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 1. C. 이 글의 목적2: 법의 지형에 대한 이해
당신이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
프로젝트를 준비해오고 있는 현업 실무자인 여러분은 (겸손하게도 부정하시겠지만) 세상에서 프로젝트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프로젝트를 공에 비유하자면 공의 모양, 소재, 탄성, 바람을 넣는 약한 부분 등을 공을 만든 사람이 가장 잘 아는 셈입니다.
프로젝트의 상대방은 누구인지, 진행하면서 예상되는 문제상황이 무엇인지, 문제상황에서 가장 화가날 사람은 누구인지 등. 사내변호사가 문서를 바탕으로 겨우 추측할 만한 사항도 직접 그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사람에게는 호흡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지식입니다.
그런데 독자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법에 대한 감각입니다. 공에 대해서는 완전한 지식을 자랑하지만,
법의 지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을 바닥에 두었을 때 그것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현업 실무자들의 아쉬운 점일 것입니다.
내 프로젝트,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프로젝트의 운명은 핀볼게임의 핀볼과 같습니다. 힘차게 날아오르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고, 도랑으로 빠져버리기 일수니까요. 핀볼을 오래오래 활성화시키려면, 가열차게 스위치를 눌러서 핀볼을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의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특정 스팟을 특정 각도로 부딪히면 그 핀볼을 그대로 도랑으로 직행할 수 있으므로 이른바 죽음의 스팟은 건드리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프로젝트가 위법이 된다는 것은 핀볼이 죽음의 스팟을 건드린 것과 같습니다.
핀볼게임의 지형을 어느 정도 아는 것이 핀볼을 오랫동안 지키면서 높은 점수를 얻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물론 독자분 중 누군가는 핀볼이 하도 빨라서 지형을 알고 있어도 빨리 죽는다고 하소연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눈을 감고 핀볼게임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상한 사람이라서 자주 해봤는데, 놀라울 정도로 빨리 죽을 수 있습니다.
법의 지형을 전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그 분은 눈을 가린채 핀볼게임을 하는 셈입니다.
법의 지형
전편에서 말씀드린 리걸마인드의 완성은 '법의 지형'에 대한 이해로 이루어집니다. 법의 지형이 무엇이냐구요? 지형에 대해서는 이미 학교에서 배워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우리나라 한반도에는 위아래로는 태백산맥이 뻗어있고 좌우로는 군사분계선이 그어져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면 이 사실을 모르기 힘들죠.
그런데 법에도 이러한 지형이 있습니다. 법의 지리에도 태백산맥과 군사분계선이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민법'과 '형법'입니다.
비유하자면 민법은 태백산맥이요, 형법은 군사분계선입니다.
태백산맥은 넘어가면 돌아오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민법도 그가 정한 선을 넘어가면 돈을 많이 들여야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희소식은 돌아올 순 있다는 거죠, 돈이 좀 많이 든다는 것만 뺴면.
군사분계선은... 넘어가면 글쎄요 돌아올 수 있나요? 형법은 그가 정한 선을 넘어가면 감옥에 갈 수 있습니다. 즉 돈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세계로 입성한 셈입니다.
둘다 넘어가면 인생이 고달파지긴 마찬가지이므로, 각 법이 정한 위치를 대략적으로 가늠하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법적 지형을 알고 있다는 것은 프로젝트에 적용될 가능성이 높은 법이 정한 선의 위치와 방향을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민법은 태백산맥,
형법은 군사분계선
이 글에서 법적 지형을 다루는 방법
태백산맥과 군사분계선을 안다고 말하기 위해 많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법적 지형을 아는 데에도 많은 양의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일상에서 지리 지식보단 방향감각이 더 중요한 것처럼, 지식의 양보단 감각이 더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최소한의 지식으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법의 지형의 실제 모습을 네이버 지도로 비유하자면 다음 그림과 같습니다. 위성사진과 도로에 지적편집도, 날씨, CCTV, 교통상황 등 수없이 많고 복잡한 레이아웃이 겹쳐져 있습니다. 국회가 만든 법 위에 대통령이 만든 시행령이 쌓이고, 총리가 만든 시행규칙이 쌓이고, 그 다음엔 공정거래위원회와 같은 행정기관이 만든 행정규칙이 쌓이고, 판사들이 개별 사건에서 끄적인 판례들이 또 쌓여서 만드는 것이 법의 지형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머릿속에 다 넣을 수 없습니다.
조금 거둬내면 약간 덜 복잡한 그림이 나옵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말하면, 특정 분야에서 오랫동안 자문을 제공해온 전문가 변호사들은 주된 날씨와 도로들 정도는 머릿속에 어렴풋이 집어놓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 정보들도 머릿속에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궁극적인 검토는 전문가인 변호사에게 맡깁시다.
모든 정보를 거둬내면 깨끗한 위성사진이 나옵니다. 별 정보는 없습니다. 단지 강이 어디에 있고, 섬이 어디에 있으며, 산이 어디에 있다는 정도입니다. 우리가 법의 지형에 접근하는 태도는 위성사진과 같습니다. 정확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한눈에 따라그릴 수 있는 정도의 지식. 한 장의 경사지도. 그것이 이 글에서 추구하는 내용입니다.
여기는 기울어져있구나. 공을 놓으면 저기로 데구르르 굴러가겠구나.
여기는 분화구네. 공을 놓으면 화산 폭발로 공이 즉시 공중분해되겠구나.
이정도의 감각을 갖출 수 있다면 이 글의 목적은 달성한 셈입니다.
정확성은 떨어지지만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한 장의 경사지도
민법과 형법의 위치
앞에서 다룬 민법과 형법의 법의 지형을 살짝 살펴볼까요. 아까 말한것처럼 민법은 넘어가면 돈을 뺏지만 형법은 넘어가면 몸을 엄한 곳에 가둡니다. 판결문으로 말하자면 민사소송은 판결 주문이 "A는 B에게 천만원을 지급하라"이지만 형사소송은 판결 주문이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입니다.
그럼 여러분 입장에선 민법이 더 무섭나요 형법이 더 무섭나요? 저는 형법이 더 무섭습니다. 돈은 다시 벌면 되니깐요. 그래서인지 로스쿨 시절 친구들은 장난식으로 민법은 '법의 왕'이지만 형법은 '형님법'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민법이 위엄있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형님은 주먹을 행사할 수 있는 형법입니다.
고상한 말로 말하자면 민법은 재산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형법은 신체의 자유를 제한합니다. 재산의 자유보단 신체의 자유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즉 형법은 보다 중요한 자유를 제한하는 법인 셈입니다.
법의 지형에선 (시민의 자유를 보다 보호하기 위해) 중요한 자유를 제한할 수록 적용될 수 있는 범위를 좁게 허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법이 금지하는 범위가 민법에 비해 훨씬 더 좁습니다. 요컨대 형법은 사회에 해악을 끼친 정말 나쁜 놈만을 대상으로 그 놈이 움직일 자유를 빼앗는 법입니다.
그래서 민법과 형법의 백지도를 그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민법을 넘어가긴 보다 쉽지만 형법은 어지간해선 넘어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 범위를 가능한 좁게 설정해놨기 때문입니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법의 지형
법의 지형은 간단하지만 잘 기억해두면 뉴스를 보거나 세상 만사를 보면서 법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뭔가 나쁜 놈인것 같은데 형사처벌이 불가능하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처벌할 조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답답하실 수도 있겠지만, 위에 그림을 다시 한번 보십시요. 그러면 위와 같은 기사가 그리 이상한 상황은 아닙니다.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실무자분들이 형사처벌을 두려워하지만, 실제로는 형사고소 사건보단 손해배상청구 사건이 훨씬 더 빈번합니다.
법의 지형의 가장 대표라 할 수 있는 형법과 민법을 살짝 맛보았습니다. 다음 챕터부터는 프로젝트에 적용될만한 대표적인 법령들의 지형을 각각 살펴보겠습니다.
당신의 프로젝트가 누군가와의 약속을 깬다면(민법)
당신의 프로젝트가 누군가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면(노동)
당신의 프로젝트가 로고를 사용한다면(상표)
당신의 프로젝트가 누군가의 작품과 유사하다면(저작권, 특허)
당신의 프로젝트가 사람들의 연락처를 활용한다면(개인정보)
당신의 프로젝트가 쇼핑몰이라면(약관, 전자상거래)
당신의 프로젝트가 플랫폼이라면(통신판매중개)
당신의 프로젝트가 왠지모르게 갑질이란 느낌이 든다면(공정거래)
당신의 프로젝트가 대기업의 프로젝트라면(공정거래)
당신의 프로젝트를 하도급한다면(하도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