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명감이 생기면 가고 싶습니다

by 신지승

대학 2학년 1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 뒤 휴학을 결정했다. 당시 대학의 분위기는 투쟁의 대열에 참여하든가 아예 무시하고 공부만 하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

그 정신적 분열을 감당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집회 때마다 다른 의견을 내다보니, 따가운 눈총을 견뎌내기 힘들었다. 겨우 1학년이었지만, 나를 보듬고 나지막하게 토론을 이어갈 선배도 없었다.

하나의 생각대오에 서든, 말든 그 선택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게도 휴학을 하고 등사기를 사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먼저 등사용 원지에 철필로 글씨를 쓰고 롤러에 잉크를 바르고, 눌러서 복사를 하는 방식의 등사기는 그 시대의 시위를 할 때 필수 도구였다.

등사기로 말한다는 80년대 시위 문화에 대한 어떤 저항과 절망을 등사기를 사는 것으로 표현 한것이다. 통일과 혁명은 가능할까?’ 그 당시 탄허스님의 정역 기반의 예언서도 , 제3의 물결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미래의 예언을 구했다. 아마 실연 사건도 한몫했을 것이다. 자기 정체성의 혼란과 위기는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법인데, 나는 결국 대학이라는 지옥 같은 공간을 박차고 나와 버렸던 것이다.

입영열차.jpg

휴학 후 신체검사를 받았고, 현역 입영 대상자로 징집영장이 나왔다. 사실 군대란 사명감으로 가는 이들보다, 국가에서 가라고 하니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982년 3월 18일, 대학생들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미국의 역할에 항의하며 부산 미문화원에 불을 지른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의 영향으로 인해

반정부·반미 분위기가 극에 달했고 , 당시 친구들은 군대입대를 최대한 늦추거나 6개월 복무하는 학사장교 시험 총을 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총 들기를 거부해야 하는가는 분단의 운명 앞에서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질문일 것이었다. 1980년대 대학에서는 ‘강제 징집’'녹화사업'이라는 것도 있었다. 요주의 운동권 학생들을 사전에 징집했다.

또한 집회법 위반으로 시위에 참여해 구속될 경우, 주로 집행유예를 받게 되는데, 이 경우 군 소집이 면제되었다. 지금의 많은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구속 후 적당한 형을 살다 나오거나, 집행유예로 군 면제를 받은 경우가 많았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신지승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끄트머리국제마을영화제 집행위원장 -생활인과 공동창작 ,탈상업적 상상력의 대중창작시대 돌로 영화만들기 저자

7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16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8화 광주역에서 노숙기차를 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