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아카이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백 Sep 05. 2017

48년 된 아파트를 고치는 일


#첫만남

"손님이 딱 좋아하실만한 매물이 하나 있어요."

친구와 내가 찾던 것은 월세가 저렴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그외 부차적인 것들, 이를테면 낡고 오래되고 비가 새는 것 쯤은,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부동산에서 생각하는 예산을 말하면 이 동네에 그런 매물은 없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동네를 찾아봐야하나 싶을 때 쯤 만난 내 또래로 보이던 중개사는 우리의 요구조건을 듣자 눈빛을 반짝거리며 말했고 지금의 아파트를 소개시켜었다. 물론 사소한 문제들은 있었다. 화장실에는 세면대가 없었고 바람이 불면 창문이 덜컹거렸으며 베란다에는 빗물을 받는 용도로 보이는 바가지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월세에 비해 넓었다. 넓은 창이 마주보고 있어 바람이 잘 통했고 공원 조망이라 창 밖은 여름의 녹색빛이 가득했다. 조건을 따져보기도 전에 나는 집이 마음에 들었다. 화장실에 변기가 없었다고 해도 나의 결정은 같았을 것이다.





#끝나지않는수리

처음에는 주변 프리랜서들과 함께 사용할 공동작업실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겉모습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들, 공간의 쓰임새까지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계약한 다음날 시작한 수리는 한번도 완전히 마무리된 적 없었다. 한달 넘게 진행되는 큰 공사가 두번정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비가 들이치면 비를 막고 전등을 달고 부식된 문을 수리하는 등 자잘한 일들은 계속 생겼다. 그간의 기록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거실

분명 낮에 바람불고 햇빛이 좋을 때는꽤 괜찮아 보였는데 밤이 되고 형광등을 켜니 허술한 점이 구석구석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된 집이라 벽 표면이 고르지 않아 벽지가 군데 군데 울고 있었다. 벽지에는 인공적인 광택과 보일 듯 말듯 미세한 스트라이프가 있었다. 장판은 얼룩이 많고 가장자리를 따라 허술하게 마감되어 있었다. 싱크대와 상부장의 부피는 너무 커서 집 전체를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싱크대 일부와 상부장들을 떼어내었다. 거슬리던 벽지도 다 떼어냈다. 5겹이상 덧발린 벽지는 그간의 세월을 말해주었고 벽면 가까이에서는 1970년대에 발행된 신문을 발견하기도 했다.





상부장을 떼어낸 자리에는 나무 선반을 달았고 요리할 때 보조등으로 사용할 수 있게 레일조명을 달았다.





처음부터 장판을 바꾸고 싶었지만 예산문제로 기존의 장판을 2년 넘게 사용했다. 하지만 얼룩도 많이 생기고 때가 많이 타서 올해 초 바닥에 마루를 시공했다. 원래 계획은 거실과 방 두곳 중 한곳에만 시공할 계획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집 전체에 마루를 다 깔았다.





창 밖을 보며 맥주 한잔 할 수 있는 바 테이블을 만들었다. 만들고 보니 두꺼운 샤시로는 풍경을 보는 기분이 들지 않아 유리 창문도 새로 만들어 달았다.





난방만 하면 엄청난 굉음을 내던 보일러도 교체했다.





이 밖에 팬던트 전등을 새로 달고, 사다리 선반을 만들고, 종로 꽃시장에서 키가 큰 야자나무도 사다 놓았다.





#서재

공간만 보면 4평 남짓하지만 공원이 보이는 베란다가 있었다. 창고처럼 쓰이던 베란다를 활용하면 재미 있을 것 같았다. 이 공간은 일도 하고 책도 읽는 서재로 만들어보려고 한다. 아파트에는 좀 생소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노출 콘크리트와 에폭시 시공을 했다.





바닥에 장판을 거두고 벽과 천장의 벽지를 떼어냈다. 특히 오래된 벽지가 잘 떨어지지 않아 애를 많이 먹었다.

천장 구석에는 굴뚝 같은 공간을 발견했는데 재미있었다. 나중에 이곳에 에디슨 전구를 달았다.





벽에는 코팅제를 바르고 베란다에는 나무를 재단해서 작은 데크를 만들었다. 공동 작업실로 사용할 때는 바닥에 에폭시를 시공해서 사용했는데 결국은 바닥에 마루를 다시 시공했다. 마루의 편안한 느낌이 집에는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원목 책장을 만들고 싶었지만 공간이 너무 좁아게 느껴질 것 같아 상대적으로 가벼운 느낌의 찬넬을 달았다. 좁은 방이 더 좁아보일까봐 걱정이 되서 선반 깊이는 22cm정도로 최대한 줄였다. 나무는 합판을 재단해 받았고 어두운 컬러의 스테인으로 마감했다.





베란다로 통하는 문 주변에도 책장을 만들어 달았다. 책장이 내 키보다 커서 조립이 쉽지 않았다. 구조는 엉성하지만 벽에 밀착시켜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베란다에는 벤치 겸 소파를 만들었다. 수납 공간이 부족해서 밑에 창고로 쓸 공간을 두었는데 이 때문에 전체적이 모양이 좀 망가졌다. 하지만 편안하고 공원이 잘 보여서 책 읽으며 쉬기에 좋다.





#침대방

정사각형에 가까운 별다른 특징이 없는 방이었다. 창문을 닫아도 벽에 균열이 있어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거실이나 서재와 마찬가지로 벽지를 뜯고 바닥에 마루를 까는 과정은 같았다. 하지만 이곳의 외풍 때문에 페인트만 칠해서는 마무리할 수 없었고 단열재와 석고보드로 벽을 보강했다. 중앙에는 더블 사이즈 침대를 놓았고 방문이 있는 벽에는 화장대를 만들어 놓았다. 마지막으로 식물을 들여 놓으니 이제 집 같은 편안한 느낌이 든다.





이밖에도 공간으로 분류하기 힘든 자잘구레한 과정들이 있었다.





#공간작업실

사진으로 기록하지 못한 자잘구레한 일들도 많았다. 이 곳 덕분에 오래된 아파트가 아니었다면 해보지 못했을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임차인 신분으로 자유로운 시도들을 다 해볼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오래된 아파트라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임대한 공간에 돈과 시간을 들이는게 아깝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돌이켜 보면 이곳은 나에게 머릿 속에 생각한 것들을 해볼 수 있는 실험실, 작업실과 같은 공간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