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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Jan 03. 2019

아주 오래된 가르침

해파랑길21(영덕블루로드 B코스): 해맞이공원~축산항

  도화지 한 장을 펼쳐놓고 반쪽은 바다, 반쪽은 해로 가득 채운 그림이 있다면 분명히 그 그림은 영덕 블루로드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겨울의 찬 공기가 미세먼지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청명한 햇살을 드리운 영덕의 바다는 온몸의 세포를 깨어나게 했다. 지난주에 다녀온 대부도 해솔길은 아쉬웠다. 도로와 인접해 있고, 좀처럼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문명의 때가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길이라면 모름지기 자연에 가까워야 하고 어느 정도 기대감이 있어야 걸고 싶은 마음이 난다. 길 맛이라고 해야 할까. 길마다의 고유한 리듬이 느껴져야 한다.    

 

 12월 30일, 영덕 해맞이 공원에 서서 동해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탁 트이며 내가 걸어야 할 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찼다. 길을 자주 걸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알 수 없는 ‘벅찬’ 느낌. 그것은 마치 정말 먹고 싶었던 음식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과 다름 아니다. 온통 파란 하늘과 그보다 더 짙은 바다와 푸른 솔숲 그리고 고명처럼 얹힌 작은 항구가 영혼의 맛있는 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경주 지진, 포항 지진을 떠올려 보면 이곳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몰랐지만 실제로 다음 날 영덕에 지진이 있었다고 한다). 언제고 그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어 해파랑길 경상도 구간을 조금 꺼려했다. 하지만 새해 일출을 해파랑길 중 가장 아름답다는 영덕 블루로드에서 맞이하고 싶었다. 결혼 35주년이라는 뜻깊은 날이었으니 말이다.    


  한반도에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까닭인지 영덕 바닷바람도 찼다. 해파랑길 표식을 따라 해안 데크 길에 내려서니 약속바위에 이르렀다. 신돌석 의병장이 이 약속바위 앞에서 아내와 가족들을 반드시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칠보산에 은신시켜 화를 면하게 하고, 자신은 돈에 눈먼 사촌들에게 암살을 당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었다. 이곳에서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면 전설 같은 사랑이 이루어진다니 그저 지나길 일이 뭐 있겠는가. 아내와 나는 새해도 웃으며 건강하게 살자고 약속했다. 그래도 시인인데 결혼 35주년을 기념하며 멋진 멘트 하나쯤 준비하고 있어야 했는데 무심코 그 말이 튀어나왔다.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은 입속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늘 사용하는 말이거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거나 누구에게 가장 먼저 해주고 싶은 말 중 하나다. 어찌 보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 확신 같은 것이기도 하다.  

  

  내 마음이 그랬다. 며칠 전 누나의 전화를 받고 그 마음이 계속 머물러 있었다. 전화기를 통해 울먹이는 소리가 마치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어둠을 퍼 올리는 소리처럼 무겁고 깊었다. 자신의 병을 한탄하며 신심 깊은 기도로도 치유하지 못하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하소연 했다. 그러면서도 자식들 걱정을 한가득 하고 있었다. 자식들은 결코 그 마음을 그대로 읽어주지도 못하는데 누나는 꺼져가는 등잔불 밑에서 침침한 눈으로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는 듯했다. 암이라면 수술이라도 하면 될 텐데 수술도 할 수 없어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나 역시도 누나의 그런 마음을 어떻게 다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막연히 짐작만 할 뿐. 가정이 아닌 실제로 내 삶이 꺼져가고 있다고 느낄 때 나는 어떤 상태가 될지 알 수 없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과 이웃과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내가 사라져가고 있다면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하소연 할 것인가. 비단 누나의 이야기만 아니다. 이 세상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건강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어디 있을까.    

 먼 곳으로부터 밀려와 해안 바위에 부딪혀 하얀 불꽃처럼 터지는 파도가 아름다웠다. 수십억 년 해류를 따라 흐르다 연안에 이르면 무섭게 뭍으로 기어오르려는 아우성, 그리고 그것을 견디는 바위들의 모습이 경이로웠다. 기암괴석과 형형색색으로 늘어선 바위에게 파도는 성찬일까, 시달림일까. 날카롭던 바위들이 파도에 아주 조금씩 닳아져갈 때 그리하여 둥글어질 때, 바위는 기쁠까, 아니면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할까. 세월을 견디는 일이란 자신을 깎아 가장 단순한 모양으로 바꾸어가는 일이다. 그러나 원만하게 둥글둥글 살아가는 일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한번 뿐인 인생인데 모가 나면 어때? 자기 개성대로 사는 거지. 타인들에 맞춰 둥글게 살아야 할 이유가 뭐냐고 반문하면 딱히 설득할 논리가 없다. 어떻게 살든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가치관대로 살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난 가끔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 나도 그런 시절을 지나왔지만 대체로 기억이 없다. 무슨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는지. 오보해변에서 아이 하나가 긴 그림자를 거느리고 파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발자국을 보니 신중함이 몸에 배인 아이 같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아이는 자연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평화로워지는 기분을 느끼지는 않을까. 나는 그랬던 같다. 무엇인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곤충 한 마리도 그랬고, 개울가에서 흐느적거리는 물풀도 그랬고, 오두막집 낙숫물도 그랬고, 뒷동산에 올라가 공중에 쏜 화살이 풀밭에 꽂힐 때까지 긴 궤적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모든 것들이 평화로운 일이었고 내 인생도 그런 평화로움 속에서 펼쳐지길 바랐던 것 같다. 추운 날 힘들게 길을 걷는 이유도 거기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먹먹해지도록 푸른 바다를 끼고 걸었다. 지난여름 폭우가 할퀴고 간 산사태의 흔적을 간간이 지나치며 작은 어촌마을 항구에 이르렀다. 매듭 하나가 유난히 눈을 끌었다. 배를 매어둘 때 절대 풀어져서는 안 되지만 풀려고 할 땐 쉽게 풀어져야 하는 것이다. 풀어지지 않아야 하고 풀어져야 하는 것은? 하고 묻는 수수께끼 같았다. 줄도 질서정연한 어떤 질서를 따라가면 유용한 도구가 된다는 것을 누가 처음으로 알아냈을까. 나는 오래된 가르침 앞에서 친구를 떠올리고, 동료를 떠올리고, 지인들을 떠올렸다. 사람들 관계도 매듭처럼 그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만남도 어렵지만 이별은 더 어려운 일이다. 질서 없이 얽히고 그렇기 때문에 풀 수 없는 관계도 허다하다. 돌이켜보니 나 역시도 그런 일로 마음을 상한 일이 부지기수다. 그런 게 삶이겠지만 말이다.    

 

 삶은 어디에나 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이 살고 있고 누구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때로는 견디는 일이 되기도 한다. 온몸을 짜내며 마지막 영혼을 채워가는 과메기를 보고 있자니 그들의 삶도 다르지 않은 듯했다. 그냥 왔다가 간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모든 기억으로부터 있다가 사라진다. 늘 비워져가는 기억 창고가 아쉬워서 우리는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여행담을 나누는 것이 아니겠는가. 뜻밖에 마주치는 아름다운 풍경들이 생명력이 길겠지만 아주 소소한 것들도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경우가 있다. 그런 기억들이 좋아서 나는 길을 사랑한다. 다듬어진 길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으로 오롯이 이어진 길 말이다. 

 작은 어촌 마을 항구에는 선주가 직접 잡았다는 대게가 수족관마다 가득했다. 어느 과수마을의 사과나 복숭처럼 대게들도 이곳의 선물이었다. 심해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대게들이 수족관에 갇혀 서로 엉켜 있는 것이 뭐가 아름답겠는가. 하지만 사람이란 이런 광경을 보고도 입맛을 다시는 존재다. 탐욕스럽지만 않다면 나는 그들에게 죄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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