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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Jan 06. 2019

그저 앞을 향해 나아가지만

해파랑길22(영덕블루로드C) : 축산항~고래불해변

  아침 식사를 ‘물가자미 매운탕’으로 했다. 전날 택시를 타고 해맞이공원에 가면서 택시기사님께 물어둔 곳이었다. 현지인이 추천해준 집이라 신뢰가 갔다. 비리지 않은 물가자미의 흰 살도 좋았지만 깊은 육수의 맛이 느껴지는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여행지에 가면 대부분 맛집을 찾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검색만 하면 주르륵 뜨는 맛집을 누가 외면하겠는가. 나도 몇 번인가 일부러 맛집을 찾아 헤맨 적이 있었다. 호기심 때문이었지만 대부분 실망하고 말았다. 맛이 문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탓에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을 수 없고, 무엇보다 여유를 갖고 식사를 할 수 없었다. 맛을 찾아갔는데 맛을 버리고 온 셈이랄까. TV에 뜨고 SNS에 오르면 하루아침에 맛의 성지로 탈바꿈하는 현실이 썩 달갑지는 않다.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돈가스집의 번호표를 타기 위해 밤샘을 해야 한다는 기사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맛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다녀왔다는’, ‘먹어봤다는’ 일종의 허영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식가가 아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둘째 날 걸어야할 코스를 검색해보니 축산항에서 대소산 봉수대, 괴시리 전통마을까지는 산길, 그곳에서부터 대진항을 거쳐 고래불해변까지는 해안도로였다. 대략 16.3㎞에 6시간 정도. 어제 걸었던 블루로드 B코스는 전체가 바닷길이어서 산길을 걷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밤새 건져 올린 오징어들을 하역하고 있는 아침 항구는 고요하면서도 싱싱했다. 정박해 있는 배 위를 분주하게 나는 갈매기들 날개 사이로 아침 햇살이 반짝였다. 편의점에서 물과 간식거리를 준비하고 대소산 봉수대를 향해 올랐다. 초입에서 몇 걸음 옮기자 다리가 뻐근했다. 장거리 트레킹을 하다보면 둘째 날 아침이 제일 힘들다. 여독도 있겠거니와 첫날 무리한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오르지 않아 땀이 흐르고 간간이 다리쉼을 해야 했다. 익히 나의 체력 상태를 아는지라 무리를 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걸었다.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하늘 좀 봐.”

  “와, 이런 하늘을 어디서 봐?”

  “미세먼지가 하나도 없잖아.”

  “그러게.”

  “우리가 지금 허파 샤워를 하는 있는 중이야.”

  “그러게.”  


  하찮은 말 한 마디를 건네다 보면 대화가 길어진다. 인적이 드문 길을 단둘이 가는 까닭에 시큰둥해질 수 없다. 좋든 싫든 맞장구를 쳐야 이야기가 이야기를 물고 나온다. 지루하지 않고 걷는 재미가 배가 되는 것이다. 나는 지인들에게 길 걷기를 자주 추천하곤 한다. 특히나 부부간에 함께 걸어보라고 강권을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배우자에게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가정의 크고 작은 걱정거리들이 화제의 앞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그런 대화는 오래 가지 못하고 서로의 감정이 상하기 일쑤다. 허파 샤워 이야기를 하다가 추억이었는지 감정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내와 나는 호젓한 산길에서 박새처럼 입을 맞추었다.  

  대소산 봉수대에 올랐다. 보존 상태가 좋아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했다. 그러나 봉수대의 가치보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훨씬 가치 있어 보였다. 짙푸른 동해를 배경으로 축산항과 죽도산 그리고 멀리 풍력단지를 거느린 풍경이 탄성을 자아냈다. 뒤를 돌아보니 영해평야가 낙동정맥을 병풍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허파 샤워를 하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기분이랄까. 청량감이 온몸을 감싸고돌았다.    

  산길은 돌고 돌아 괴시리 전통마을까지 이어졌다.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 선생의 생가가 있는 곳이자 조선 시대 전통가옥들이 고색창연한 영양 남씨의 집성촌이 있는 곳이었다. 기념관은 아쉽게도 휴관이었다. 붉은 산수유 열매며 시든 연잎들이 여행자를 반겼으나 풍경소리만큼이나 고적했다.     


  언제 뒤따라왔는지 그들이 우리를 앞질러갔다. 봉수대에서 마주쳤던 젊은 커플 두 쌍이었다. 젊은이들이 길을 걷는 게 유달리 보여서 좋았다. 승용차를 타고, 관광지를 누비며, 멋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맛집을 순례하는 것이 젊은이들 여행법이 아닌가. 누구나 힘들게 걷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뚜렷한 목적이 없다면 힘든 일이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그렇게 걷고 있다니 반색할만한 일이었다. 길을 걸으면서 사람들을 만나면 대부분 어떤 체취가 느껴진다. 초행인지 아니면 길꾼인지 아니면 정말 순례를 하는 사람인지 구분이 가는 것이다. 그들은 초행과 길꾼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색 기념관 같은 것에 관심이 없고 전통마을의 모습도 별 관심 없이 곧장 앞을 행해 걷고 있었다. 처음엔 나도 그랬다.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걸을 뿐이었다. 의미 있는 것들이 그냥 스쳐지나갔다. 진정한 길 걷기란 길 위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고 또 다른 삶을 만나는 것이다. 어디까지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가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참 어려운 일이다. 목적지를 버린다는 것이, 무엇보다 놀면서 쉬엄쉬엄 걷는다는 것이. 한번 걷기 시작하면 다리에는 동력이 생기고 그 동력은 웬만해선 멈추지 않는다. 그저 앞을 향해 나아간다.    

  젊은 그들이 그냥 지나친 대진항에 이르러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어부들을 보았다. 차갑고 맑은 햇살 아래서 고요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손의 슬하에 몸이 있는 듯이 보였다. 몸에 밴 일상의 모습은 숭고하게 느껴진다. 생활의 달인을 보며 경외감을 느끼는 것과 흡사하다.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 살아내야 한다는 것, 삶의 의무이자 축복이다. 하지만 삶이 나를 지치고 힘들게 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가. 나는 길을 걸으며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다시 확인하곤 한다. 감사한 일이다. 두 발로 걸을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고, 돌아갈 수 있는 집과 가족이 있다는 것.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여기서 멈춘들 후회가 없다면 진정 잘 살아온 것이 아닌가. ‘버릴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는.’는 박경리 선생처럼 나의 노후도 그랬으면 좋겠다.  

  대진해변에 파도가 높았다. 하얀 말들이 갈기를 세우며 광활한 초원을 달려오고 있었다. 겁도 없이 달려들어 모래사장에 하얗게 드러누웠다. 파도는 그렇게 먼 곳에서 달려와 내 앞에서 스러졌다. 저런 파도를 보고 공포를 느꼈던 곳이 부산 태종대였을 것이다. 열대여섯 시절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대한 바다를 보고 바위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았던 것이다. 알 수 없는 자연 현상 앞에서 가출한 내가 얼마나 초라했던지...  

   

  해안은 대진에서 고래불로 이어지고 있었다. 국민야영지라는 고래불야영지에는 추운 겨울임에도 야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카라반에서도 가족들이 걸어 나왔다. 자기만의 즐거움을 찾아 산다는 것, 요즘으로 이야기하면 ‘소확행’쯤 되겠다. 대진항에서 보았던 어부들에게 감히 소확행이 무엇이냐고 물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 주위엔 소확행을 즐기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 세상에 빈부 격차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가.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 절망감과 행복감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색 선생이 상대산에 올랐다가 고래가 뛰어노는 걸 보고 ‘고래불’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해지는 고래불해변. 저 멀리서 고래 한 마리가 ‘타-앙’ 꼬리로 바다를 가르며 먼 대양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고래에게도 꿈이 있다면 우리와 같이 먹고 사는 문제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극을 가로지른 탐험가처럼 오대양을 단숨에 돌아오는 꿈이 아닐지 모르겠다. 내 품에도 고래 한 마리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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