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제748회 정기연주회> 도쿄 산토리홀
그렇다. 일본은 여태까지 총 세 번 가봤는데 공연 볼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다.
맛있는 거 먹고 풍경 좋은 데 가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 그럴 생각은 1도 안 했을 수밖에
2023년을 맞이하며 문화콘텐츠 브런치글 50개 발행을 목표로 세웠다. 자연스레 휴가 계획 안에 공연 관람하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보다 일본 음악 시장이 월등히 크다는 걸 익히 들었지만 클래식계도 매한가지였다. 국제적 위상의 출연단체 공연을 볼지,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공연을 볼지 고민하다가 음향이 좋기로 소문난 산토리홀에서 열리는 재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을 선택했다. 알고 보니 현재 KBS 교향악단 9대 상임지휘자로 있는 피에트리 잉키넨이 수석지휘자로 있는 단체였다. 소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공연도 공연장도 기대 이상의 만족이었다. 산토리홀에 대한 감상은 별도 글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JPO 정기연주회에 대한 감상을 나누어 본다.
객석 시야
내가 앉은 좌석은 RA2 좌석이었다. 무대 하수 출입구가 시야 정면이라 지휘자와 협연자의 등퇴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포디움 위에 선 지휘자의 표정도 잘 보이더라. 무대 위 단원들의 표정과 악보도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 악장이었던가 쉴 틈 없이 총보를 넘기던 지휘자와 낱장 악보에 여유 넘치던 트럼펫 연주자의 대조가 꽤 흥미로웠다.
지휘자 첫인상
코바야시 켄이치로(Ken'ichiro Kobayashi) 지휘자가 걸어 나오는데 부스스한 머리와 마른 체형이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허수아비가 연상되었다. 허리도 구부정한 노인이 난간이 없는 포디움 위에 서니 괜스레 불안해 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연주가 시작되고 지휘자가 팔을 휘두르면서 굽어졌던 허리가 점점 올곧아지더라
피아노 협연자
이국적인 외모가 눈길을 끌었던 미유지 가네코(Miyuji Kaneko)는 1부 공연 협연자로 무대 위에 올랐다.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1번(Piano Concerto No.1 in Eb Major S124)을 연주했는데 첫 터치부터 마냥 좋았다. 개인적으로 낯선 공연장에 가거나 처음 보는 연주자의 경우 공연에 몰입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평균적으로 1부 후반부에나 연주자와 친해져 귀와 마음이 활짝 열리는데 이번은 꽤 초반부터 편안함을 느꼈다.
오케스트라 단원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단원들의 옷차림, 그중에서도 특별할 게 없는 남성 단원들의 넥타이였다. 보통 와이셔츠와 동일 색상의 나비넥타이를 매거나 타이를 매지 않곤 하는데 이들 모두 비즈니스 정장 넥타이를 맸다. 색과 패턴이 모두 다른 넥타이를 보며 다소 혼란했다. 서양인 단원들도 한 걸 보면 이들만의 의상이라는 말인데 퇴근길 콘서트 기획일 거라며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지휘자 둘째 인상
2부는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Symphony No.3 <Eroica> in Eb Major, Op. 55)이었는데 지휘자 관찰하는 재미에 러닝타임 47분이 훌쩍 지나갔다.
첫 번째 악장이 시작되었는데도 양손을 사용하지 않고 머리만 까딱였다. 이따금 오케스트라를 쳐다보며 뭔가를 끌어올리거나 조물딱거리는 제스처를 선보였다. 곡의 템포나 들어가는 타이밍을 잡아주는 가이드 역할의 지휘만 보다 보니 신선해 보였다. 필요한 부분만 다듬는 헤어 디자이너 같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다 멀찌감치 서서 전체를 조망한 후 다시 붓터치를 하는 작가의 모습 같기도 했다.
전 악장을 암보해 지휘하다 보니 단원들과 아이컨택을 자주 했다. 특히 목관이나 금관 파트가 주선율을 연주하고 나면 잘했다고 긍정의 고갯짓을 해주었는데 교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악장별 독특한 루틴이 있던데 한 악장이 끝나면 단상 아래로 내려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단상에 올라와 정면에 있는 단원들에게 간단히 목례를 한 후 다음 악장을 시작하더라. 어느 순간부터는 지휘자만 보게 되었는데 표현하고자 하는 음악의 느낌이 무엇인지, 무엇을 강조하고자 하는지 예측이 되었고 여러 악기의 소리가 하나처럼 들렸다.
프로그램지
출연진 소개, 곡 소개 모두 일어로만 표기되어 있어 읽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만, 오늘 공연의 지휘자, 피아니스트, 리스트, 베토벤을 캐리커쳐로 그린 표지를 보며 베토벤만 어리게 그린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다. 중후하고 고뇌에 찬 전형적인 베토벤의 초상화와 다른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적인 이미지와 동시에 말랑말랑한 느낌이 들었다. 익숙하고 예측 가능한 <영웅>이 아니라 JPO만의 <영웅>을 선보인다는 암시였을까? 괜히 색다르게 들렸던 이번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