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진 보고를 준비하다 보면 조직 피라미드 구조의 견고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애초에 우리는 최종 보스 보고 날짜에 맞춰 보고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최종 보스로 가기 전 그 아래 있는 중간 보스들을 거치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그룹장 보고 > 팀장 보고 > (다수의) 사업부장보고 > 최종보스 보고를 모두 거치는 스케줄로 역산을 해보니, 2주나 빨리 보고자료를 마무리지어야 했다. 중간 보스들을 한 명씩 거칠 때마다 수정사항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그래도 이렇게 하나씩 스텝을 밟는 것의 장점은 앞서 보고 받은 중간 보스들이 최종 보스 보고 때 동석해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다. 이미 본인들은 보고를 받은 사항이고, 피드백에 대해서도 반영이 돼있기에 최종 보스 보고 때 엉뚱한 보이스가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경영진 보고를 제대로 준비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컨설팅을 하며 여러 번 경영진 보고를 준비해 봤지만 대부분 운영성 업무 중간에 떨어지는 현황 및 개선 방향 보고였다. 이렇게 컨설팅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달고 각 잡고 보고를 제대로 한 건 처음이라, 이제야 컨설팅의 참맛을 봤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없이 많이 까이고, 혼나고, 자책하고, 밤을 지새웠다.
퇴근하고 2시간쯤 집에서 몸을 뉘이고 다시 출근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택시를 타고 출근했고, 차가 덜 막혀서 8시 반쯤 도착했다. 택시에 내려 땅에 발을 내딛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넘어질까 봐 아주 조심조심 한 발씩 떼어가며 길을 걸었다. 화창한 6월의 아침이었다. 키 큰 나무들로 녹음이 푸르렀고, 온몸에 힘이 쫙 빠진 채로 터덜터덜 걸으며 벤치에 앉았다. 그렇게 멍하니 벤치에 20분쯤 앉아 있었다. 아침 8시 30분에도 이미 해는 뜨거웠다. 그렇게 뜨거운 햇빛을 흡수하면 내 몸 안의 에너지가 채워질 것 같았다.
은퇴를 하고 나면 그래도 나 치열하게 살았노라 돌이키게 될까. 그때가 되었을 때 조금 더 열심히 살아볼 걸 후회하지 않으려고 지금 이렇게 사는 건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