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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아이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by 신지승


손바닥보다 작은 뺨

뺨은 손바닥보다 작은 영토이지만, 심리적으로는 가장 큰 폭력과 애정을 주는 부위다. 그곳은 자존심과 존엄성이 집약된 곳으로 우리 자존심의 수도이다. 나는 그것을 지켜내지 못하였고, 자존을 지키기 위해 그 폭력을 내면화해야 했는지 모른다.

종교의 경계에서, 두 번째 뺨

불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종립학교 P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종교적 휴전선 위 그 어정쩡한 초소에 서 있었다. 학교는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안에는 이미 불교라는 3년 된 문화의 잔뿌리가 얕게 박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바깥에서 불교학생회 창립 소식이 은밀하게 들려왔다. 해운대의 어느 산사에서 시작된 불교 동아리. 기존 S고등학교와 S여고가 주축이 된 'S불교학생회'에서 우리 P고등학교만의 독립운동(?) 같은 ‘P불교학생회’가 만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갈등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모임에 나갔다. S고 3학년 선배들이 나타났다. 평화롭게 절에 갈 줄 알았던 날, 갑자기 산사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가까운 곳에서 우리 P고 2학년 선배들은 쥐 죽은 듯 웅크려 있었다. 나는 멀찍이서 '이게 뭔 시추에이션?' 하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런데 "야! 누가 욕했냐?!" 하며 S고 3학년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누구 하나 나서지 않는 그 침묵의 늪. 공포는 무지막지했고 조폭 같은 한 사람 앞에 순진한 1학년 수십 명이 우두커니 서서 두려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결국 나는 손을 들었다. 그 정적을 견디는 게 힘들었다. "네가 했어?" "예,...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S고 3학년의 손바닥이 내 뺨을 향해 날아왔다. 한 대, 두 대, 세 대. 딱 세 대였다. 초등학교때의 20번의 뺨세례와는 비교가 되지 않다라는 생각도 스치고 갔다.

고행의 착각: 종교적 승화가 감춘 폭력의 체화

첫 학생회 법회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그런데 이상하게도 스님 말씀도 폭력의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오랫동안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나는 멍청했을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진실의 대가는 초등학교 2학년 때도 가혹했고 지금도 여전했다. 사실 그건 순진함 멍청함이었다. 하지만 내가 총대를 대신 맨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어느 누구도 나를 영웅처럼 떠받들지도 않았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단순히 폭력의 희생자나 피해자로 나 자신을 가두어둘 수는 없었다. 나는 나의 행동이 잘했든 못했든, 그에 대응되는 폭력을 나의 고행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불교라는 종교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수도의 한 방편으로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참으면 그만큼 영혼의 근육이 생길 거야.

그러면서 내 마음속 어디에선가 알람이 꺼졌다. '이건 이상하다'는 직관은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수행 방법 중 하나인 '할(喝)'이나 '봉(棒)', 그리고 '타(打)' 정도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빠진 첫 번째 함정이었다.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승화를 통해 폭력을 정당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행'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과정은 실상 폭력을 내면 깊숙이 체화시키는 위험한 메커니즘이었다. 고통을 의미 있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나는 폭력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한편으론 나는 피해자가 아닌, 저항의 태도로 합리화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폭력 감각의 마비 과정이었다. 반복적인 폭력 노출은 내 안의 공감 능력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점점 더 단단해진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맹목적인 운동 문화의 집단성에서 벗어나 극히 개별적 경험으로서의 폭력은 독립된 자아에 대한 의존은 커져 갔는지 모른다. 폭력은 내 속에서 살다가 내 밖으로 나갔다가 정신적인 것이 되었다가 육체적인 것이 되기도 했다. 평화적 투쟁을 이야기하다가 전략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후배들의 인격 모독은 뺨의 세례보다 더 가혹하고 아팠다. ‘형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야 해요’라는 집단주의적 구호 속에서 나는 오히려 개인주의적 상상력을 키워나가는 고립으로 내몰리고도 있었다.

대학, 이데올로기와 개인적 상처의 위험한 공명

5월의 어느 날, 수업 거부 투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사복형사들이 캠퍼스를 어슬렁거렸다. 친한 같은 과 선배가 문과대 옥상에서 전단을 날리고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들의 편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이 수업 거부하자!”며 강의실 앞에서 어설픈 선동질을 했다. 그 순간, 점잖기로 소문난 지도교수님이 들어오셨고, 나는 그분에게 순간적으로 뺨을 맞았다. 이번에는 한 대였다.

분하거나 화나지 않았다. 당연히 내 행동이 모든 면에서 올바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교수에 대한 인간적인 믿음과 신뢰가 컸기 때문에 그 폭력은 이전과는 다르게 받아들일 만했다. 나중에 그분은 총장이 되셨고, 나는 그 교수를 학교 생활 내내 여전히 존경했다. 그 무렵, 철학과 김 0 옥 교수의 강의는 폭력적이었다. '불교의 할, 봉 스타일의 교육'이랄까. 손바닥 맞는 건 일상이었다. 학점도 박하고 손바닥 맞는 게 당연한 과목이었지만 나는 김 0 옥 교수의 수업을 한 학기에 두 과목이나 들었다.

나의 폭력‘체험’은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마법과 만나 강력한 주문을 완성했다. “ 혁명에는 폭력이 불가피하다.” 개인적 상처와 정치적 신념이 만나면서 서로를 강화하는 공명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내가 겪은 폭력 경험들은 '혁명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틀 안에서 해석되었다. 더 이상 나는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역사적 필연이었고, 사회 변혁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다. 이런 정당화 메커니즘을 통해 나는 무의식 중에 폭력에 대한 도덕적 판단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개인적 트라우마가 사회적 폭력으로 전이될 준비가 완료되고 있었던 것이다.

거리의 전장: 피해자에서 가해자로의 변화

교문을 경계로 하여 돌멩이를 던지고. 거리에서 기습적으로 시위를 하는 가투(街鬪)라는 게 있었다. 보도블록을 깨어 잔돌로 만들어 현장에서 무기를 만들어 가는 문화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폭력경험외에는 가족이나 다른 폭력의 문화에 크게 노출되지 않았던 한 여린 심성의 아이가 권력과 성공을 위해 이젠 사회적 폭력과 개인적 폭력도 쉽게 용인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당시는 나 스스로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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