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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Mar 04. 2024

안 외로워?

미국에서 결혼해서 정착한 고등학교 때 친구가  다녀갔다.  못 만나고 전화 통화만 두 번했다. 친구는 부모님 두 분이 아프셔서 곁에 있어드리려 온 터라 시간도 여의치 않았고, 나도 바쁘고 몸까지 불편한 바람에 다음을 약속했다.


친구-넌 안 외로워? 마음의 허기를 이제 신앙으로 채웠어. 전에는 교회에 다니기만 했는데 신에게 의지하니까 견딜만 해. 충족감도 느껴져. 내 부족함을  드러내고 인정하고 보여주니까 편해. 예전보다 덜 힘들어. 너는 뭘로 채워?

나-주변인들에게 말은 안 했는데 영화과 대학원에 다니던 서른 후반부터 책을 엄청 읽어댔어. 잡식성이라 자기 계발서만 빼고 닥치는 대로 읽고 위안 받았어. 네가 성경을 읽고 위안 받는 거랑 똑같아. 요즘은 운이 좋아서 결이 맞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

친구-여기 한인 사회는 좁아서 택시 타고 돌면 다시 원점으로 오는데 부럽네. 넌 돈 걱정은 안 하는 거 같아. 노후 준비는 다 해놨어?

나-그럴 리가. 노후 준비로 한때 초조했는데 이제 내려놨어. 나는 돈 없이는 못 살아.

친구-나도 돈 없으면 못 살아. 돈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딨어. 

나-그래도 돈 많이 버는데서 충족감을 얻는다면 직장을 그만두지도 않았을 거야. 또래에 비해 연봉이 많이 높았으니까. 일할 때는 신경안정제도 처방받은 적 있어.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지금은 커피를 많이 마셔도 신기하게 위통이 사라졌어. 지금 강의하고 책 쓰는 일로 생활비가 다 커버가 안 돼. 우리 나이쯤 되면 혼자 살아도 기본 지출이 많아.  까먹고 있지만 그냥 살아. 사람들의 생각에 스미는 게 의미 있고 결이 같은 사람들을 계속 만나거든.

친구-공공기관에 글쓰기 배우러 오는 사람들은 먹고살 만한 사람들 아니야? (이 말 여러 명으로부터 들었다.)

나-그런 편이지. 하지만 먹고 살만하다고 해서 모두 글쓰기에 관심 있고, 나를 위한 여행에 관심 있는 건 아니야.  8회쯤 수업이 끝나면 내적으로 친밀해져서 살아가는 태도를, 내가 배워. 운이 좋은 거 같아.



2023년 12월에 캐나다에 사는 친구가 와서 5년 만에 대학 학과 동기 다섯 명이 모였다. 점심 먹으면서 부모님의 노환 이야기가 한바탕 이어졌다. 그다음에는 우리의 노화 상태와 각종 영양제 성분 분석이 이어졌다. 건강은 중요하지, 암. 자리를 옮겨서 일상 토크 배틀이 이어졌다. 육개장 맛있게 끓이는 법, 로봇 청소기의 활약 등등. 필요한 이야기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저녁까지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있으려니 온몸에 통증이 참을 수 없이 몰려왔다.  알코올 기운도 없이(?) 생활 수다 릴레이에 에너지가 방전되어 기절 직전이었다. 다음날 일찍 선약도 있던 터라 코트를 주섬섬 챙겨 입고 먼저 자리를 떴다.


대학 때 친했던이라고 쓰지만 점심 메이트는 6명이었다. 매일 보는 친구들이었지만 친밀해지지 않았다. 서로에게 곁을 내주지 않아서 가끔 술자리에서 속 마음을 말하곤 했다. 졸업 후 여러 가지 경험과 나이 덕분에 벽이 조금 낮아졌어도 여전히 벽은 튼튼하다. 다들 차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살지만 마음의 거리는 멕시코만큼이다.  20시간 비행을 감내할 결심을 하듯이 간신히 하루를, 몇 년에 한 번씩 마련한다.


친구1-동남아에 왜 가는지 모르겠어. 지저분하기만 하고 호텔도 우리나라보다 별로고. 호텔은 우리나라 호텔이 최고야. 깨끗하지, 서비스 좋지, 말 통하지, 뭐하러 동남아에 가.


친구1은 메리어트 호텔 멤버십 회원으로 전국 메리어트 계열 여러 지점에서 호캉스하면서 라운지를 비롯한 편의시설과 서비스를 비교한다. 그러면서 엔도르핀이 나오는 친구이다. 이날도 남대문 메리어트 호텔 뷔페에서 모였다. 그래도 가장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친구라 모인 친구들 중 가장 좋아한다.


나는 호캉스는 지루한 터라 호캉스가 체질인 친구에게 보탤 말이 없었다. 동남아 길거리에는 그 나라만의 독특하고 생생한 문화가 스며있다. 나는 특급 호텔 풍경보다 거리 풍경에 하트가 발사된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친구가 관심 없는 주제에 나는 관심도 많고 할 말도 많다.


일상 이야깃주머니를 풀어놓기 위해서 '만날 결심'을 잘 안 하게 된다. 다음 만남은 아마 또 몇 년 걸릴 것이다.  요즘 고민은 무엇이고,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에 관심 있는지를 쏙 빼놓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상 스몰 톡 잔치를 벌이고 헤어지는 친구들만 있다면 나는 외로움의 늪에 벌써 익사했을지도 모른다.


관계에서 알고 지냈던 시간이 중요하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빨강 머리 앤과 다이애나가 영원히 우정 변치 말자고 맹세했지만 졸업 후에 서로 전혀 다른 길을 가듯이, 학창 시절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시절 인연이라는데 점점 마음이 기운다. 과거 어느 한 시점에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과 드문드문 안부를 묻는다. 그 시절을 떠올리지만 지나가는 풍경이다. 내가 탄 차와 친구들이 탄 차는 다른 곳을 향해 달린다.


새로운 풍경으로 들어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2024년 1월에 글쓰기 강의로 인연을 맺은 두 분을 만나서 저녁을 먹었다. 작년 여름 수업에서 고작 두 달 봤다. 한 분은 이제 중학생인 두 아이를 키우며 일한다. 고등학교 때 밴드를 결성해서 전자 기타를 쳤다.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겨 취미 부자로 산다. 일하는 틈틈이 전자 기타, 그림, 글쓰기 등을 배운다.


-저는 문득문득 결혼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요. 그러다 아, 나 참 애들 있었지, 생각나요.


이 말에 엄청 웃었다. 아, 애들 있는 걸 잊어버릴 수도 있다니! 취향 기반으로 만나면 일상 스몰토크보다는 앞으로 뭘 해 보고 싶은지,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현재 고민이 무엇인지, 나를 기반으로 한 흥미진진한 수다를 펼친다. 개인적으로 처음 만났더라도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봄에 보자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함께 가려고 그라운드시소 서촌에서 열리는 힙노시스 전시회를 예약해 두었다.


#인간관계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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