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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훈 Sep 02. 2021

그린북 - 무엇보다도 세련된 자기반성.

그린북이란 1960년대에 미국에서 실제로 출판이 되었던 포켓서적이다. 이 책은 바로, 흑인 여행자들을 위한 안내서다. 흑인 여행자들이 갈 수 있는 호텔, 갈 수 있는 레스토랑 등이 적혀있으며, 흑인에게 통금이 있는 마을까지 표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흑인이 노예에서 해방된지 100년이 가까운 시간 흘렀지만, 여전히 해방받지 못했던 시절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이 시기에 마틴 루터 킹은 우리가 누구나 알고 있는 '아이 해브 어 드림'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고, 얼마 후 피살당한다. 하얀 보자기를 뒤집어쓴 KKK단이 도시를 누비며 흑인을 때리고 죽이고 강간했고, 그런 일들은 집단의 폭력으로 묵인되었다. 광기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들을 겪어내고, 극복해낸 미국 국민들은 2009년, 마침내 버락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낸다. 150년 가까이 흘러온 인종차별의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미국사회에서 유색인종이 가지는 입지는 더더욱 커졌고, 이제는 BTS가 지은 한글노래가 미국 전역에 울려퍼진다. 한 사회는 이렇게 발전하고, 넓혀졌다. 

이 영화는, 그 지난한 세월에 대한 미국 스스로의 통렬한 자기반성에 가깝다. 하지만 그 반성의 방식은 엄숙하거나 진지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보다 유머스럽고, 세련되었다. 솔직히 부럽다. 가장 안타까웠던 시대를 이렇게 조명하고, 이렇게 세련된 형태로 반성하는 모습이 말이다. 과거사를 배경으로 우리도 수많은 영화들이 나왔지만, 여전히 엄숙하고, 무겁고, 심각한 이야기들 뿐이다.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또 얼마나 무수히 많은 영화들이 나와야하는 것일까. 한편으론 씁쓸하고, 한편으론 기대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영화의 큰 줄기는 이 엄혹한 시대에 대한 반성이지만, 사실 영화는 좀 더 본질적으로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바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한 고민이다. 사실 인종에 대한 차별도, 지역에 대한 차별도, 어떤 특정 집단의 이익들이 충돌할 떄 발생한다. 집단의 이익이란,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소속감을 통해 만들어진다. 누군가는 흑인이라는 무리를 짓고 살고 있고, 누군가는 백인이라는 무리를 짓고 살고 있다. 누군가는 재즈를 듣는 사람들이고, 누군가는 클래식을 듣는다. 백인은 흑인을 억압하고, 클래식을 듣는 사람들은 재즈를 듣는 사람들을 무시한다. 사람과 사람의 모습과 취향이 모여서 집단이 되고, 그 집단이 가진 힘에 따라서 폭력과 차별이 행해진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본질적인 모습은, 인간이 가진 개별적인 특질이라기보단,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에 가깝다. 

이 영화는 그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이야기한다. 흑인에도, 남성에도,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돈 셜리는 늘 방황한다. 매일 눈물 쏟는 연주를 해내고 매일 뜨거운 박수를 받지만, 매일 위스키를 마시며 외로움에 몸부림친다. 반면 아무 가진 것도 없이, 충동적으로 주먹만 날리는 토니 발레롱가는, 본인이 소속된 집단에 대한 소속감만으로도 그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즐기며 살아간다. 인간에게 있어 '소속감'이란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그런 것들은 한 인간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내는가. 언뜻 영화는 유머스럽고 괴이한 상황에 놓인 두 사내의 로드무비같아 보이면서도, 굉장히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부분들은 건드린다. 이 지점이 좋았다. 유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이런 부분들에 대한 터치를 놓치지 않는다. 즐겁게 영화를 보고, 이런 부분들을 고민하게 한다. 어떤 영화는 보고 난 뒤에 바로 잊혀지지만, 이런 영화들은 보고 난 뒤에 더욱 더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여운이 나쁘지 않다. 이런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성장하고, 확장한다. 그린북은 우리에게 그런 영화다. 

유머스러운 부분을 지나다 보면 중간중간 놓치기 싫은 대사들도 불현듯 툭툭 튀어나온다. '폭력은 품위를 이기지 못한다' 라든가 등의 대사들 말이다. 마치 '히든피겨스'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린북'역시 그렇다. '히든피겨스'처럼 그 좋은 대사들이 나오는 장면장면을 되돌려보면서 옆에 두고두고 보고 싶은 영화라고나 할까. 영화의 마무리가 매정하지 않아서, 그 부분 역시 너무 좋았다. 따지고 보면 참 난 어지간히도 해피엔딩을 좋아하지 싶다. (남들이 다 욕하는 스카이캐슬 마지막회도..난 좋았다)

다양한 이야기들과 다양한 명대사들로 만들어져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던저주는 영화. 그러는 와중에도 안타까웠던 시절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을 놓치지 않는 영화. 이 영화가 왜 수많은 상을 휩쓸었는지, 이제서야 알겠다. 그 여운이 참 좋다. 아. 정말 너무 멋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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