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 매달 제주를 탐사하기로 마음먹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P의 다분한 기질을 가진 두 사람('은'과 '근')이 만나서 술잔을 자주 마주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안주삼아 꺼내놓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뭔가 그럴싸한 계획을(지극히 P의 기준에서이지만) 세우게 되었다.
이 말을 꺼내기 전에, 발단을 먼저 적어보도록 하자.
작년 겨울에 지독한 독감에 시달렸었다. 코로나도 견딘 몸인데 독감 따위 가볍게 훌훌 털어버리겠지 라는 단호한 내 결의는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기침과 발열, 숙취라곤 한 번도 없었던 나에게 이것이 바로 숙취의 맛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의 두통까지, 독감은 세상에서 내 존재를 약 8Kg 정도 날려버렸고, 3주간의 내 일상은 그저 자다가 깨고, 깨작거리다 자는 반복된 삶이었다. 또는 독감다이어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기간이었을지도.
병세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을 때 제일 먼저 했었던 것은, 와디즈에서 수제맥주 만드는 기계인 테라브루를 펀딩 하는 거였다. 스스로에게 보상을 줘야 할 거 같다는 강렬한 욕구와 그동안의 금주를 보상받기 위한 보상심리랄까. 놀랍게도, 3주간의 투병생활 동안 편의점의 맥주들은 어느새 4캔에 만원을 넘어 4캔에 만천 원, 게다가 내가 좋아하던 맥주들은 묶음할인 품목에 포함되지도 않는 세상이 되어있었다.
현실에 대한 잠시동안의 외면과, 자기부정.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긴급할 때 나타난다는 J의 기질이 발현하였고, 4캔에 만천 원은 2리터에 만천 원- 수제맥주는 9리터에 3만 원 중후반대이니 무조건 이것이 이득이다라는 자기세뇌 비슷한 설득력으로 스스로를 설득시키고 펀딩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제품을 기다리는 동안 아직도 목마르기에 바로 할 수 있는 보상을 생각하기로 했다.
문득, 해외여행 제한이 풀리면서 제주 여행객이 줄어서 제주랜트카가 하루에 만 원 정도 금액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기사가 떠올랐고, 비행기를 알아보니 왕복으로 6만 원 정도면 갔다 올 수 있을 거 같았다. P의 기질이 발현되는 순간, 무작정 비행기부터 끊은 후에 평소 친하게 연락을 주고받던 P에게 연락을 했었다.
'오빠 제주 갈 거다!'
사진을 알려주면서 종종 결혼식 같은 촬영 때 같이 사진을 촬영을 하며 이런저런 감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던 동생이었는데, 사진을 찍는 동종취미를 가진 사람으로서 제주도에서 내가 멋진 사진을 찍어오겠노라고 이야기를 해주려던 참이었다.
'나도 같이 갈래!'
'응? 나 평일에 갈 건데, 너 직장은?'
'그만뒀어!'
'그래 그럼 가자!'
예상치 못한 동반자가 생겼지만, P인 나로서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던 문제였다. 이번 여행의 결과가 원했던 여행이 아니라면 다음에 또 가면 되지 라는 생각으로 상황을 받아들였고, 금세 또 소식을 듣고 나타난 한 명의 추가로 3명의 여행자가 제주로 떠나게 되었다.
J의 기질이 높은 2명의 여행자와 떠난 여행은, 결국 나를 다시 제주로 부르는 여행이 되었다. 모든 코스를 계획하고 그 모든 코스를 거쳐서 하루의 일정을 빠듯하게 해치워야 하는 이들의 여행스타일과 나의 여행스타일은 잘 맞지 않았고, 나는 그 친구들이 정해놓은 코스에 올라타서 제주 여행의 즐거움보다는 모델을 마음껏 찍을 수 있다는 사진가의 즐거움이 주된 목적이 되어 그들을 열심히 찍어대며 여행을 마쳤던 것이다.
결국 제주의 수려한 자연과 자유로운 P다운 여행의 사진을 찍기로 한 나의 계획은 3장의 사진을 건지는데 그쳤고, 나머지는 오로지 그 녀석들의 사진들로 가득 찬 여행이 되어버렸다. 이 나름 즐거움이었으나, 애초에 내가 원했던 여행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제주를 가야 한다라는 생각은 간절해졌다. 이 부분에서도 할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결국 비행기를 놓쳐서 2박 3일로 계획했던 여행이 7박 8일이 되어버린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할 시간이 있겠지, 물론 P다운 나의 역할로 모두를 설득시키고 성공적으로 여행을 끝마쳤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이들이 아닌 앞으로 시작될 '은'과 '근'의 은근한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 발단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놓기로 하자.
이러한 여행의 이야기를 '은'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우리는 23년 한 해동안 매달 한 번씩 제주를 탐사하며 무엇인가를 만들어보자 라는데 합의하게 되었다.
또다시 몇 잔의 술이 오고 가고, 이런저런 제주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들로 시간을 흘러 보내다가 다시 제주탐사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그럼 제주에 가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깊은 심모원려 빠진 척, 술잔을 부딪치다가 문득 인스타그램에 최근피드에 자주 출몰하는 눈꽃사진들이 떠올랐고, 안 그래도 이전에 눈꽃을 보고 싶다던 '은'의 이야기가 떠올라서 첫 번째 제주행의 목표는 한라산에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눈꽃을 보고 오자는 합의에 이르렀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계획 수립과 '주'님을 만나기 위한 만남 시간을 잡기로 하였고, 돌아오는 토요일에 만나서 대장정의 첫 삽을 떠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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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한 해 동안의 제주기행. 이 글은 '은'과 '근'의 두 가지 시선을 통해 각자가 바라보는 이야기들로 전개됩니다. 제주 기행을 준비하는 과정과, 실제로 매달 제주를 향해 떠나는 과정, 그 과정안에서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다뤄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