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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축구단

70년대의 동네 이야기

by 신지승


펠레가 가져다준 열정

국민학교 시절, 내 추억의 하나는 축구였다. 펠레의 '바나나킥'이 브라질에서 한국 부산의 변두리까지 건너와 아이들의 일상에 뿌리내렸던 것처럼. 세계의 강렬한 문화는 TV를 타고, 때로는 알 수 없는 권력을 타고 우리네 삶 깊숙이 스며들었다. 나는 그 문화의 거대한 흐름 한복판에서, 오롯이 축구공에 묶인 채 살았다.

학교 뒤 부모가 운영하던 문방구 친구는 007 영화 시리즈가 개봉할 때마다 제임스 본드의 영화이야기를 나와 친구들에게 문방구안에서 풀어냈다. 흥미로웠지만, 굳이 007 영화를 보러 가거나 그 세계에 빠져들지는 못했다. 나에게는 축구공이 전부였으니까. 언제나 내가 비싼 축구공을 사야 했고, 결코 저렴하지 않은 공 값을 전적으로 부담해야 할 만큼, 나의 축구에 대한 집착과 열정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렬했다.

축구를 하다 다치고 팔 깁스를 한 채로 몇 달을 보냈고, 깁스를 푼 지 얼마 되지 않아 같은 팔을 또 다쳤다. 그제야 어머니는 다시금 커다란 식칼로 축구공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때는 넓은 공터가 많아 경기장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도 우리 집의 벽을 골대 삼아 혼자 공을 차며 훈련했다. 땀 흘려 무언가에 미쳐본 기억,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 그런 욕심은 못 미쳤지만 그것이 내 국민학교 시절의 전부였다.

부산에서 만난 내 아들의 열정, 플로어볼

강원도 인제에서 학교를 다니던 아들이 5학년 때 갑자기 "아빠, 나 축구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어떤 문화가, 어떤 순간이 아이를 축구로 이끌었을까? 욕망은 언제나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온다. 어린 시절 축구밖에 남은 기억이 없던 나로서는 아들에게 꼭 축구 아카데미라도 다니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강원도 인제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찾을 길이 없었다.

6학년 때 아이들은 부산으로 전학을 왔다. 그리고 도시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났다. 플로어볼—남녀노소 누구나 하키의 재미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든 스포츠였다. 유럽에서 건너온 이 새로운 스포츠가 아들의 마음을 점령했다. 펠레의 축구가 내 시대에 스며들었듯, 이제는 이 운동이 부산의 학교 단위로 '수입'되어 내 아이들의 새로운 열정이 되었다.

부산으로 전학을 온 아들과 딸은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아침 7시면 어김없이 집을 나섰다. 평소 학교가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있어 8시에 나가던 아이들이 스스로 일어나 학교에서 플로어볼을 하기 위해 부지런해졌다. 일요일에도 아침 8시부터였다. 아이들 밥이라도 꼬박꼬박 먹이려다 보니 덩달아 나도 부지런해졌다. 혼자 있기 심심해했던 딸아이도 마지못해 따라나섰다가 플로어볼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들은 특히 열심이었다. 쉬는 시간에도 반 아이들과 플로어볼 놀이를 할 정도였고, 심지어는 비싼 플로어볼 스틱을 직접 구입하기까지 했다. "아빠, 플로어볼 협회 코치님이 나보고 열심히 하면 충분히 9월에 선수로 뽑혀 전국 경기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어!" 아들의 들뜬 말에, 나는 혼자 마음속 깊이 걱정과 불안이 파도쳤다. 여름 방학 때의 나의 계획 때문이었다.

아들의 열정을 막아버린 마음은 아프다

9월 시합을 위해 여름방학 때 열심히 훈련에 참여해야 하는데, 여름방학 이후 9월 초 선수 선발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고민이 커져갔다. 아이들이 방학을 하게 되면 오히려 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8월 스페인 , 일본 , 호주, 그리고 프랑스, 베트남, 태국 등 10개국의 감독들을 초청하였다. 그들과 함께 20여 일간 한국 방방곡곡을 여행하며 영화제를 치르는 것이 계획되어 있었다.

두 아이를 부산에서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아들은 여름방학 때 플로어볼을 하고 싶어 했으나, 결국 방학 때 연습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 결과, 아들은 최종 선수 선발 9명에 끼지 못하게 되었다. 코치가 아이의 가능성과 열정을 충분히 인정해 주었다는 것을 알기에, 아들의 천진한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나는 가슴 한쪽이 아프다는 것 느꼈다. 도시에 와서 처음으로 좌절을 경험하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들은 그 뒤 플로어볼에도 흥미를 잃었다.

반면, 딸아이는 여자 인원수가 적어서인지 실력이나 열정이 부족했던 딸아이는 최종 선수에 선정되었다. 딸아이는 '꿩 잡은 매'가 되었지만, 정작 딸아이는 여전히 그걸 '꿩'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시합 나가는 것 자체를 '귀찮은 일 하나 생긴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문화의 아이러니, 열정의 순환

아들은 플로어볼 대신 스페인, 일본, 호주, 프랑스, 베트남, 태국 등 10개국의 감독들과 20여 일간 한국 방방곡곡을 여행하며 영화제를 치러야 했다. 펠레의 축구가 내게 지독한 열정을 안겨주었고, 유럽의 플로어볼은 아들에게 새로운 꿈을 주었다. 그러나 나의 영화 일은, 아이의 뜨거운 여름을 빼앗았다.

이제는 사라진 오래된 뙤약볕 속의 나와 아들의 땀이 그리워지는 여름날이다.



ChatGPT Image 2025년 7월 28일 오전 04_39_19.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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