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로 시대를 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에게 엄마는 "어머니가 오셨다"라고 했다. 태어난 직후 나의 타고난 명(命)이 짧아 나를 무당에게 팔았다는데, 그 무당할머니가 나의 또 다른 어머니였다. 몹시도 혼란스럽고 쉽게 '어머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나를 매번 당혹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무당할머니는 마피아처럼 정기적으로 나의 명(命) 보호비를 받아가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무속 신앙의 아득한 울림으로 시작된 나의 시간에 초등학교 때 잠시 어두운 논둑길을 걸어 동네 교회를 다니던 밤의 또 다른 빛깔의 기억도 있었다.
뺑뺑이 추첨으로 범어사 종립중학교에 입학했다. 나를 둘러싼 또 다른 사유의 장이 우연히 열린 셈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불교 수업을 들으며 '생로병사''고해''무아''해탈''고행' '무상' 같은 개념들을 접했다. 간혹 눈을 감고 정적 속에 잠겨야 했다. 그 고요함은 어린 나에게 분명 새로운 문화였다. 지금에도 감사함을 가질 만한 선물이었다. 당시에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향으로 손목을 지져가며 수계를 받았다. 반야심경을 외우며 그 많은 한자 중에서도 '공(空)'이라는 글자가 남는다. '빌 공(空)' - 모든 것이 비어있다는 이 개념은 곧 반공과 만나게 된다.
중2학년 어느 날 담임선생이 웅변대회 출전자를 찾았다. '박규옥'이라는 나의 오랜 친구가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목소리가 좋다"라고 했고, 선생님은 무심하게 "그럼 네가 나가자"라고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당시에는 거절이라는 선택지가 없었다.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 작은 철제 연단 위에서 나는 '반공'을 외쳐야 했다. 6.25 남침, 괴뢰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해야 했다. 머리가 좀 커진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역설이었다. '공(空)' - 모든 것이 비어있음을 배우며 분별심을 내려놓으라 했던 불교의 가르침과, 특정 이념을 적대시하고 분명한 선을 그어야 했던 '반공' 이념. 이 극단적인 두 메시지 사이에서 중학생인 나는 아무 모순도 생각도 없었다. 지금에야 생각해 보면 '공'은 채우지 말라 했고, '반공'은 채우라고 했다. 하나는 비우라 했고, 다른 하나는 확실히 가져라 했다. 또 한자 그 자체로만 해석하면 반공(反共)이란, 공공에 대한 두려움, 연대에 대한 불신, 함께 사는 삶에 대한 불쾌함으로도 읽힌다. 그것은 결국 ‘자기만 살아남겠다’는 선택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결국 이 시대는 어떤 의미에선 이미 반공(反共)과 공(空)-허당사회- 에 도달하였다.
두 번째 뺑뺑이는 기독교 고등학교였다. 매일 아침 방송 설교로 하루를 시작했다. 불교적 정적과는 다른, 찬송가와 기독문화는 역동적 에너지를 경험하게 했다. 갑작스러운 익숙하지 않은 종교 문화에 혼란스러웠다. 매일 친구들과 학교를 파하면 범어사를 올라가던 중학교의 습관이 고등학교 때에도 결국 토요일마다 해운대 산사의 불교학생회를 습관적으로 찾게 만들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나의 관심은 또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1학년 1학기 3월 첫 리포터로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원고지 30장을 밤새워 작성하던 시간이 있었다. 불교와 기독교가 주로 존재론적 질문에 답하려 했다면, 이제 자본주의와 정치체제라는 현실 문제에 부딪혔다. 마르크시즘이 다가왔고,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주위 친구들의 영향으로 인한 호기삼으로 주체사상까지 연구해 보았다. 단파방송을 듣고 녹음하며 김일성의 사상이 무엇인지 탐구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결국 운동권과 하나 되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나는 주체사상이 묘하게 통일교의 논리와 너무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정역을 기반으로 하는 미녹 종교들에 대한 관심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증산교 같은 민족토착종교까지 애써 찾아다니게 만들었다.
교회의 찬송가, 대웅전의 반야심경, 철제 연단의 반공 웅변, 기독교 학교의 예배, 대학 캠퍼스의 마르크시즘과 주체사상, 그리고 민족종교들까지. 나의 청춘 기차은 이렇게 다채로운 사상의 역을 배경으로 스쳐갔다. 너무 많은 종교를 겉핥기식으로만 경험한 것 아닌가 싶지만, 그 어느 하나에도 깊이 몰입하지는 못했지만, 이 모든 경험들이 쌓여 나만의 독특한 통과의 세계관을 형성했을 것이다. 특정 교리나 이념에 매몰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비교종교학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 각각의 종교와 사상이 간이역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그 편력들이 모여 세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야를 만들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두 분의 어머니처럼, 어린 시절부터 마주한 종교 문화의 다양성이 나로 하여금 특정 종교에 대한 맹신을 방어하게 했다. 하나의 진리만을 좇기보다는 다양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입체적 시야를 갖게 되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공(空)'의 의미처럼, 나는 삶의 복잡함 속에서 명확한 답을 찾기보다는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너의 종교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쉽게 답할 수 없다. 내가 믿는 것은 어떤 특정한 교리가 아니라, 이 나름 다채로운 경험들이 엮어낸 '열린 의문'이다. 종교 또한 정신적 사상적 정체성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으며 그 탄생은 당대 삶들의 아픔과 모순에서 비롯되었기에 우리 시대의 고령화, 양극화, 저출산 자살문화, 집단우울을 관통할 새로운 종교의 탄생도 가능할 것이다. 내 통과의 세계관은 한국 현대사의 여행이었고 글로벌 역사의 풍경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