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 - 정은령
#당신이잘있으면나도잘있습니다
작가는 유학시절 모국어가 그리워 이 글을 썼다 했다. 그런데 그리워한 건 비단 모국어뿐이 아니었던 것 같다. 떠나온 일상, 떠나온 이들, 떠나온 자신. 이역만리 타국의 물리적 거리감, 완전히 다른 일상을 살고 나서야 보이는 기존 일상의 실 단면들, 부재, 거리감으로 파생된 사유가 고마움, 미안함, 다양한 감정으로 애틋하게 담겨 있다.
어떤 견고한 신뢰의 무너짐을 겪으며, 최근 몇 달을 고통 속에서 지내왔다. 격무에 의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시시때때로 그 순간을 곱씹으며 아파했다. 더 이상 생각조차 못하겠다 싶을 만큼 지쳤을 때 마음의 무언가가 고무줄처럼 툭 끊겼고, 복잡한 감정이 쓸린 자리에 조금의 희망도 없는 공허함만 남았다.
그 와중에 이 책을 만났고, 세상과 타인을 향하는 수많은 감정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놓아버리지 않은 한 사람의 온기와 다정함을 보았다. 감정의 농도를 가늠하면 결코 쉽지 않았을 단정하고 절제된 문장을, 그 덤덤한 문장을 읽으며 나는 울고 또 울었다.
“자신이 만든 조각상, 갈라테이아에 쏟는 피그말리온의 사랑은 그것이 아무리 아프로디테 여신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곡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자기 동일시이다. 그것만은 안된다고 했던 선악과를 따 먹고, 하느님으로부터 울며 떠나가는 아담, 그런 아담과 이브를 내쫓지만 떠나가는 그들의 수치심을 가려주기 위해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는 하느님의 사랑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과연 그 자유, 내 자유와 상대의 자유에 대해 얼마나 자각하고 있을까.”
“내 안에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닌 생명의 힘이 있다. 그 힘이 나를 이끌었다. 저 공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든, 아니면 미약한 빛을 따라가든, 그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예감하거나 도피하지 말고 부딪쳐보라고,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으니 맞닥뜨려보라고, 이 생이 끝나기 전에 그 공허의 얼굴을 똑똑히 보자고. 죽든, 살든……”
인생이란 어쩌면 젊음으로 무분별하게 덕지덕지 부풀어 올랐다가, 세월과 나이로 그 부푼 것들 중 불필요한 것들을 빼내고 내려놓고 정돈해 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문장이 바로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은 어설프고 모자란 내 모습조차도, 이게 나인 것을 조금씩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글을 읽으며 사람이 영글어 간다는 것은 더 화려한 것을 얻고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문장을 읽으며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의 소음들이 하나하나 소거되었고, 오랜만에 고요해졌다.
이 시기 이 책을 읽게 된 것, 오랜만에 생의 이 작은 우연이 참 기적 같고, 고맙다.
#정은령 #마음산책 #k가사랑한문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