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그레인 도마를 만들자
작년 중순, 전시회 및 영화 초대권을 선물해준 동생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주겠다고 하니 기다렸다는 듯 도마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딱히 집에서 도마를 쓸 것 같진 않아 보였는데...) 때마침 유튜브로 여러 가지 나무 제품 영상을 보다가 도마도 몇 가지를 봤던 터라 여러 가지 디자인과 제작 방법을 펼쳐놓고 고민에 들어갔다.
우선 원목 도마를 만든다고 했을 때 쉽게 찾을 수 있는 형태는 크게 빵도마(breadboard)와 엔드그레인 도마(endgrain cutting board)로 나뉘었다. 대부분의 목공 기초 수업이나 도마 만들기 콘텐츠에서는 빵도마 위주로 설명이 되어 있는데, 빵도마는 평을 잡고 대략적인 형태를 잡아준 뒤 샌딩과 마감을 하면 그럭저럭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평을 잡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왠지 내가 하면 평도 제대로 안 잡히고, 도마도 금방 뒤틀려버릴 것만 같은 불안. 그래서 그냥 깍두기 썰듯 싹둑싹둑 썰어서 붙이면 될 것만 같은 엔드그레인 도마를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리고 그건 완전한 오산ㅠㅠ 이게 더 쉽겠지라고 생각한 순간 지옥행 열차 탑승
CNC 조각기로 자작 합판이나 집성목을 주로 가공하던 터라 나무 고르기부터 쉽지 않았다 시작되었다. 원목은 평소 사용하는 목재에 비해 가격이 만만치 않아 신중하게 골랐는데(소심소심), 도마 제작에 꽤 많이 사용하는 월넛과 하드 메이플을 선택하였다. 해당 수종은 주로 목재를 사던 사이트에서 적당한 사이즈로 재단된 것을 구할 수 있었고(크고 거친 상태로 구하는 것보다 단위 가격은 비쌌지만ㅠㅠ), 거의 도마 제작에 딱 맞는 정도의 양만 구입할 수 있었다.
도마란 게 딱히 디자인이 필요해 보이진 않지만, 월넛과 하드 메이플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주로 체크무늬의 교차 패턴을 만든다), 그런 배치를 위해서는 어떤 순서로 재단 및 집성해야 하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 간단한 디자인 및 사이즈 결정 과정이 필요했다. 사실 이 과정은 나무를 고르는 과정에서 함께 진행하였는데, 조금이라도 자투리를 덜 남기려는 생각에서 그렇게 진행하였고, 결과적으로 구입한 나무를 거의 전부 활용하여 도마를 제작하였다.
제작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하였다. 재단(사면 대패된 나무를 폭에 맞게 재단), 집성(월넛과 메이플을 교차로 집성), 대패(집성 후 평 잡기), 다시 재단(집성한 것을 패턴을 위해 다시 재단 - 기존 재단의 수직 방향으로), 다시 집성(패턴에 맞게 교차 집성), 다시 대패(집성 후 평 잡기), 그리고 손잡이 홈 가공, 오일 마감, 왁스 마감. 헥헥...
실제 제작하면서 빵도마였으면 한 번에 끝났을 평 잡기가 두 번이나 반복되었고, 재단에 집성까지 추가되면서 이것이 무지에 의한 잘못된 선택임을 여러 번 느꼈다.
도마를 만들어달라는 이야기를 7월 말에 들었고, 실제 제작은 10월 초에 시작해서, 완성은 11월 말에 했으니 부탁받고는 4개월, 제작 착수 후에는 2개월이나 걸린 대장정이었다. 물론 이 중 대부분의 시간은 다른 일을 하거나, 고민을 하거나, '이거 뭐야 어떻게 해' 따위의 생각을 하며 미뤄두기를 반복하였지만. 어쨌든 도마를 전달하고 나니 홀가분하기도 하고, 그걸 또 받아서 좋아하는 동생을 보니 뿌듯하기도 했다.
다음엔 또 어떤 제품을 만들게 될까. (''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