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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북촌리 학살 사건을 보는 또 다른 생각

by 신지승

천적놀이

제주 북촌리는 "제주의 피의 시간"이 가장 응축된 장소 중의 하나다.

제주 4.3에서 하루에 400여 명이 일시에 사살당한 최대 피해자를 만든 제주 북촌리사건은

4.3의 전체 맥락 위에 존재하기도 하지만 평화지대로 설정한 해안마을의 공간적 특이성에서 대다수 피해지가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주로 중산간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약간 다른 역사가 개입되어 있다

가자지구의 하마스대원들이 시민들의 공간에 숨어들어 모택동의 물과 물고기전략을 펼친 것처럼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펼쳐온 민중속으로 게릴라전략이 나타난 것이 사실이다. 베트남에서 현재의 하마스의 터널전술이 계승되고 있기도 하다.

북촌리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유독 마을에서 경찰과 남로당의 천적놀이가 격렬했다.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 49년 1월 북촌리 대량학살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1947년 8월 경찰관에 의한 주민 교사 폭행사건이 있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1948년 6월 우도지서장이 조난당하다가 북촌리에서 살해당한다

그 납치사건이 북촌리 청년들에 의해 벌어졌다.

이렇게 줄곧 갈등상황을 서로 만들어 가면서 중산간 지대의 소개로 인해 해안마을로 일반 주민들을 피난시켰지만 그 마을속으로 무장대들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북촌리는 낮에는 경찰, 밤에는 남로당 혹은 반토벌대 분위기로 오고 가고 했다고 한다. 마을 안에 땅굴을 파서 낮에는 숨어 있었다가 밤에 나타나 주민들과 함께 지냈다.

북베트남과 땅굴, 6.25의 중공군의 한국에서의 땅굴 그리고 제주 4.3 북촌리 땅굴 2020년 하마스의 땅굴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정치세력들의 구조와 전략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당파의 생존을 도모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한달간 북촌리에서 살면서 당시 어린 시절부터 살았던 주민들의 구술로 부터 채집한 이야기이다 )


그리고 1948년 12월 16일에 첫 번째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민보단을 조직해 마을을 지키고 토벌대에 협조하던 24명의 주민들이 느닷없이 군인들에 끌려가 동복리 지경 ‘난시빌레’에서 집단총살 당한 것이다. 자기들이 주민들의 속임에 모욕을 당한 분풀이를 한 것이다 , 자고로 목적을 가진 영악한 이들을 당해낼 재간이 토벌대에게는 없었다. 우익의 무지한 폭력성이 이렇게 발휘되는 경우도 역사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 엄청난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1949년 1월 17일,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북촌리에서 자행됐다.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희생을 가져온 북촌리학살 사건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동서 쪽 들과 밭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 날 북촌리의 마을에 있었던 불가항력의 남녀노소 400명 이상이 한 날 한 시에 희생되었다. 명절처럼 제사를 한날한시에 지내는 북촌리의 역사는 단순히 4.3 학살의 연장선상과 동시에 독자적인 사례로 보아야 제노사이드의 깊이 있는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료 )

1. 1947년 3월 1일 - 3.1절 발포 사건

2. 1947년 8월 - 북촌리 교사 폭행 사건

북촌리 학교에서 경찰관이 민간인 교사를 폭행하는 사건 발생.

마을 주민들과 경찰 간의 불신과 반감이 심화됨.

3. 1948년 4월 3일 - 제주 4.3 본격 발발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의 무장봉기 시작.

북촌리 지역도 이 영향권에 들어가게 됨.

4. 1948년 6월 - 우도지서장 살해 사건

북촌리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경찰 간부인 우도지서장을 납치·살해.

북촌리 주민들에 대한 군경의 감시와 압박이 더욱 심해짐.

5. 1948년 하반기 - 북촌리 민보단 조직

북촌리 주민 일부가 정부 편에 서서 민보단(치안 보조조직) 결성.

낮에는 토벌대 협력, 밤에는 무장대가 활동하는 이중적 긴장 상태 지속.

6. 1948년 12월 16일 - 난시빌레 사건 (1차 집단 학살)

북촌리 민보단 단원 24명이 군인들에게 끌려가 동복리 경계 난시빌레 지역에서 집단 총살.

"군경 협력자"로 의심받은 민간인들이 희생됨.

7. 1949년 1월 17일 - 북촌리 대학살 (2차 대규모 학살)

북촌국민학교에 주민 수백 명이 집결되었다가, 동서 밭으로 끌려가 집단 총살.

하루에 약 400명 이상의 주민이 희생됨.

제주 4.3 사건 전체 기간 동안 단일 지역 최대 민간인 희생 사건.

8. 1949년 2월 - 북촌리 주민들의 대규모 피난

학살 이후 북촌리 주민들 대다수가 고향을 떠남.

일부는 해안가나 다른 마을로 피난, 일부는 일본 오사카, 부산 영도 등지로 밀항 시도.


역사적 사실은 단일 사건에서 선과 악 정의와 비정의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많은 제주도민들은 4.3이 터지자 돈 있는 사람들은 일본 오사카로 밀항을 시도했고 부산 영도로 몰려들었다. 누군가에게는 부산 영도에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중간 대기를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나는 일본으로 밀항에 성공한 돈 많고 운 좋은 사람들과 영도에서 몇 번의 밀항을 시도하다가 결국 돈이 없어 부산 영도에서 살아갔던 사람도 만났다. 최근 하마 스에서도 터널을 통해 이집트로 밀입국 한 사람도 있었고 가자지구에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주 4.3은 판박이처럼 이스라엘 가지지구로 옮겨가서 재연되고 있다.


# 현기영의 순이 삼촌은 프로파간다 소설이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 판매금지되었던 , 책이 아니라 복사본으로 건네졌던 소설이었다

마을에는 소설 순이삼촌의 기념비가 만들어져 있다

소설의 내용은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 순이 삼촌의 죽음, 그 과거를 따라 간 이야기에는 북촌리 대량학살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느닷없이 학교로 끌려온 마을 사람들 이 토벌대에 의해 죽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 아픈 역사 속에서 버티며 살다가 그날 죽어간 마을 사람들 이 죽은 밭에서 죽어간 순이삼촌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북촌리의 대학살을 너무나 단순하고 느닷없이라고 말하기에는 빙산의 작은 조각처럼 뭔가 석연찮다. 나의 불만은 소설 '순이삼촌'그냥 학살과 그 트라우마에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물론 나와 같은 무당파, 육지인의 시선과는 달리 그 당사자였기에 맥락적이고 객관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단편 소설에서 감당 할 수 있는 량과 깊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주의 피의 역사'가 집약적으로 응축된 장소 중의 하나인 북촌리의 '1949년 1월 17일'만 도려내어 이야기하기에는 진실의 많은 부분을 놓친 느낌이 강하다. 특히 생명과 평화의 가치만을 껴안고 살아가야 할 무당파의 시선에서는 너무나 아쉬운 것이다. 역사를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를 넘어 정치세력들의 순장주의적 전략을 방어하기 위한 무당파의 역사를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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