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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ms Mar 01. 2022

내가 집을 짓는다면

내가 집을 짓는다면 바다보다는 강과 산을 가까이 두고 싶다. 파도와 바람이 나를 향해 들이치는 바다가 아니라 물결이 내게서 저 먼 곳으로 흐르는 강 곁에 짓고 싶다. 그렇게 강으로 무릎을 덮고 산 그늘에 등을 기댈 수 있는 자리에 따뜻하게 웅크린 모양으로 두고 싶다. 낮에는 마치 한 그루 나무인 것처럼 작은 것들이 부산하게 꼼지락대고, 밤에는 마치 별인 것처럼 따스한 빛이 어둠 아래 누운 누군가의 잠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만 반짝이도록 숨죽인 채로 가만히 존재하고 싶다.


이 집의 마당에는 친구들과 교복 차림으로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가는 길, 엄마한테 엄청 혼나겠다고 말하며 웃고 떠들던 날의 요란한 입김을 두고 싶다. 그리고 운동화가 다 젖었는데도 오히려 가벼웠던 발걸음은 마당 입구에 두고, 잠자리에서 다시 바스락거릴 조약돌 같은 농담을 모아 마당을 가로지르는 길을 만들고 싶다. 마당의 한 구석은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의 책상처럼 이제는 턱없이 작아져버린 것들로 장식하고 싶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아지다 못해 시간이 완전히 가져가 버린 것의 그림자를 두고 싶다. 내가 아주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보았던 재래식 물펌프처럼, 마중물을 넣고 꾹꾹 누르면 맑은 물이 쏟아지듯, 내가 낡고 오래된 것만 보면 할머니의 냄새와 찬찬한 걸음걸이를 떠올리듯 눈을 맞추면 오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들을 두고 싶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벽면에는 추억하는 모든 것을 글로 끼적대고야 마는 내 모난 습관을 액자로 걸어두고 싶다. 액자 안에는 갈수록 선명해지는 한 문장의 기억들, 그러니까 저녁노을이 어서 가보라고 등을 떠밀어 달려온 둑길 아래 이모 품에 안겨있던 갓난 내 동생의 모습이나, 고등학교 졸업 즈음 다시는 보지 못할 것처럼 엉엉 울었던 친구들과의 짠한 술자리나, 이십 대가 끝날 무렵 맥주 한 캔과 밤을 보내던 그네에 앉아 모래 위에 적던 글이나, 남들보다 조금 늦게 퇴근한 밤 버스 안에서 이제 겨우 사회인이 된 것 같았던 무거운 설렘 같은 것들을 담고 싶다.


거실을 지나 부엌에는 요리하는 어머니의 뒷모습과 날 부르는 목소리 그리고 밥 짓는 온기를 채우고 싶다. 크기가 약간 모자란 식탁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앉아있고, 어머니가 손사래를 치고 말려도 나는 식탁의 모서리 가장 작고 불편한 의자를 당겨 앉고 싶다. 그리고는 날씨가 추워져 집안으로 들여놓아야 하는 화분, 낡아서 덜 열리는 창문이나 현관의 깜박이는 전구 따위의 사소한 걱정거리와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번거로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조용히 아버지의 몫이었던 것들까지 해내고 싶다.


부엌을 지나 뒷마당으로 향하는 작은 문은 누구나 쉽게 열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 그리고 이곳으로 내가 애써 붙잡고 있었던 과거의 기회들이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도록 문 여닫는 소리를 눈감아주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문 여는 기척이 들리면 나는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회가 내게 올 수 있도록 도왔던 모든 이들을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닫힌 문을 향해 포기나 미련, 아쉬움, 과분함 따위의 예쁘지 않은 이름으로 존재했던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싶다.


침실에는 발아래로 창을 내고 침대 하나만 두고 싶다. 침대 위에는 가장 소중한 존재를 곁에 두고 함께 창밖으로 흐르는 시간의 비밀에 대해 털어놓고 싶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던 밤은 매번 속고야 마는 거짓말임을, 우리가 달라지는 계절을 바라보는 동안 계절 역시 우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지난 시간은 우리 뒤로 흘러가지 않고 사실 우리 옆에서 같이 걷고 있음을 말하고, 앞으로도 이 공공연한 비밀에 절대 실망하지 않겠다는 약속만큼은 시간에게 들키지 않게 이불 아래 숨겨두고 싶다.


마지막으로 거실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모든 것을 대강 두고 아주 천천히 정리하고 싶다. 집의 가장 넓은 영역을 꾸미는 일이 아주 오래도록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파를 옮기고, 커튼을 갈아 끼우고, 러그를 펼치고 접는 일이 때로 고통스럽더라도 자꾸만 더 나은 생각이 떠오르면 좋겠다. 그러다 누군가 집으로 찾아오면 얼른 앉을자리를 만들어주고, 정말 즐거운 웃음을 띠며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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