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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숙 Sep 21. 2023

감기몸살로 비실거리며 구시가지를 걷다

2023년 4월 25일

-어제 갔던 피보바르스키 레스토랑에서 얻어온 설탕과 프림으로 제조한 믹스커피. 훌륭하다. 라디에이트를 켜놨어도 으슬으슬하던 차에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이 들어가니 좀 낫다.(음,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내가 왜 믹스커피를 좋아하나 했더니)

-새벽 다섯 시, 오한을 느끼며 깨어났다. 끙끙대며 일어나 히터를 확인했다. 더운 기운이 은은 미약하게 나오고 있다. 방안공기는 겨우 훈기를 느낄 정도지만 4월만 해도 유럽여행의 잠자리는 '아, 추워'를 입에 붙이게 되니, 이나마도 다행이다 생각하고 다시 잠자리로. 

복병처럼 숨어서 나를 노리던 몸살기운을 애매한 상태로 모른 척하면서 조심하고 경계하고 멀찌감치 밀쳐놔 두었건만... 3박4일 전체일정 때부터 시시로 으슬으슬 기운을 뿜으며 얼쩡거리던 기운이 오늘 새벽 내 방어를 뚫고 몸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실은 어제 오후부터 한기로 뭉친 차가운 덩어리가 뱃속에 들어앉은 걸 알고 있었다. 또다른 한기 덩어리가 등과 어깨를 타고 앉은 기분이었는데 아닐 거야~  하면서 부정한 거지. 

의심할 수 없는 몸살기운이 퍼져버린 상태에서는 머리 쓰는 일보다 차라리 몸 쓰는 일이 낫다. 하루를 멍하게 보낼 수도 없고, 오늘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검색 들어가야겠다. 

아, 생각났다. 데친성과 성당이 있는 구시가지로 가보자. 숙소가 있는 마을보다 강건너 구시가지는 그래도 사람 사는 기척이 좀 났더랬지. 오늘은 쉬엄쉬엄 거길 돌아봐야겠다. 우선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하고.

-구시가지를 돌아보고 싶어 열 시쯤 집을 나서 엘베강을 넘어갔다. 데친성을 오른쪽으로 둔 마을로 다리가 끝나는 지점에 도서관이 있다. 도서관에 들어가 1층과 2층을 구경했다. 1층은 직원 사무실과 종합자료실, 성인열람실이고 2층은 어린이실과 취미반 교실이 있다. 서울 홍대입구역 근처에 살 때 마포평생학습관을 3년쯤 출근하다시피 다녔는데, 두 도서관 내부가 거의 흡사하다. 슬며시 들어가 책 한 권 꺼내 자리잡고 앉아있고 싶었지만 나는 이방인이지.

도서관에서 나와 조금 더 왼쪽으로(강이 흐르는 방향, 즉 독일 쪽으로) 가니 건물의 형태가 확연히 달라진다. 데친역 근처에는 두껍고 묵직한 고딕식 느낌의 고층(이라 해봐야 5층 정도) 건물과 집들이 많은데 구시가지에는 작은 집들이 많다. 단독주택일 게다. 

데친역 근처나 구시가지, 양쪽 다 가게는 문을 닫은 곳이 많다. 역을 중심으로 반경 100미터 정도는 가게가 문을 여는데 그 경계를 벗어나면 문을 연 가게를 찾기 힘들다. 저녁에 일찍 닫는 건가, 했는데 낮에도 문이 닫혀있고 안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망해가는 마을인가. 가게를 열었다는 건 소비자가 있었다는 건데 어쩌다 이렇게 문을 닫아버리게 됐을까. 예전에 공장이 많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공장이 지금은 다 다른 데로 가버려서 그런 건가.

이곳에 있는 동안 한국에서처럼 기분전환 겸 바깥 산책을 하다 눈에 띄는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 커피 한잔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사실 엘베강과 강변산책로가 없었다면 이곳에서 지낸 한 달이 되게 지겨웠을 것이다. 문화시설과 유흥시설이 빈약한 시골에서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이국적인 건물과 거리를 감상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그래도 강은, 국경을 통과해 오늘도 뚝심 있게 호올로 나아가듯 흐르는 엘베-라베강은 변함없는 우군처럼 넉넉한 곁을 내어주고 있다. 그거면 됐다.

-드레스덴(그노무 드레스덴, 한꺼번에 다 보고 올걸. 괜히 공원에서 혼자 기분에 취해 몇 시간을 앉아 개겨서는 숙제를 떠안은 셈)은 27일 파리에서 돌아온 H와 함께 가야겠다. 오늘 가서 봤던 곳을 그날 또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둘 다 처음 부딪쳐서 숨넘어가게 감탄하는 게 낫겠지. S도 일정 변경해 데친 숙소로 바로 오면 셋이 같이 가면 좋겠다. 셋이 동행으로 묶어서 가면 일단 엘베라베 티켓 비용이 엄청 줄어들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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