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한편으로 원망했던 엄마를 용서한다.
한참 상담자로서의 수련을 이어가던 시절, 집단상담을 받으며 나의 어린 시절을 되짚어 본 적이 있다. 대학원 공부를 이어나가던 아빠를 대신 해 없는 살림을 꾸려가던 엄마는 억척스러웠다. 찬거리가 너무 없어 생선가게에서 손질하고 남은 생선 대가리를 얻어와 찌개를 끓인 엄마. 그 찌개를 보고는 우리가 거지냐며 화를 내던 아빠. 엄마는 밤낮없이 일하고, 아빠 역시 틈틈이 공부하며 일을 했다. 갓 태어난 나를 살뜰히 돌볼 여력은 없었다. 나는 친할머니, 외할머니, 이모할머니, 무슨 무슨 할머니의 손을 빌려 자랐다. 나에게 엄마의 부재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후 살림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엄마는 늘 바빴다.
엄마의 억척스러움은 엄마의 학창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육 남매의 셋째이자 차녀였던 엄마. 교육에 온 힘을 쏟으신 외가의 방침에 따라 시골에서 도시로 남매끼리 유학을 했다. 자연스럽게 장남은 아빠의 역할을, 장녀는 엄마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장녀였던 큰 이모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으시고 정신적인 장애를 갖고 계셨다. 결국 엄마는 장녀이자 남매의 엄마 역할을 하게 된다. 낯선 도시에서 육 남매의 살림을 도맡아 하며 억척스럽게 엄마의 젊음을 희생했다. 희생의 결실로 큰 이모와 엄마를 제외한 네 명의 남매는 교수님도 되고, 사업가도 되었다. 마음의 부채가 있는 외가 식구들은 넉넉지 못한 곳으로 시집간 엄마를 늘 안쓰러워했다. 외가 식구들로부터 엄마를 안쓰럽게 만든 주인공인 아빠에 대한 불평을 들을 때면, 왠지 모르게 나도 아빠와 함께 죄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엄마를 더 힘들게 하지 말아야지. 엄마의 부재를 불평할 틈은 없었다.
집단상담에서는 집단원들의 지지를 한 번에 받게 되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의 추궁을 한 번에 받게 되어 곤욕스러울 때도 있다. 이야기는 돌고 돌아 자연스레 내 차례가 되었고, 나의 어린 시절을 함께 이야기하게 되었다. 나는 여러 사람의 손에 크게 되었으며 어디 가든 사랑을 듬뿍 받아 행운아라고 했다. 그런 시절 덕분에 나름 수더분한 성격을 지니게 된 것 같다고 말이다. 웃으며 말하는 나에게 집단상담자는 대뜸 “거, 엄마가 중요한 게 뭔지 모르고 날뛰는구먼.” 한마디 던졌다. 잠시 놀랐지만 나는 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엄마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을 항변했다. 가만히 듣던 상담자는 “그래도 엄마가 자녀를 돌보는 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니요? 그리고 그렇게 외로움을 뚝뚝 흘리고 다니면서 뭔 놈의 행운이라는 거요? 아이를 이렇게 허하게 키워놓고는 뭘 챙기러 돌아다닌 것이란 말이요?”라고 일침을 가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나는 얼음처럼 굳어져 할 말을 잃었다. 세상이 정지화면이 된 듯하였다. 이내 정적을 참지 못하는 집단원 하나가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그저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처럼 지나갔다.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분이 올라왔다. 누군가 이야기하는 중간을 가로채며 나는 다시 이 핑계 저 핑계로 엄마를 옹호했다. 상담자는 손을 내 저으며, 됐으니 그만하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왜 화가 났는지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집단원들도 공감하는 표정에 더욱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올 때까지 분이 삭지 않았다. 워낙 따듯한 위로보다는 날카로운 직면으로 유명한 상담자와 집단상담이었지만, 이건 직면이 아니라 공격이라고 느껴졌다.
다음 집단상담을 하기까지 일주일 동안 내내 그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상담자가 미웠다가 동조했던 집단원들이 미웠다. 결국 엄마가 미웠다. 밉다가, 밉다가. 나는 원래 미웠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가 안쓰럽고 고마운 마음 한편에 서운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서운함을 내비치지 못했다. 서운하지 않은 척하다가 서운하지 않은 거라고 나를 속였다. 속여 왔던 작은 서운함은 쌓이고 쌓여 미움이 되었다. 엄마에 대한 미움을 발견하자 서운한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이 미움을 발견하게 한 상담자가 원망스러웠다.
순식간에 일주일이 지나가고 다시 집단상담 자리에서 상담자와 집단원을 마주했다. 누군가 집단원이 나에게 먼저 안부를 건넸고 나는 잘 지냈다고 말하고는 다시 엄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엄마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분함이었고, 나는 괜찮다며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이었다. 생각하고 있었던 말이 아닌데 준비한 것처럼 줄줄 나왔다. 잊고 있었던 일들도 말하면서 기억이 되살아났다. 초등학교 1학년 소풍 때 직접 김밥을 싸 들고 어린이대공원으로 찾아온 엄마. 담임선생님의 김장김치를 한 통씩 따로 준비해 전달한 일, 육상대회 날이면 늘 동대문운동장까지 쫓아와 소리소리 지르며 응원하던 일. 큰 상을 받게 되자 담임선생님이 한턱 쏘라는 농담에 진짜 떡을 하고 잡채를 해 교무실에 잔칫상을 벌였던 일. 잊고 지낸 시간의 단편들이 이야기하면서 쏟아져 나왔다.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앉았던 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상담자는 왜 우냐고 물었다. 나는 지난 일주일간의 나의 심경의 변화와 엄마에 대한 미움. 그리고 고마움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았다. 상담자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담자는 나에게서 엄마에 대한 양가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좋게만 포장하는 것도 보았다고 했다.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나를 도발한 것이다.
해결책은 없다. 다만 집단상담 사건 이후 변한 것은 엄마와 자주 티격태격한다는 것이다. 엄마는 나에게 ‘꽥꽥 이’라고 한다. 대신 엄마도 나에게 ‘꽥꽥 이’이다. 그만큼 솔직해졌다. 서운한 것은 서운한 대로, 고마운 것은 고마운 대로 솔직하게 전한다. 그리고 빨리 사과하고 용서한다. 나도 엄마가 된 지금은 서운한 것보다 고마운 것이 더 많다. 용서할 것보다 용서받을 것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