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 Mar 06. 2018

Buen Camino!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이, 그 길을 걷다.

문득 순례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름께의 여행 중에, 내려쬐던 뜨거운 햇살과 캠핑장의 스산한 바람을 맞는 그 중간쯤에서 발이 부르트더라도 꼭 한번은 걷고 싶었다. 순례길만을 위한 순례길이 아닌, 그냥 내 일상과 여행 사이의 고행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사이의 그 순례길이 내 인생을 투영하는 것이었으면 했다.


그래서 별 생각이 없기 가기로 했다. 대단한 결정이나 마음가짐같은 건 아니었다. 여행도 그냥 가는 것, 공연도 그냥 가는 것, 순례길도 '그냥' 걷는 것이었다. 뭐, 이러면 어때서.



일정을 짜보니 포르투갈의 포르투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일정을 10일 간, 빨리 걷는다면 9일 정도로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포르투갈에 여행을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보통 많이 가는 까미노 데 프랑세즈가 아닌 포르투게스를 선택했다. 리스본에서 쭉 걷는 길은 25일 정도 소요되어서 전체를 걷진 않고 포르투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 포르투갈길은 포르투에서 시작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편이고, 정보를 찾아보다보니 리스본에서 포르투까지 오는 길은 도로 쪽으로 걷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안전에 대한 부분에서도 전반적으로 포르투-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경로를 추천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적으로 프랑스길보다 포르투갈길의 정보가 거의 없었고, 런던 집 근처의 돈트북스에서 가이드북을 산 게 준비의 전부였다. 적당하다고 생각한 40리터짜리 가방, 침낭, 트레킹화와 다니면서 입을 얇은 옷가지, 언제나 내 짐 중에서 가장 무거울 카메라들과 노트북을 꾸렸다.



Bye, bye, my sweet home.



런던을 아예 떠나는 거였다. 1년 6개월을 지낸 집에서 한국으로 보낸 짐 박스들을 싸고 남은 옷들은 근처 채리티숍 두 군데로 나눠 갖다주고, 남은 것들을 넣었는데도 가방이 너무 무거웠다. 여행 중에 버려질 것들은 버릴 거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은 짐을 나눠 이동할 계획까지 세웠다.


게다가 복병이 있었다. 한국으로 보내는 짐에 넣기엔 무겁기도 했지만 배워보겠다고 사놓고 나서 타지도 못하고 있었던 스케이트 보드였다. 결국은 가방 한 켠에 보드를 동여맸다. 순례길에 보드를 가지고 갈 생각을 한 거다. 나름대로 '걷기 힘들면 가다가 보드를 타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챙겼던 스케이트 보드는, 아직까지는 말간 얼굴을 하고 나와 함께 얼마나 험할지 모르는 여행길에 올랐다. 동시에 나도 막막해졌다. 진짜 괜찮을까.


런던을 떠나는 날 기차역에서 만난 동생은 (착하니까) '언니, 진짜 멋있어요!'라고 말했지만 가끔은 그 때의 나는 사실 얼마나 미련해보였을까 싶기도 하다. 그 커다란 배낭에 스케이트 보드까지 동여매 뒤뚱거리던 내가. 가는 길마다, 지나는 곳곳마다 가방과 보드가 걸려 바둥댈까 걱정이었다.


런던을 떠나는 날에도 비는 내렸다.



이동할 때마다 가방을 가지고 공항에서의 사투를 벌이느라 땀과 힘을 빼감과 동시에 손에는 굳은 살이 생기고, 내 가방싸기 스킬은 점점 늘어갔다. 가방을 짊어져야 할 어깨도 점점 단단해졌다.


그렇게 먼저 노르웨이의 피요르드를 거쳐 핀란드 헬싱키와 에스토니아 탈린, 프랑스 아비뇽을 지나 느릿느릿 도달한 리스본, 파티마, 그리고 포르투. 내가 곧 걸을 까미노 포르투게스는 포르투의 시작점인 대성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 주말에는 대성당에서 결혼식이 있었다. 아름다운 신부와 행복해보이는 신부의 아버지가 차를 타고 들어오는 모습이 멋져보였고, 신부의 아버지와 포옹을 나누며 신부의 손을 잡은 신랑을 보니 나도 왠지 뭉클해지는 것 같았다. 잘 차려입은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성당의 곳곳에 서서 그들을 축하했다. 낯선 이방인일 뿐인 나는 우연히도 그들의 잔치에 잠시 머물다 갔지만, 이 좋은 날씨 아래의 결혼식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아 함께 축하하고 싶었다. 초대하지 않았지만 초대받은 것만 같은, 나만이 아니라 성당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객이었다.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이 곳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부부는 조금은 더 특별히 축복받은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날씨도, 결혼식도, 사람들도 아름다웠다.





성당으로부터 이어지는 구불거리는 길과 계단을 따라서 순례길을 걸을 준비는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방은 이미 꾸렸고, 순례길을 버텨줄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충분했다.


야경이 아름다운 포르투의 밤을 지나, 몇 잔의 와인과 다리에서 울리던 음악 소리를 지나쳐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로 돌아와 순례길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포르투의 밤은 떠나기가 아쉬울 정도로 길마다 노란 빛줄기가 눈에 어른거렸다.




유난히 돌아오는 길은 조용했다. 잠을 청하기 위해 누운 알베르게의 침대에서는 몸을 뒤척거릴 때마다 비닐같은 것으로 덮인 매트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잠이 잘 오질 않았다.

과연 난, 이 길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