 모던하지만 격식있는 내부 인테리어 심상치 않았다. 한편에 놓인 매표소 창구와 한쪽 벽을 뒤덮고 있는 각종 현수막들로 짐작해 보건데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았다. 입장료는 생각보다 가격이 좀 있었다. 한국이라면 절대 내 돈주고 들어갈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송곳같은 바람이 맨살을 에는 듯한 밖으로 다시 나가는 건 아무래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곳 로비에서 바람이 잠잠해지기만 기다릴 수도 없었다. 나는 꽤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선 매표소 창구로 다가갔다.

 로비에서 보는 것 보다 내부는 훨씬 더 넓었다.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은 회화, 조각, 설치미술 등 종류가 다양하였을뿐만 아니라 가짓수, 시대와 문화권의 스펙트럼이 상상이상으로 엄청났다. 그래서 일까? 꽤많은 작품들이 어딘가에서 본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어느 정도 볼 만큼 돌아본 것 같았다. 중정으로 난 창밖으로 햇살이 눈부셨다. 바람이 그친 듯한 느낌이었다. 나가기 위해 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 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엄청나게 큰 유화작품이었다. 나는 홀린 듯 그 앞으로 다가갔다. 자줏빛 상의에 파란 천을 치마처럼 두른 여자가 가운데에 보였다. 그녀는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두 팔을 벌리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초승달을 밟고 있었는데 그 주위로 천사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초현실적인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놀라워하는 한무리의 남자들이 그려져 있었다.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 그림이었다. 그 때 내 발등 위로 묵직한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어... 아임 쏘리...”


젊은 동양인 남자였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손에 들린 책이 눈에 들어왔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남자였다.


“한국 사람맞죠?”


“어? 한국말 할 줄 아세요?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시카고행 비행기 바로 옆자리에 앉았었는데...”


“아! 그러셨구나... 제가 너무 피곤한 너머지 뻗어버려서 전혀 몰랐어요.”


 그와 이야기를 나눠 보니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작을 일으킨 그 중년여자를 응급처치 했다는 의사가 바로 그였다. 더욱 놀라운 건 남자는 의사가 아닐뿐더러 응급실 근처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진실은 이랬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남자 옆에 앉은 중년여자가 100달러를 쥐어주면서 부탁을 했다. 자신이 발작연기를 시작하면 남자가 의사인척 간단한 응급조치와 함께 해야할 대사를 알려주었다.


“그 아주머니가 연기를 워낙 잘하셔서 사실 제가 별로 할 게 없었어요. 마지막에 누워서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어요. 책임자로 보이는 여자 승무원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타나서 남자 승무원에게 아주머니를 어디론가 데려가라고 지시하더라고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남자가 피식거렸다. 남자가 밥을 먹으러 나가자고 했다. 처음보는 남자와 밥을 먹는게 얼마만인지. 미술관을 나와 길 건너 모퉁이에 바로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 휴학 중인 미대생이었다. 그는 시카고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반 년 간 입시미술학원에서 계약직 강사로 일했다고 했다.


“사실 아무리 돈벌일이 없어도 입시 지도는 정말 하지 말아야지 했었어요. 근데 군대 가기 전처럼 몸 상하는 노가다 알바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리고 단기간에 여행 자금 마련하는데 또 그것만한 게 없더라고요.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제가 강의를 시작하고 수강생이 많이 늘었어요. 계약기간이 끝날 때 원장님이 월급을 두 배를 불렀어요. 정식 강사로 일하자고 했어요. 솔깃했죠. 하지만 바로 거절했어요. 지금 아니면 이곳에 올 기회가 평생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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