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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Oct 31. 2018

능금 빛 유혹

소백산자락길 11,12 : 과수원길~올망길~수변길~자재기길~서낭당길

  때를 맞추는 일이 참 어렵다. 지금쯤 단풍이 절정이겠거니 하고 가면 좀 이른 것 같고, 한 주 두 주 미루다 단풍 명소라는 곳을 찾아 나서면 속절없이 저버린 단풍들 때문에 아쉬움을 안고 돌아오기 일쑤다. 그런 까닭에 단풍의 절정을 보려면 마침 비가 오는 일이 없어야 하고, 주말 일정이 비어 있어야 하고, 이런저런 어긋나는 일이 없어야 적기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비단 단풍뿐이겠는가. 벚꽃 구경도 그렇고, 산등성이의 억새들도 그렇고, 제철 맞은 먹거리들도 그렇다. 나는 비교적 그런 때를 잘 못 맞추는 사람이라 아내한테 핀잔도 많이 듣는다. 직장에 매여 사는 탓이 크겠지만 이리저리 재는 일이 서툴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까지도 멀쩡하다가 하루 저녁 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길바닥에 뒹구는 낙엽들을 보면 가을의 아름다운 자태는 믿을 수 없이 짧은 것이다.   


  10월의 마지막 주말,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도 있는데 지금 아니면 또 때를 놓칠 것 같아 미안함을 무릅쓰고 소백산 자락에 섰다. 연두를 보며 걷던 5자락을 마치고 겅중 건너뛰어 마지막 11,12 자락을 먼저 걷기로 한 것은 순전히 사과 때문이었다. 단풍으로 치자면 구인사 쪽이 훨씬 나을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 사과밭이 더 보고 싶었다. 그것 또한 때를 놓치면 휑한 빈 가지만 볼 것이었다. 사과밭에서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어있다는 시인의 감성을 느껴보고 싶고 사과마다 달린 편종 같은 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추운 겨울에 제주에서 만난 감귤들과 지리산에서 만난 홍련 같은 대봉들을 보아온 까닭일 것이다. 잘 익은 과실을 본다는 것, 나의 것은 아니지만 풍성함과 넉넉함으로 채워진 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풍경이 아닐 수 없다.   

  11자락의 시작점이 부석사라서 좋았다. 사람 풍경도 싫지 않지만 호젓한 산사의 가을 아침이 고즈넉해서 더 좋았다. 울긋불긋 물든 나뭇잎들과 잘 익은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밭을 따라 일주문에 들어섰다. 어디선가 편종 소리가 들리고 풀벌레 울음 같은 독경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였다. 고요하고 엄숙한 돌계단을 올랐다. 몸과 마음이 저절로 세속의 옷을 벗는 느낌이 들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안양루 앞으로 펼쳐지는 저 화엄의 바다를 이처럼 바라보는 적이 있었던가. 짧은 순간 나는 내가 한없이 깊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내 삶의 가을날 끄트머리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또한 앞을 바라보는 일보다 뒤를 돌아다보는 일에 더 익숙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그리움일 게다.    

  무량수전을 뒤로 한 채 속두들로 향했다. 마침 사과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라 부석사 주차장 넓은 터에는 부스를 설치하느라 분주했다. 아이러니하게 예기치 않게 때를 맞춘 사과축제였지만 거기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큰길을 벗어나 들길로 접어들자 좌우가 온통 사과밭이었다. 올해는 유독 가뭄이 심했는데 그걸 이겨내고 붉게 익어서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를 보고 있자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마트에 갈 때마다 과일값이 비싸다고 불평한 내가 무안했다. 꽃과 열매 사이에 오간 수많은 밤과 낮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채운 바람과 비와 햇살들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사과는 그걸 붉은 한 알에 저장한 채 오롯이 절 한 채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소백산예술촌, 숲실, 사그래이까지 과수원길이라 명명된 6킬로미터 구간은 그야말로 능금 빛 유혹에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한 알만 먹자.”

  “안 돼.”

  “떨어진 건데 어때?

  “그래도 안 돼.”    

  아내는 농담 삼아 그랬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나도 먹고 싶은 유혹을 참기 어려웠다. 길 위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서 보면 멀쩡한 것도 있었다. 바지에 쓱쓱 문질러서 한 입 아삭! 베어 문들 누가 볼 사람도 없고 나무랄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주운 사과를 다시 밭으로 되돌려주었다. 하나 정도야 어때? 할 수 있지만 주인의 허락 없이는 안 될 일이었다. 내가 조그만 텃밭을 경작해보니 농작물 어느 것 하나 손길과 정성이 안 가는 게 없었다. 소백산 자락길을 걷기 시작하며 봄날에 보지 않았던가.     


  전지를 해 주고 

  거름을 주고 

  무성한 꽃을 솎아주어서 

  네가 

  이렇게 있는 거야     

  농익은 가을 숲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능금 빛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견뎠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사과밭이 길을 풀어놓고 그 길 끝에 마을을 거느리고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나는 감탄사를 연발해대며 사과나무 한 그루만 갖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냈다. 고목나무가 찢어질 만큼 사과를 매달고 있는 걸 보며 자연의 위대함을 느꼈다. 그 생산성이라니.     


  모산을 빠져나와 단산저수지에 이르러 수변길을 따라 걸으며 땀을 식혔다. 해가 어느새 중천을 지나가고 있었다. 11자락을 마치고 좌석 마을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망설였다. 이어서 12자락을 걸을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마치고 돌아갈 것인지. 돌아가자면 소수서원에 승용차를 두었으니 버스로 두 번 이동하면 가능할 일이었다. 그러나 8킬로미터 정도를 남겨두고 다른 날 다시 와서 한나절 걸어야 할 요량이라면 마저 걷는 게 좋겠다 싶었다. 아내나 나나 누군가 분명하게 주장을 하면 좋을 일인데, 이럴까? 저럴까? 하다가 결정하고 보면 대게는 그 결정에 욕심이 들어간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그래왔다. 옳은 결정이길 기대하며 자재길에 들어섰다. 안내 지도상으로는 분명치 않지만 고개가 두 개 정도, 평지가 아닌 숲길일성 싶었다. 가늠할 수 없는 일이란 때로 희망보다 절망에 가까울 수 있다. 그것이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단풍 든 숲의 아름다운 풍광도 잠시였다. 몇 시간 동안 숲을 통과해 갔던 강릉 바우길, 혹은 지리산 둘레길의 적막감이 펼쳐졌다. 끝없이 이어지고 이어지는 숲길. 바스락거리는 가랑잎 소리가 어느 순간 폭설처럼 느껴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마치 긴 슬럼프에 빠져있는 기분을 들게 했다. 삶이란 때론 이럴 거다. 아름답지만 느끼지 못하면 무용지물에 불과한 것이고, 얻고자 했으나 얻고 나니 진정 원하던 것이 이것인가 하고 의심이 들고. 나는 아름다운 가을 숲에서 마침내 자연으로 돌아가는 나무들의 회귀를 떠올리며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조잘거리던 아내도 나도 말이 없어졌다. 힘들다는 증거였다. 좌석 마을에서 그만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최근에 운동도 하지 못해 체력도 방전되는 느낌이었다. 기껏 여섯 시간 정도인데 이 정도라니 대청봉, 천왕봉이 이미 그림의 떡이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금이 당기고 무릎이 아파서 내리막길에선 고통스러웠다. 예전보다 더 빠른 시간에 느낀 증상이었다. 이래서 무릎 성성할 때 여행 다녀야 한다고 아내에게 한탄스럽게 얘기했다. 더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무엇이 중요한지 알겠느냐고. 그것은 내 자신을 향한 넋두리였다. 능금 빛 유혹도 어느새 사라지고 바짝 시들은 사과껍질처럼 두레골, 성재를 넘어 점마 마을에 도착했다. 부석사에서부터 불던 쌀쌀한 바람이 좀 더 날을 세운 상태였다. 지팡이를 짚은 등 굽은 노인이 밭에서 무 서너 개를 뽑아 옆구리에 끼고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굴뚝에서 연기가 푸르게 날리는 걸 보았다. 산간 마을 이곳에도 저녁은 오고 단란한 가족의 식사가 있고 또 내일이 있을 것이었다. 내 몸이 고단하지만 이걸 그리움이라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사과나무든 사람이든 그들의 여정을 좇아가면 하나의 빛깔이 되고 하나의 향기가 된다.  

    

 나는 가고 너는 남아 해마다 다시 돌아오는 그 길목에 그리운 이여. 스스로 빛이 되고 향기가 되는 그리운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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