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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의 용, 개천의 개구리가 되다

by 신지승

담 넘기

고등학생 2학년 때 김동길 교수가 부산 인근 여고로 시국강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연 시간은 수업이 마치기 전이었다. 고민하다가 학교 담을 넘었다. 당시 시국이 몹시 혼란할 때였고 김동길은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던 유명인사였다. 강연을 듣기 위해 학교 담을 넘는다는 것은, 이미 나의 기질적 씨앗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고 내 인생 항해의 작은 돛을 올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학교 담을 넘는 일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에도 학교 뒷담을 넘어 뛰어가면 10분 걸리는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돌아왔다. 도시락을 싸서 빈약한 반찬을 책상에 앉아 먹는 것보다 밥맛도 꿀맛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아이들은 학교 뒷담을 쉽게 넘어 다녔다. 문방구를 가기 위해 학교 뒷담을 쉽게 넘었다. 당시 학교는 통제도 약했고, 너그러웠고 안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어른 키보다 3배는 높은 학교 뒷담은 튼튼한 축대 위에 블록으로 올린 2단이었는데, 일단 첫 번째 담을 넘으면 아이들 키로 겨우 축대의 조금 튀어나온 걸림턱에 발이 닿는다. 그다음은 손을 잡고 담을 안고 미끄러지듯 뛰어내리면 되었다. 어떤 아이는 앉아서 앞으로 뛰어내렸다. 그때는 몇몇 아이들에겐 그런 소소한 모험이 일상이었다.

집에서 점심을 먹고 담을 넘어 학교로 들어왔는데 아이들이 리어카를 가지고 3-4명이 둘러싸고 놀고 있었다. 그러다 리어카의 뒤를 누르는 바람에 손잡이를 잡고 있던 한 아이의 턱을 타격했다. 이빨이 많이 빠져버린 대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멀찌감치 구경 중이었고 그 놀이패는 아니었는데 같은 반이라는 것과 같이 있었다는 죄로 인해 그 아이의 엄청난 이빨 치료비를 1/n로 분담해야 했다. 담을 넘은 대가는 가혹했다. 그때부터 학교 담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넘은 담은 정신적인 경계를 넘는 일이었다. 김동길 교수라는 한 사람이 촉발한 것은 정치와 물질이 집약된 세계와 서울이라는 갈등과 화려함의 공간, 지적 호기심에 대한 동경이 뒤섞인 것으로 어린 나를 움직였다. 김동길 교수는 내가 부산이라는 로컬의 담을 넘어 서울로 향하게 욕심을 촉발시켰다. 서울이라는, 소란한 중심과 물질적 성공의 상징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짜 만남이란 강연청중의 하나가 아니라 일대일의 만남이 아니면 그것을 만남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몇 년 뒤 서울 조선일보 논설 주간실에서 김동길 교수를 일대일로 대면하게 됨으로써 진짜 만남을 하게 되었다.

중심과 주변의 변증법

인간은 본능적으로 중심을 향해 떠나는 존재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심에는 권력과 자본, 모순과 영광, 사방에서 몰려드는 욕망과 파열음의 활력이 있기 때문이다. 중심에 마냥 서는 것도 그 자체로 새로운 시작의 지점이다.

로컬은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와야 한다. 비워지다 보면 공간도 다시 호흡을 얻는다. 중심과 주변의 양극화는 어쩌면 역사적으로도 필연적 과정이다. 언제나 중심과 대면하면서, 또는 중심을 떠나면서 개인의 서사도 색채가 화려해진다.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뒤로 서울의 개봉동 삼촌 집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반대편의 학교로 매일 서울을 버스로 횡단했다. 영등포역에서 여의도, 한강, 광화문, 동대문. 나는 매일매일 서울을 2-3시간씩 여행했다. 중학교 때 배운 변방의 작은 왕국에 살던 석가모니의 생로병사를 위한 출가나 고등학교 설교 때 들은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의 기나긴 예루살렘에 걸친 정신적 여정의 이야기가 그래도 살이 되고 피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작은 순간들의 대서사

되돌아보면, 인생이라는 개인의 서사는 거창한 순간이 아니라 초등학교 교실에서의 우연한 깨달음, 중학교의 친구의 농담과 성적의 강요, 고등학교 담을 넘던 그 낮의 바람 같은 순간들에서 잉태된다. 이후 내가 입었던 온갖 생각의 외투들은 결국 같은 기질의 옷장에 걸려 있던 다른 색깔일 뿐이었다. 기질의 몸은 그대로였고, 다만 생각의 덩치가 커졌을 뿐이다.

서울로 오자 나는 다양한 유명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지방에서 책이나 TV로 보던 것과는 다른 그냥 상대적으로 일상적인 문화이기도 했다. 로컬은 그래서 모든 만남이나 세상을 판타지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위치가 될 수도 있다. 로컬에서 TV나 책으로 만나는 것에는 판타지가 개입할 여지가 많아진다. 물론 서울에서 로컬을 바라 볼 때에도 동일한 법칙이 가능하다 . 중앙 미디어가 만들어 가는 로컬은 로컬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과 는 분명 다르기에 그 왜곡을 극복할 로컬이 생산하는 미디어는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그 각 각의 환상을 깨부수는 과정을 거쳤는지 모른다.

내가 다시 김동길 교수를 만난 시간은 당대의 젊은 학생들이 더 이상 그를 시대의 지식인으로 호출하지 않던 반미, 혁명의 시절이었다. 보수적인 신문 칼럼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칼럼을 써가던 시대 때였다.

어쩌면 대중들에게는 이전보다 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을 때였다. 유명과 명망은 그렇게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도 안 되는 것이다.

3년 정도 변방의 한 아이의 유명인사는 어느덧 아이에게도 명망의 변방이 되어버리는 변화는 불가피한 우리 모두의 운명 같은 것이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아빠를 영웅으로 바라보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장 미워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듯이, 그걸 막을 수도 없는 것처럼.

서울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내가 살았던 부산의 감각은 또 그만큼 옅어졌을 것이다. 서울 사람도 아니고 부산 사람도 아닌, 부산 사투리와 서울 말이 이상하게 조합되는 것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지만 이전과 분명 다른 억양의 존재가 되어간다.

로컬에서 자라난 감각은 서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고유의 감각이다. 해운대 바다 냄새와 함께 골목을 뛰어다닌 친구들, 마을의 대포산과 논을 뛰어다니며 몸에 밴 공간감, 느린 시간 속에서 길러진 사색의 깊이, 그 골목의 마을에서 이어온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신뢰의 질감. 이런 것들은 서울에서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옅어지고 소멸된 나의 무형의 콘텐츠였다.

나의 서울의 시간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우리는 누구나 중심으로 향하려는 본능이 있다. 그 본능은 용트림처럼 격동적이고 거셀 것이다. 그러나 용 같은 잠재력과 거친 열망을 지닌 젊음이, 성공과 돈, 권력이라는 중앙의 편협한 비전만을 받아들여 내가 '서울의 개구리'가 되어버리는 비극적 현실에 처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욕망의 추종자가 되고 스스로 그 서울의 척후병이 되었다. 그리고 정치와 예술의 서울, 그 서울의 허당과 모순에 치이면서 몸과 마음이 서울의 담 안에서 버티기 힘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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