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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Jul 19. 2023

[기고글] 자부심과 성실함으로 걸어온 길

전기 엔지니어 이정성 / 전기안전공사 - 전기안전 2022년 1,2월호


브라운관 TV와 여러 전선, 부품들로 가득한 진열대 앞에는 백남준 작가의 작품 <첼로>와, 백 작가의 작품을 닮은 이정성 엔지니어의 작품 <오로라>가 빛의 파동을 뿜어내며 같이 걷고 있었다. 예술가의 방 같기도 하고, 엔지니어의 방 같기도 했던 독특한 분위기의 작업실에서 세계적 예술가의 특별한 파트너이자, 60년 세월을 성실히 쌓아 올린 장인, 이정성 엔지니어를 만났다.     






라디오를 만지던 꼬마

백남준의 손이 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라디오는 쉽게 만져볼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도시로 일하러 갔던 둘째 형이 가져온 모토로라의 진공관식 라디오는 어린 이 엔지니어의 흥미와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켰다. 


라디오를 마음껏 만져보고 싶었던 소년은 1961년, 서울로 올라와 전기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기 전자 기술자로 평범하게 살아가던 이 엔지니어의 삶에 큰 변화가 생긴 건 1988년, 백남준 작가를 만나면서부터다. 


“백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예술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제 일만 열심히 했죠. 그래도 성실히 살아온 시간이 백 선생님을 제게로 인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불쑥 찾아온 백남준은 그에게 천 대가 넘는 TV 설치 작업이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이 엔지니어는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지금 생각해도 선생님이 대단한 게, 나한테 그 일을 맡기고 훌쩍 미국으로 가셨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를 때인데 말이죠. 그 대범함이 놀라웠고, 그 믿음이 압박감이 돼서 더 열심히 했습니다.” 


결국 이 엔지니어는 혼자서 천 대가 넘는 TV를 작업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다다익선이다. 


“백 선생님과 일한 것도, 예술작품을 만든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백 선생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큰 작품이 됐죠.” 


다다익선을 미국 생방송을 통해 처음 세상에 소개하던 날, 화면 속 농악대 이미지가 성공적으로 1,003대의 TV 탑을 돌아 올라갔다. 미국 메인 스튜디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원래는 한 번이 끝이었는데, 그쪽에서 ‘너무 경이롭다’, ‘한 번으로 끝내기 아깝다’라며 계속 'One more time(한 번 더)!'을 외쳐서 결국 한 번 더 틀었습니다. 백 선생님도 영상 보시면서 정말 좋아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이날을 기점으로 둘의 협력은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백남준의 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티스트와 엔지니어

그 특별한 관계


끈끈한 관계를 맺으며 수많은 작품을 함께해온 백남준 작가와 이 엔지니어. 하지만 처음부터 둘의 관계가 그 정도로 특별했던 건 아니다. 


“88년 다다익선, 89년 미국 작업을 마친 뒤, 저는 백 선생님과의 일이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다음 작업에 대한 언급이 없었거든요.” 


이 엔지니어는 둘의 관계가 변한 분기점으로, 세 번째 협업이었던 스위스 취리히 전시를 꼽는다.


“89년 미국에 갔을 땐 내내 통역이 있어서 아무 불편이 없었는데, 취리히에는 따로 통역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소개해주신 독일 친구 한 명이 있었지만, 그 친구는 한국어를 할 줄 모르고 저는 독일어도, 영어도 못 했죠. 그래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으로 준비하고 도전했습니다.” 


그는 준비 기간 내내 낮에는 작품을 만들고 밤에는 잠을 줄여가며 영어 공부를 했다. 그 결과 통역 없이 스위스 전시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한국에 오니 선생님이 ‘작품 잘 됐고, 심지어 관광도 했다며? 그럼 된 거야’라고 하시더군요. 취리히 전까지는 ‘다음’에 대한 언급이 없었는데, 그 뒤로는 저를 세계 여기저기 다 내보내셨어요. 나중에 귀띔으로 그때 저를 시험하신 거였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의 주요 활동이 다 외국에서 이뤄지니, 계속 함께하려면 엔지니어도 외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야 했던 겁니다.”


그날을 기점으로 둘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밤을 새우며 작품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삶을 나눴다. 그렇게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재밌어서 밤을 새워도 피곤하지 않았다. 


“단순히 고용, 피고용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가족이었어요. 서로를 그렇게 생각했고, 그건 지금도 변치 않습니다.” 


이 엔지니어는 백남준 작가와 만난 뒤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다. 


“돌아보면 제 인생의 반은 백 선생님을 위한 기술을 배우는 데 썼고, 인생 후반기는 그걸 선생님과 함께 사용했으며,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그분의 작품을 유지·보수하며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제 삶의 모든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엔지니어의 기쁨

그는 엔지니어로서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93년 백 작가가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탈 때를 꼽았다.


“시상식을 지켜보며 선생님과 같이 울었습니다. 선생님이 정말 좋아하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분을 도와드렸다는 게, 그걸 내가 해냈다는 게 너무 기뻤습니다. 내가 받은 게 아닌데도 정말 뿌듯했어요.”


기뻤던 순간을 말하자면 2000년 구겐하임 밀레니엄 회고전도 빼놓을 수 없다. 오프닝 세리머니에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미술계 인사들이 다 참석했는데, 이 엔지니어도 백 작가의 작품 전시를 위해 그곳에 있었다. 그때 큐레이터가 사회를 보면서 전시회를 위해서 애쓴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이 엔지니어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미국 친구들은 다 불리는데 제 이름은 없더군요. 그런데 모든 사람의 이름을 다 부른 뒤에 맨 마지막으로 “특히 한국에서 온 정성 리에게 대단히 고맙다”고 따로 제 이름을 언급해주었습니다. 다들 많이 놀라고 기뻐해 줬죠. 기립 박수도 받았고요. 그때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뒤, 그는 우리나라의 미술 관계자들에게 종종 이날의 이야기를 한다. 미디어 작품은 꼭 엔지니어가 필요한데도,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오랫동안 이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늘 ‘엔지니어가 없으면 이런 작품을 만들지도 못하면서 왜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느냐’고 물어왔습니다. 10초만 투자하면 엔지니어들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는데 왜 그걸 하지 않느냐고요. 그래서인지 요즘 웬만한 미디어 전시에서는 꼭 엔지니어들을 언급해줘서 자부심이 생깁니다.” 


그는 이런 자부심이 엔지니어들에게 큰 동력이 된다고 말한다. 





    

장인의 원칙 

이 엔지니어는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이 만족스럽다. 한국에서 배운 기술로 전 세계를 누빌 수 있었고, 백남준 작가의 활동을 지원할 수 있었던 점에도 큰 자부심을 느낀다 


“외국에서 백 선생님 회고전을 잘 준비하고 귀국할 때, 전시장을 가득 메운 관람객들을 보면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번에도 성공했다’는 희열을 느끼죠. 엔지니어가 아니었다면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시간을 되돌려 다시 직업을 선택한다고 해도 전기 엔지니어가 될 거라고 했다. 그렇게 자부심과 성실함으로 걸어온 반세기 넘는 시간. 꾸준히 기술을 연마하고 정진해온 끝에 그는 2017년 6월, 서울시의 ‘다시, 세운 프로젝트 마이스터 선정’ 사업을 통해 장인 엔지니어로 선정됐다.


60년을 전기 엔지니어로 살아온 장인으로서, 이 엔지니어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바로 능력을 키우기 위해 욕심을 내라는 것이다. 


“있어야 할 자리를 고를 때 거기서 배울 기술이 얼마나 많은지, 그 기술이 가치가 있는지를 중요하게 보길 권합니다. 적당히 일해도 되는 곳에서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힘들어도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좋습니다. 그렇게 계속 능력을 연마한다면 언젠가 더 나은 자리에 설 수 있을 겁니다. 또한 그렇게 쌓은 능력을 드러낼 줄도 알아야 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능력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요.”


그는 또한 원칙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다다익선은 보수 공사를 할 때 반드시 이 엔지니어의 자문을 받는다. 해당 작업을 할 때마다 그가 항상 강조하는 게 바로 원칙이다. 순서와 원칙을 지켜야만 작품이 망가지지 않고 잘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다익선을 구성하고 있는 TV는 총 1,003대입니다. 이 작품을 켤 때 귀찮다고 한 번에 모든 TV를 켜서는 절대 안 돼요. 꼭 전기 분전함을 15대에 브레이크 하나씩 올려서 켜야 합니다.” 


그는 귀찮아도 이런 점을 잘 신경 쓰는 게 엔지니어의 의무고, 원칙을 잘 지켜가며 작품들을 유지, 보수하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말한다.     






평범한 엔지니어가 꾸준히 지켜온 성실함과 책임감, 그리고 향상성과 원칙은 결국 그를 세계적인 예술가의 특별한 파트너로, 자부심 가질만한 커리어의 장인으로, 그리고 끝까지 자신의 일을 사랑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오늘도 성실하게 새로운 것을 배우고, 소중한 추억을 지키며, 자신의 일을 꾸려나가고 있다.



[원문 보러가기] 전기안전 2022년 1,2월호

https://www.kesco.or.kr/docViewer/skin/doc.html?fn=4AA1BE7E-ED3B-9F73-EBED-4166D2745E2D.pdf&rs=/docViewer/res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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