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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훈 Sep 02. 2021

국가부도의 날 - 우리 부모님은 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우리는 교과서로 역사적인 사건이나 순간들을 배우지만, 그런 사건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역사의 큰 물줄기에 비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월과 기억의 범위는 너무나도 작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 속에서도 역사적인 순간과 공통되는 지점을 찾는건 쉽지 않다. 내가 태어난 이래로 대한민국은 크게 굴곡없는 시간을 보내왔고, 굴곡이 있는 지점에서도 나는 아주 어린 아이였던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그 순간들을 기억에서 쥐어짜내 보자면.

정확하게 기억에 남는 어린시절 순간들 중에 하나는 1987년 무렵, 동네에 있는 아주대학교에서 있었던 시위들이다. 그 시위를 기억하는 이유는 최루가스다. 최루가스를 난생 처음 경험했다. 
직접 눈 앞에서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꽤 시위가 강렬했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학교와 거리가 꽤 떨어져있던 우리집까지도 최루가스가 영향을 미쳤었기 때문이다. 뭔가 매케하고 답답하고 눈물 콧물을 쏟아내는 냄새들이 집안에 들이닥쳤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아주대생들이 또 데모를 하나보다'라고 하셨다. 그 어린 나이에 눈물 콧물을 쏟아내면서도 그런 상황들이 이해가지 않았고, 그런 이해안가는 순간들은 내가 중학생이 되던 순간까지 종종 반복되었다. 

그리고 또 남는 기억 중 하나. 바로 1997년 겨울의 모습이다. 정권교체가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었지만, 대통령 선거를 하고 정권이 교체되었다며 많은 변화들이 있었고, 왜인지 당선자는 당선이 되자마자 굉장히 바쁘게 움직였다. 바로 대한민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뉴스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쏟아졌고, 전 국민들은 금모으기 운동으로 나라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아버지는 다니시던 직장에서 퇴직당하셨고, 안산 어딘가로 재취업을 하셨다. 의도치않게 멀어진 출퇴근 거리로 인해, 아버지는 주말마다 집에 오셨고, 어머니와 나는 평일을 함께 보내며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겨우겨우 살아내다보니 점점 살아낼 수 있었고, 그렇게 버티다보니 지금까지 흘러올 수 있었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우리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까지 생각하셨었다고 했다. 힘든 시절, 아주 힘들었던 우리들의 단상. 그 힘든 이야기는 '대한민국 금융위기'라는 거대한 이야기와 얽혀있다. 그 때 그랬었다. 

영화는 바로 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모두가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 근데 영화는 다 같이 힘들었던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어떤 모습으로 들이닥쳤고, 우리들은 어떻게 대응했으며, 어떻게 버텨냈는지 보여준다. 답답하고 분노가 치민다. 
사실 이 영화는 모두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이 영화는 '외환위기 당시 비공개로 운영된 대책팀이 있었다'는 한 줄의 기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사실상 영화속 이 모든 에피소드는 허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영화에 빠져든다. 이 영화에 사실성은 없지만 적극적인 개연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대한민국의 모습이라면 필경 그랬으리라고 짐작할만한 사건들이 펼쳐진다. 납득이 간다. 그게 이 영화의 최대의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허구의 스토리를 단단히 붙잡고 가는 건 개연성이지만, 그 흐름을 끝까지 유지해내는건 감독님의 능력이다. 각자 다른 캐릭터와 사건을 중첩해서 보여주면서,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처럼 보여주는 편집력이 대단한데, 우리는 이 화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바로 영화 '덩케르크'다. '덩케르크'에서는 각자 다른 시간대를 교차해서 보여주면서 긴박감을 고조시킨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각자 다른 상황에 처해있는 주인공들의 모습과 그 주인공들이 겪어내는 사건들을 중첩해서 보여주면서 우리를 그 시대, 그 현장으로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 당시 IMF를 살아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시대에 생생하게 다가갈 수 있다. 감독님의 우수한 편집 덕분이다. (허준호가 어음을 쓰고, 유아인이 설명을 하고, 김혜수의 장면들이 교차되는 그 씬이 정말 탁월하다)

어쨌거나 영화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그 결말을 향해서 뚝심을 가지고 흘러간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 결과에 봉착한다. 그 시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조금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그 당시, 그저 우리는 힘들고, 그저 우리는 버텨내고 있었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비로소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큰 그림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답답한 마음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겨우겨우 살아냈지만, 우리가 살아낸 결과로 누군가는 더욱 더 잘 살고, 누군가는 더욱 더 누군가를 탄압하는 이런 사회가 만들어져버렸다. 의도치않은 변화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더 팍팍하게 만들어버렸다. 답답하고, 아득한 기분이 든다. 

그런 시대의 결과물로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눠져있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비합리적인 대우를 받으며, 또는 그런 기회조차 받아내지 못하면서 취업게시판을 전전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 영화 속의 20년전과 지금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는 결국 우리가 그렇게 살아온 결과물이다. 우리는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았고, 견디지 말아야 할 때 견뎌내면서 살았다. 지금도 답답한 시절은 계속 되고 있고, 우리는 그 큰 그림에 점 하나를 찍어가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을 버텨내고 우리를 키워주신 우리들의 부모님들에게 경의와 존경을 보낸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들을 부디, 이 영화를 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그 힘든 시절을 굳이 다시 떠올리시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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