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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컨설팅팀의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간다

by 일곱시의 베이글

새 회사로 옮기고 첫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3개월이 흘렀다. 장거리 출근이 익숙해지고, 피엠과 업무 스타일을 맞춰갈 때쯤 되니 오프할 시기가 왔다. 최종 보고는 9월이지만 프로젝트 예산이 넉넉지 않아, 나는 중간에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고객사에서 요구한 인력보다 추가 투입되었으니 서비스 개념(?)으로 제공되었다 사라지게 된 것이다.


1차 중간보고 때는 보고 2주 전부터 피 터지는 야근이 시작되었다. 월화수목금금금, 공휴일에도 출근해서 새벽까지 일을 했다.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때만큼 힘들지는 않다. 보고까지 2주가 남았고, 그 보고가 끝나면 오프를 하는 것이라 홀가분한 마음이다. 최종 보고까지 경험하고 가면 더 좋았겠지만 모든 게 내 마음 같을 수는 없다. 이번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보고 준비가 시작되어 오늘은 밤 12시가 조금 넘어 퇴근을 했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늘 저녁에는 홈페이지 목업 디자인 리뷰가 있었다. 웹 디자인 외주 업체를 쓰고 있는데, 디자이너인 대표가 애플 키노트로 100장짜리 슬라이드를 만들어 와서 발표를 했다. 내일 고객에게 발표하기 전 PMO인 우리 회사에 사전 리뷰를 받는 절차였다. 며칠 밤을 꼬박 새워서 만들었다는 디자인 결과물은 비주얼적으로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감탄이 절로 났다. 디자인 퀄리티며, 화면 전환 효과, 영상, 마지막엔 영화 크레딧 같은 구성에 BGM까지 깔아 대미를 장식했다. 박수라도 쳐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피엠의 표정은 시종 어두웠다. 디자인적으로는 훌륭한 발표였지만, 경영진에게 들고 가 컨설턴트가 보고하기에는 내용적으로 허점이 많은 장표였기 때문이다. 발표자가 누구냐에 따라 보고 받는 사람의 피드백도 완전히 달라진다. 긴 머리에 화려한 색깔의 양말을 신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디자인 전략을 발표하면 본인의 철학이 담긴 이야기니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자료를 검은 정장에 구두를 신은 컨설턴트 피엠이 발표하면 훨씬 혹독한 챌린지를 받게 된다.


피엠의 걱정은 그거였다. 이 100장짜리 마스터피스를 발표할 사람은 본인이고, 당장 보고는 하루 앞으로 다가왔는데 구성이나 논리가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다. 차라리 자료가 형편없었으면 과감하게 쳐내고 필요한 부분만 가져다 쓰면 되었을 텐데, 허술한 논리와 반비례하게 장표 각각에 들어간 공수와 퀄리티는 너무 높아 차마 손댈 수가 없는 느낌이었다. 나라면 그래도 고생 많으셨다, 라는 말을 먼저 했을 것 같은데 피엠은 혹독한 평가를 쏟아냈다. 디자이너는 이렇게 결과물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며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다"고 했다. 피엠과 디자이너는 다행히 내일 보고가 실무진 대상이니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고, 경영진 보고 때까지는 조금 더 다듬어 보기로 했다.


집에 가는 택시를 기다리며

디자인 리뷰가 끝나니 밤 9시가 되었다. 그때부터 우리들은 또 컨베이어 벨트처럼 각자 맡은 장표를 열심히 쳐냈다. 채워야 할 장표의 틀은 잡혀 있고, 우측 상단에는 이름이 적힌 딱지가 붙어있다. 내 이름이 적힌 장표를 하나씩 쳐 나가고, 내 것이 끝나면 남의 것을 도와준다. 애초에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이 큰 의미는 없다. 착수 시점에 적당히 나눠놓은 것일 뿐이므로 결국 다 같이 할 수밖에 없다.


좋게 보자면 팀워크 안에서 움직이는 거지만, 나쁘게 보자면 업무 효율성이 최대는 아닐 수 있다. 내 일 네 일이 구분이 없기에 내 일을 빨리 끝냈다고 집에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이어받아서 해야 한다. 데드라인은 정해져 있기에 내가 못하면 내 옆 사람이 해준다. 일머리가 좋아서 빨리 하는 사람은 더 많은 일을 하게 된다. 누군가 적당히 시간만 때우고 있다면 다른 팀원들이 더 고생을 하게 되는 구조다. 팀원이 몇 명 안 되기 때문에 눈에 띄는 무임승차자가 발생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장점이 있다면 언제 오프를 하더라도 딱히 인수인계를 해야 할 일은 없다. 팀원 모두가 싱크가 맞춰져 있고 프로젝트 보고자료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업무에 대해 알고 있기에 본인이 작업한 자료가 어디 있는지만 알려주고 가면 나머지는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오프를 2주 앞두고 있으니 이제 무얼 해도 그다지 힘들지 않고 견딜만하다. 이러나저러나 2주만 버티면 내 입장에선 프로젝트가 끝나기 때문이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나오면 당분간은 본사에서 제안 업무를 하게 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젝트에 투입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여유가 있을 거라 기대하며 이 시간을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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