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입학하고 동아리에 가입했다. 당시 대학은 실감 나는 현실 속에서의 '악'과 '적'이라는 개념을 나의 세계에 등장하게 하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지금의 나는 이것은 역사정치적 구조에 대한 입체적 시선을 가지게 하지 못하게 하는 극히 선과 악의 종교적 태도를 활용한 정치 전략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그건 내가 미처 공부를 하지 못하고 대학에 들어간 죄이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은 나와 다르게 역사 교양과 철학적 학습이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세상물정을 살필 수 없는 순진하고 멍청한 나 같은 수준의 학생들이 총체적인 지식 없이 그 정치적 증오의 함정과 늪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부끄러운 것이다. (지역간의 정치의식과 교육의 밀도나 격차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
어느 날 한 선배가 복사되어 간단하게 제본된 '순이삼촌'이라는 소설을 나에게 건넸다.
무고한 죄 없는 사람을 무참하게 죽일 수 있는 정치권력에 대한 편협한 증오가 시작되었다.
남로당의 단독선거 반대나 사회주의적 이념에 의한 전략 전술과 미국과 우익정치집단의 제노사이드 폭력에 대한 이해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부산에서 올라온 어린 20살이 마주한 '대학'과 '서울'은 감당할 수 없는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나는 5월 광주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80년 초에는 광주에 대해 접할 수 있는 비디오자료나 사진자료가 거의 없었다. 자료를 요구해도 선배들은 건네줄 자료마저 없었던 시기다.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통해 광주의 기록이 여실히 드러난 것은 1985년의 일이었으니
1980년 부산에서 당시 일간지에 사망자 명단이 신문 전면에 빼곡하게 나이와 직업을 명기한 신문을 꼼꼼히 읽었던 기억이 또렷했지만 그 죽음의 의미와 해석은 너무나 선배들과 달랐다.
광주역에서 어슬렁 거리다가 한 사람을 만났다
그와 함께 몰래 광주역 안의 정차 중인 기차에 올라가 막걸리를 마셨다. 지금은 가능하지 않은 어설픈 시대의 풍경이었다. 잠자는 기차 속에는 침대와 술마당이 갖추어져 있었다. 몇몇 소수만이 알고 누리는 밤의 공간이 1980년 초에는 가능했다니 지금 생각하니 신기할 뿐이다. 광주역 기차 안에서 막걸리 앞에 놓고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1980년 그때 광주는 어떠했나요? 나는 광주의 또 다른 진실을, 도서관이 아닌 정차된 객차에서 마주했다. 시민군과 계엄군과의 자세한 과정을 일개 시민이 알 수 도 없을 테이고 객관적일 수도 없었다. 그는 광주 인근의 소위 사창가 포주였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 무서웠고 살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은 생생하다. 그는 마치 친형처럼 역사 앞에서 냉정하기를 바랐다. 물론 그와 다른 시민군 출신의 사진작가 김향득작가와의 만남도 나에겐 귀한 인연으로 지리잡고 있다.
광주에서 제주로 갔고 우연히 한라산에서 같은 대학 의대 선배 2명을 만났다.
한라산 정상의 바람은 그날따라 거세었다.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바람에 몸이 밀려갔다. 한라산 어느 암자의 스님도 이런 바람은 처음이라고 큰 바위뒤에 오랫동안 숨어 있었다.
그런데 한라산에서 내려온 밤 여관에서 만난 일본 여행객 두 명이 우리에게 1980년 광주에 대해 물어 왔다.
특히 일본인이라는 것도 민감했고 해서 '자세히 모른다'라고 하자 그걸 모르는 우리가 더 이상 하다는 듯이 실망하였던 표정이 역력했다. 두 선배는 바로 경찰서로 행해 그 일본인을 간첩으로 신고했다.
그로부터 40년 뒤 나는 소설의 무대였던 제주 북촌리 마을의 경로당에서 그날 운동장에 서 있던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영화를 만들고 노래를 불렀다
그날 경로당을 찾은 남자는 4.3 당시 전쟁터 같았던 제주를 벗어나 오사카로 밀항한 사람이었다
" 우리가 그 난리통에 있어야 될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 밀항선을 타고 오사카로 갔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난 그게 역사의 답은 아니더라도 무력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했다. 북촌리에서의 시간은 내게 그런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정치적 명분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정의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말하는 물고기(정치적 결사체)와 물(민중) 당시 순장주의적 전략으로 임했던 남로당의 전략과 더불어 우익정치집단의 무자비한 소개전략도 비판적으로 바로 볼 수 있었다. 역사나 정치 또한 불가피한 상생적 적대관계라는 게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북촌리 마을에서 우리 아이들과 함께 보낸 1주일 당시 그 아이들의 나이었던 북촌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아주머니들을 만나면서 제3의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제주 4.3이 나고 제주 사람들은 우왕좌왕, 그야말로 낮에는 우익 밤에는 남로당의 세계에 살았다.
애초의 소수 무장대로 합류한 이들은 얼마나 될까? 생명에 집착한 사람들은 배를 타고 부산 영도로 , 오사카로 도망가는 선택뿐이었다 그것도 여유가 되는 사람에 한해서 나는 정의나 혁명이 아닌, 생존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정치적 명분이 늘 삶의 답은 아니다.’
내가 바람 부는 한라산 정상에서 바람을 피해 바위 뒤에 숨었다.
역사는 바람이다 , 맞붙어 싸우든가 피하든가. 그 선택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한다
정의와 혁명을 폄훼하는지 모르지만 정치가는 자신의 정의와 신념에 입각해서 투쟁해야 하며 평범한 민중들은 생명을 유지하면서 그 정치집단의 과정을 목도하고 기억해야 한다. 무고하게 생명을 위협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멈춰진 역사의 기차, 거센 바람 부는 곳에 서 있지 않도록 하지만 정치적 동원과 순장의 낡은 역사가 더 거세어질 듯도 하다. 나의 80년대 정치적 트라우마는 치료되었는가?
ps 나의 순이삼촌에 대한 글 https://brunch.co.kr/@top/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